<평화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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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주의자
<다음 어학사전> 평화의 추구를
최고의 이상으로 하는 주장이나
사상, 운동 따위를 믿고 따르는
사람.
평화주의자 단어를 검색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은 글들도
있었다. 평화주의자. 착한아이.
나에겐 그런 꼬리표가 생겼다.
예민한 성격을 타고난 덕분에
주변의 불협화음을 견딜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언제나 작고, 크게 사소한 싸움
들이 벌어졌다. 주로 어른들의
싸움이었다. 신기하게 그 곳에
항상 내가 있었다. 나는 싸움이
싫었고, 소리 지르면서 다투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다. 분쟁을
조종하고 어른들이 화해하도록
도왔다. 내가 하지 않아야할
역할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걸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도 뒤집어
쓰길 잘했고, 정말 편리하게
따지는 성격도 아니었다.
유교문화가 아주 강력하게
들어간 집안이라 따지면
강한 처벌을 받았다.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어른
에게 말대답하는 건 나쁜 거야.”
라는 가르침을 상시 하는 곳
이었다. 거기에 어른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십계명을
교묘하게 넣어 어린아이를
조종했다. 편리하고 이용하기
쉽고, 이용당하기 쉬운 아이를
가족 안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고,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랐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해결
될 거라며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하나 하나 따지려면 애써
만든 평화가 또 깨질테니
어른이 된 아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순리대로 가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라면서 흘러가듯 감정을
지웠다.
나도 모르게 평화만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 언제나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지. 라는 말이 있는데 뱉는
사람도 있다. 웃고 있으니까 더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전적 의미와 달라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고민된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하겠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
싸우는 게 두려워 도망가는
사람. 그래서 항상 몸이 아픈
사람. 그게 나였다.
자소서를 써야했던 때가 있다.
당신의 가장 좋은 점에 대해
적으라는 곳이 있어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있는
곳은 항상 분쟁이 있더라도 평화가
찾아온다라는 걸 포장해서 썼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지 알겠다. 그러나
당시엔 정말 자랑스러웠다.
내가 있는 곳엔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고, 싸움이 나더라도 화해와
웃음으로 마무리 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불편한 사람들끼리 모여
야 하거나, 싸움이 날 것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가족 행사에
나는 소환됐다. 가야할 때마다
나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평화와 사랑이라는 말로 나를
타일렀다. 예수님의 향기를 품어
내는 사람이 되어야해. 나는
강박증에 걸렸다. 그래야만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며
책임을 떠안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이 나쁘냐고? 나쁘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평화를 사랑
하고 싶은 사람이 선택한
선택들과 결과들이 매우
나쁘다. 스스로에게 매우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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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주의자가 싫다.
평화주의자가 싫어졌다.
평화를 사랑해서 다 같이
행복한 게 좋은 거라며
내 자신의 고통을 회피했다.
마지막에 좋으면 다 좋은
거야라며 복잡한 감정들을
마음대로 채색했다. 덕분에
내 몸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마구 분비됐고, 내부 내장
기관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처럼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의
결과는 매우 나쁘다. 자신의
감정을 방임, 방치하기 때문
이다. 지금 눈앞의 분쟁과
다툼이 싫어서 말 한마디 뱉지
못한다. 문제는 그걸 이용하는
대상이 어디에나 반드시 있다는
거다.
“너 그때 말 안했잖아.
불편하면 말 하지 그랬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그런 경우가 반복되자
나는 불편함이 생기면
바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내일 내가 얼마나 바쁜
일이 있는데 이렇게 스트레스
받게 하는 거야? 나 화나라고
그러는 거야? 대체 의도가
뭔데?” 라고 이야기 한다.
“오늘 말 안하고, 다음에
말하면 왜 그때 말 안했냐고
딴소리 한다고 그러니까
그러지.” 라고 하자
상대방도 말을 멈춘다.
과거 한마디도 못하고,
안 했던 내가 그 한마디
했다고 한참 씩씩댄다.
물론 오늘의 나 역시
그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 분쟁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분쟁이 일어나는
곳에 나를 두지 않을 뿐이다.
그곳에서 그냥 벗어나면 된다.
굳이 힘듦과 어려움을 감당할
필요 없다. 그냥 나를 존중해
주는 곳에 나를 옮기면 된다.
예전엔 장소와 사람에서 벗어
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일주일간
펑펑 울기만 했다.
“이제 적응됐나보네.”
자신의 화풀이가 모두 끝난
사람이 이 말을 뱉었을 때
머리 속에서 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래도 뒷 끝은 없잖아.”
문제는 내가 뒷 끝이 아주
길다는 거다. 나는 아직도
그 날들을 전혀 잊지 못했다.
여전히 그 날들이 싫고,
상대가 싫다. 애초에 바뀔
거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다. 스스로 변하길 원했을
때.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면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변한다는 건 당사자가
원해서였을 뿐 당신 덕분이
아니다. 상황 때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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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두의 평화는 없다.
평화주의자가 싫다.
모두의 평화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지나영 교수님의 강의와
책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가르쳐줘야 한다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
존중하지 않는 장소에 나를
허락하지 말라고.
그 말을 벽에 써 붙였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본다. 나를 존중해야
하는 건 나다. 내가 불편하고
힘들면 그건 감당해선 안 된다.
회사라면 돈을 주니 감당할 만
하다. 인간은 살아가려면
돈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견딜 가치가 없다. 견디고
견디다 마음과 건강이 부러
지면 회복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감정을
잘 모르면 신체 증상을
살펴본다. 혀가 부었는지,
혈관이 터졌는지, 내부
장기의 느낌은 어떤지.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느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자란 착한 아이였던 어른
이라면 신체 증상을 살펴
보면 된다. 몸은 아주 정직
하다. 그래서 당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도 몸과 무의식
은 당신이 부러지기 전에
먼저 소리를 지른다.
이런 신호를 받아야만 알 수
있는 나를 보며 나는 또
다짐했다. 그래, 나를 존중
해야 하는 건 나야.
평화주의자.
집어치우라고 해.
나는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되는 대신, 평화를 찾아 떠나
기로 한다. 내가 있어서 깨질
평화라면 내가 떠나면 되고,
있는 곳이 평화가 필요한
곳이라면 따로 평화를 찾아
가면 된다. 상황과 사람을
나에게 맞출 필요 없다. 내가
자리를 비워줌으로써 오히려 훨씬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거다. 그래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건 평화를 원하도록
움직여지는 나를 위해 자리를
옮긴다.
옆 자리가 불편하다면
옆 사람과 싸우기 전에
다른 자리로 옮긴다.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순하게
건강한 선택을 하면 된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모두의
평화를 위해 나는 내 원 가정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정말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
평화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
행복하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
다투지 못하고 따지지 못하는
사람이니 그냥 평화를 찾아간다.
나의 평화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위한 선택을 한다.
그게 손해보는 것 같고,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길게 보면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이니까. 평화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양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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