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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실제 인물은 일치하지 않으며, 모든 인물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주제 : <가족편>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부제 : 코디펜던트의 가족 탈출기


1부. 2. 가족이라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 이 글에는 아동기 성폭력, 가족 내 정서적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으셨거나 감정적으로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읽기 전 잠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상처를 다시 들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마주하고 치유로 나아가려는 용기의 기록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천천히 읽어주시거나, 읽지 않고 건너뛰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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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아동기 성폭력, 가족 내 정서적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으셨거나 감정적으로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읽기 전 잠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상처를 다시 들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마주하고 치유로 나아가려는 용기의 기록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천천히 읽어주시거나, 읽지 않고 건너뛰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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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상처들

가족 체계 속 얽힘과 감정의 왜곡,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기

2. 가족이라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가족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한다는 믿음의 해체

※ 이 글에는 아동기 성폭력, 가족 내 정서적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으셨거나 감정적으로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읽기 전 잠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상처를 다시 들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마주하고 치유로 나아가려는 용기의 기록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천천히 읽어주시거나, 읽지 않고 건너뛰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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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 기억 속에 남은 마지막 장면들

  몇 년 전 할아버지께서 92세의 나이로 드디어 소천하셨다. 가족들은 내가 당연히 와야 한다며 내가 유일한 가족인 양 전화를 쏟아냈다. 그때 나는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보고 탈락의 고배를 마신 직후였고, 감정적으로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딸 올 거지? 모두 기다리고 있어.” , “누나, 엄마가 누나 언제 오는지 물어보래.”

  장례식장에 가기 전,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것 같았고, 이제 막 회복하기 시작한 구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다시 소란스러워질 것이 두려웠다. 결국 나는 검은 옷을 꺼내 입으며, 책상 위에 놓인 노란색 포스트잇에 이렇게 적었다.

  괜찮아. 정신을 잃지 말자. 마음을 놓지 말자. 괜찮을 거야.

  할아버지의 소천 소식에 ‘드디어’를 붙인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오랫동안 할아버지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왔다. 꿈에서 그는 시퍼렇고 하얗게 빛나다 못해 날카로워 보이는 낫(농기구 중 하나)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내 오른쪽 팔목을 잡아 끌며, 열 살 무렵의 나를 방 안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 꿈을 반복해서 꿨고, 매번 깨고 나서야 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마흔이 된 지금은 누구도 나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옆에 잠든 남편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괜찮다고.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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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의 기억, 그리고 반복되는 꿈
― 시간 속에 묻힌 감정이 찾아오는 밤

  이런 꿈을 꾸게 된 건 80세의 나이로 호흡기를 꽂고 곧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시작되었다. 구 가족, 친척들, 심지어 나를 버렸던 아버지까지 매일 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할아버지가 나를 기다리신다며, 마지막 인사를 해야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구 가족들의 말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났다. 그때 나는 대학원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전화를 무시하자 나를 더 설득해야하겠다 싶었는지 동생, 사촌 남동생까지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내 죄책감을 자극했다.

“언니가 할아버지를 잘 보내드려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지. 언니,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 많아. 유난 떨지마. 언니만 상처가 많다고 유난이야.”

“성경이 일흔 일곱 번도 용서한라고 했잖아. 기독교인이면 용서해야지. 우리는 모두 죄인이잖아.”

  마지막에는 아버지까지 전화를 걸어 “대신 좀 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오랫동안 묻어놨던 쾌쾌 묵고 썩어있는 감정들을 아주 오랜 만에 깊게 마주해야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정말 잘 봐야 할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아무도 나의 상황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결국 가기로 결심했다. 혼자 갈 용기가 없어,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에게 함께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과거에도 나를 지지해주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대형 병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응급실 병상들마다 호흡기를 낀 환자들이 각 방에 누워 있었고, 그 중 한 곳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병원은 보통의 장소에서 느낄 수 없는 이상한 기류들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생각 했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병실 앞에 서서 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숨만 쉬며 누워있는 그를 바라봤다. 나는 간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에서 남편이 지켜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 나뭇가지처럼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설었다. 근처 간호사님께 부탁해 할아버지가 계신 방에 혼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남편이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남편에게 의존해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보였고 죽음의 냄새가 곳곳에서 났다. 산소 호흡기를 보러 들어오신 간호사님께서 할아버지의 가슴부분을 툭툭 때려 잠을 깨웠다.

  왼쪽 편 머리맡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굴려 누군지 살펴보시는 듯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이제 왔어. 가자. 집으로 가자. 지금 가자.”

  할아버지는 내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낙상을 방지하기 위해 묶어놓은 끈들을 끊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잠시 전 할아버지 손을 잡으면서 귓가에 ‘할아버지 천국에 가실 거니까. 제가 기도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던 말이 후회가 됐다. 할아버지가 몸부림을 치시자 간호사님이 들어오셔서 몸을 묶어놓은 끈들을 푸시고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셨다. 내일이면 돌아가신다고 했던 할아버지가 기적처럼 살아난 순간이었다. 후에 구 가족들은 이것을 내가 이뤄낸 기적처럼 이야기 하곤 했다. 무서운 마음에 방 밖으로 나와 남편의 손을 잡았다.

“오빠 너무 무서워. 정말 무서워.”

  남편이 내 등을 도닥여줬다. 그리고 그 날 본 장면이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밤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방으로 나를 끌고 가려는 꿈으로 되살아났다. 방 밖에 나와 남편과 손을 잡고 마음을 다독이는 사이 나의 아버지를 미워해 아버지 대신 죽을 만큼 미워하며 아프게 했던 한 남성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눴고, 그 남성 어른은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리문 너머로 부자의 행동들이 보였다. 남성 어른은 자신의 아버지가 꽤 좋아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꽤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몸 곳곳을 주물렀다. 활기가 가득해진 할아버지는 팔과 다리를 번갈아 들어 올리며 웃음을 지어보이셨고 그 모습이 마치 인도의 수도승 같은 묘한 느낌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완쾌 되셔서 일반 요양원으로 옮기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반 요양원으로 옮기신 할아버지는 주변 사람들과 오는 사람들마다 호통을 치며 ‘못생긴 것들’ 이라고 욕을 하셨단다. 그리곤 구 가족들에게 “근데. 고년 참 예뻐졌대.” 라는 이야기를 하며 나를 기다리신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다. 속에서 열불이 올라왔다. 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10년 동안 시골집으로 나를 끌고 가려고 하는 서슬 퍼런 눈빛의 할아버지를 꿈에서 만났다. 그 사이 나는 단 한번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할아버지께서 천국에 가시길 기도하며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못난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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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내 편이면서, 동시에 나를 파괴한 사람
― 사랑과 폭력이 뒤섞인 관계의 잔해

  시골집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호해준 양육자는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어머니께서 내게 욕을 퍼부을 때면, 갑자기 나타나 대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이 싫어 내 머리를 장터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시골할머니 머리로 말아버렸을 때도, 당장 펴오라며 미용실로 보냈다. 덕분에 외모를 다소 지킬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다른 친척들이 나를 함부로 할라치면 슈퍼맨처럼 나타나 내 편을 들어주시던 분이었다. 가족 내에서 할아버지는 절대 권력을 지난 왕과 같은 존재였다. 덕분에 나는 극단적인 신체 학대나 최악의 결과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혼자 기생충에 감염되어 화장실에서 유충을 발견하고도, 어머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했다. 몇 달을 그렇게 고통 속에 있다가 할아버지께 말하자, 그는 바로 약을 사와 나를 돌봤다. 그날 새벽, 어린 내가 약을 먹을 수 있도록 두 번에 나눠 직접 챙겨주던 그의 모습은 오랜 시간 내 기억 속에서 천사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천사만은 아니었다.

  한없이 다정했던 손길이, 다른 날엔 너무도 낯설게 다가왔다. 보호자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나를 침묵하게 했고, 지켜주겠다는 말로 조종했다. 사랑과 통제가 뒤섞인 그 관계 안에서 나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무너졌다. 나중에서야 이런 관계를 심리학에서는 ‘혼란형 애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해자이면서 보호자인 사람에게 매달려야 했던 그 시절의 나는, 내면에 ‘가까이 가면 다치고, 멀어지면 버려진다.’는 모순된 감정을 안고 자랐다. 그 감정은 나를 끊임없이 분열시켰고, 내가 나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는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정신분석가이자 소아과 의사였던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진짜 자아(true self)’를 숨기고, 어른의 기대에 맞춘 ‘거짓 자아(false self)’로 살아간다.” 고 말했다. 그 시절의 나도 그랬다. 내가 느낀 감정은 언제나 '틀린 감정'이 되었고, 내가 기억한 고통은 언제나 ‘지나친 반응’이라며 묻혔다.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진실을 숨기고, 침묵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말할 수 있다. 그 침묵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살아남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시골집에는 나란히 평면으로 이어진 방이 세 개 있었다. 앞 방엔 부부와 아이들이, 중간 방엔 할아버지와 내가, 마지막 방엔 오토바이를 타고 술을 매일 같이 마시던 삼촌이 살았다. 시골집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얇은 판자 하나만 막혀 있는 느낌의 구조였다. 나의 유일한 양육자인 할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아침과 점심, 저녁까지 나란히 둘이서 먹고, 하루의 생활 대부분을 함께 했다. 새벽에 할아버지께서 염소에게 소금과 사료를 주러 방을 나서면 나도 같이 일어나 염소 막에 가야했다. 그가 나를 지켜준 대가로 나는 노동을 대가로 치렀기 때문에 그와의 일상은 마치 계약처럼 이어졌다. 보호를 받는 대신, 나는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는 내 여성성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깨끗하게 씻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욕실로 데려가더니, 나의 몸을 만지며 크기를 확인하듯 말했다.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여덟 살이었고, 아니면 다섯 살 중반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보호자의 손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못했고 그가 하는 행동과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어차피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되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천 원 줄게. 정말 좋은 거야.”

  거의 모든 생활을 할아버지와 하던 때였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조금 더 크면 보자. 보자. 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던 할아버지는 8살 무렵을 넘어서자 본격적으로 내게 이상한 말들을 시작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말하면 가족이 망가질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할아버지가 지켜줄게. 할아버지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복 받는 거야. 너는 착한 아이니까. 하라는 대로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나를 지켜주겠다는 할아버지는 매번 끝나고 나면 천 원짜리 지폐를 내 손에 쥐여 줬다. 나는 그 돈을 지구본 모양의 철제 저금통에 차곡차곡 넣었다. 나중에 돈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가 돼서 엄마에게 저금통을 갖다 줬더니 그 안에서 3만원이 넘는 돈이 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새콤 달콤이라는 과자가 150원 하던 때였기 때문에 엄마는 저금통을 갖다 줄 때마다 저금을 잘한다며 진심으로 좋아하고 칭찬해주셨다. 그 칭찬이 행복하고 그리워서 나는 그 이후로도 열심히 저금을 했다. 그 후 삼촌이 시외로 일하러 나가면서 삼촌의 방이 내 방이 됐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분리된 방을 갖게 됐다. 나는 내 방이 생겼다는 기쁨에 한동안 들떴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면서 나는 그가 했던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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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구원해줄까
― 세상에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은 없다는 믿음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내 방이 생겼다. 내 방에는 쓸 만한 가구 하나 없었지만, 안정적이고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녹이 가득 슬어 곧 부서질 것 같은 책상마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조그맣고 쇠 냄새가 가득 나는 책상이 좋아 닦고 또 닦았다. 잘 열리지 않아 구리스를 바른 서랍을 닦고 또 닦으며 내 공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성교육이 필요하다며 외부 선생님들을 초빙했다. 외부 선생님들이 학교에 방문했고 그들은 다양한 기구들을 보여주고 한편의 비디오를 틀어줬다. 그리고 가족 내 혹은 주변에서 비디오에서 나온 행동을 경험했다면 꼭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영상 속 상황은 너무도 익숙했다. 비디오를 다 본 후 선생님 한분이 들어오셔서 학생들의 눈을 감게 하셨다. 그리고 비디오에서 나온 내용들을 경험한 아이가 있으면 조용히 손을 들라고 하셨다. 비디오에 나온 내용은 할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과 상황들이었기 때문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반드시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손을 들어야 할까? 괜찮을까? 할아버지가 말했잖아. 말하면 가족이 망가진다고 했는데. 나는 결국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어 가족이 무너지는 게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나는 마당에서 마른 잎사귀들을 대나무 빗자루로 쓸고 있는 할아버지를 맨 처음 마주했다. 집은 아무도 없는지 조용했다. 인사를 하고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말했는데, 다음에 또 물어보면 손을 들지도 몰라.”

  그날 밤, 나는 수저를 문고리에 걸어 문을 잠갔다. 창호 바른 얇은 나무문 너머로, 자정 무렵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 앞에서 한 시간 넘게 애원하며 말했다. 오늘만 문을 열어주면 천 원이 아니라 만 원을 주겠다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 밤들이 반복됐고 매일 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다시는 누구도 내 몸과 마음을 건드릴 수 없게 해달라고. 그 기도는 어린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눈을 감고 누군가 손을 들기를 기다리던 순간 선생님의 호흡이 귓가에까지 느껴질 정도로 손을 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몇 분 동안 지속됐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선생님은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된다며 아이들에게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하고, 어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태어난 이후 만난 어른들은 나를 학대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노동력을 착취하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어른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손을 들지 않았다. 만에 하나 내가 손을 들어서 가족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유일하게 갈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시골집은 창호를 바른 나무문으로 만들어져있고, 문고리도 전통 방식을 따랐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게 안쪽에서 문을 잠그라며 수저 하나를 주셨다. 그 수저를 의지해 문고리에 꽂고 새벽이 되면 바들바들 떨었다. 어김없이 자정이 되면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할아버지가 내 방 앞으로 오셨다. 잠깐만 문을 열어달라고 이야기만 하자고 1시간 넘게 창호 바른 얇은 나무문을 나만 들을 것 같은 느낌으로 두드리셨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생각해 볼 때 과연 나만 들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엄청난 역사적 트라우마 생존자였기 때문에 나보다 예민해서 밤잠을 거의 주무시지 못하는 분이셨고, 어머니는 내가 가끔 창호 바른 나무문을 세게 닫기라도(세게 닫힌 거다.) 하면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나와서 뺨을 때리곤 하셨기 때문이다.

  그 밤들을 보내면서 다시는 나의 몸과 마음을 함부로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동기의 다양한 폭력은 아주 오랫동안 나의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짓밟았다. 나는 기쁨에 잠기는 순간에서조차 죄책감과 죄의식을 느꼈고, 깊은 수치심에 스스로를 우주만큼 밀어내고 미워했다. 그리고 타인의 불행조차 내 책임처럼 느끼며 깊고 깊은 어둠 속에 잠기는 일을 반복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반복해서 매일 가라앉았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외부에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하고, 가해자에게도 애착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을 '혼란형 애착(disorganized attachment)'이라고 부른다. 나를 지켜야 하는 어른이 동시에 나를 위협할 때, 아이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대신 자신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안전한 환상’을 만들어 버틴다. 그건 감정의 실패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그리고 ‘가족이 망가진다’는 말 앞에서 침묵을 선택하게 만든 그 두려움은, 심리학적으로 외상 유대(traumatic bonding)라고 불린다. 위협과 보호가 동시에 주어질 때, 아이는 혼란 속에서도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자신을 희생한다.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내 감정을 믿지 못했고, 내 기억을 의심했다. 내가 본 게 정말 맞았을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끝없이 따라왔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 모든 혼란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어렸고, 너무 외로웠고, 구조 받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나는 나대로 아주 잘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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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손조차 잡을 수 없었다
― 감각이 닫힌 몸과 마음, 닿을 수 없는 거리

  몸과 마음을 닫은 이후,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벽을 쌓았다. 같은 성별의 친구들에게조차 손끝 하나 닿지 않도록 거리를 뒀고, 대화도 의도적으로 피했다. 공부를 핑계 삼아 사람들 곁을 조용히 지나쳤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 나를 겪었던 친구들은, 내가 차갑고 자기중심적인 아이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은 '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나는 나르시시즘이라는 방어막을 통해, 무너질 뻔한 자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르시시즘 바로보기』라는 책에서는 인간에게 나르시시즘은 위협적인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심리적 기제라고 말한다. 물론 오늘날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자기 보호의 에너지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종종 '내 안에 흑염룡이 있다.'는 말처럼 자기중심적 상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잘못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런 시기를 거쳐 건강한 자아경계를 배우고, 성숙한 감정 조절력을 얻는다. 그러니 만약 어린 시절 혹은 청소년기에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면, 부디 죄책감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동기에 겪은 폭력은 아이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모두 뒤틀어 놓는다. 상처받은 아이는 아무리 좋은 것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나는 세상을 온통 위험으로 가득 찬 곳이라 여겼고, 나는 존재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라 믿었다. 그런 아이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믿음 덕분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내게 준 힘이었다. 하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허락하신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한편으로 나를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독특한 확신으로 이어졌지만, 아이였던 나에겐 그것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살아 있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 시절, 모든 감각을 닫고 살아남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런 방식의 살아남음에 대해 심리학에서는 종종 ‘해리(dissociation)’라는 단어를 쓴다. 몸은 교실에 있었지만, 마음은 딴 데 있었다. 다정한 손길도, 웃으며 다가오는 얼굴도 어쩐지 믿기 어려웠고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혔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더 무서웠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나쳤다.

  『몸은 기억한다』에서 트라우마 전문의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외상은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몸에 저장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내가 밤마다 잠들기 어려웠던 이유, 누군가의 손길에도 깜짝 놀라며 등을 움츠렸던 이유, 모두 내 몸이 나를 대신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즘—그 오해받는 단어. 나는 그 단어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나르시시즘 바로보기』에서 저자는 “나르시시즘은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심리적 피난처”라고 말했다. 그 시절 내가 만든 방어막은, 누구보다 나를 지키고 싶었던 나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나를 이제는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도망치고, 숨고, 애써 외면했던 그 모든 순간도 결국은 나를 지키기 위한 용기였음을 이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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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
― 고통조차 흐르며, 자리를 비우는 시간

  고통에 깊게 잠겨본 사람이라면 고통을 살아내는 시간들이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잘 알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재벌 2세든, 누구든, 고통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 찾아오고, 때로는 그것이 세상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 누구의 고통과도 비교할 필요 없다.

  얼마 전 한 심리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인상 깊었다. 코끼리와 개미의 비유였다. 뾰족하고 작은 압정으로 코끼리를 찌르면 코끼리는 아프지만 죽지 않는다. 하지만 개미는 같은 압정에도 죽을 수 있다. 반면 높은 빌딩에서 떨어뜨리면 코끼리는 죽고, 개미는 살아남는다. 고통도 이와 같다고 하셨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자극이 치명적일 수 있고, 누군가는 커다란 사건에도 견뎌낼 수 있다. 고통은 비교할 수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고통은 결국 흐르는 것이고,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믿음은 내 안에 생명을 남긴다고.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는 세상, 반드시 스스로가 겪고 지나가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면 좀 더 현명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나를 위한 성장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의미 중심 회복(resilient meaning-making)'이라고 부른다. 루시 홈 박사는 『Resilient Grieving』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시간만 지나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시 써 내려가는지에 따라 회복의 깊이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아니, 그 말을 내 안에서 증명해냈다고 느낀다.

  그리고 『선택』을 쓴 에디스 에거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상처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처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다." 그 말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조용히, 내 삶을 다시 선택하기로 했다. 이제는 알고 있다. 상처는 나의 일부가 될 수는 있어도, 나의 전부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나는 그 아픔을 견뎌냈고, 결국 오늘의 나로 살아내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를 칭찬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처럼 긴 밤을 건너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만을 위해 살아가도 괜찮아요. 내가 허락할게요. 그리고 신도 이제 당신 삶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고 허락해 주실 거예요. 당신이 오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살아줘서 고마워요.“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이들이 공명할 수 있는 작은 증언이었기를 바란다. 이 글을 마치며, 나와 비슷한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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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 참고문헌

1. 김혜남,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갤리온, 2007, p. 73
→ “사랑은 때로 폭력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진짜 사랑은 결코 누군가를 조종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
2. 도널드 위니컷, 『놀이와 현실』, 김영희 옮김, 나남출판, 2005, p. 163
→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진짜 자아(true self)를 숨기고, 어른의 기대에 맞춘 거짓 자아(false self)로 살아간다.”
3.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장혜경 옮김, 을유문화사, 2016, p. 49
→ “외상은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몸에 저장된다.”
4. 캐런 호너, 『신경증과 인간의 성장』, 조미량 옮김, 부글북스, 2011, p. 119
→ “사랑받지 못했다는 감각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수치심 중 하나다.”
5. 루시 홈, 『Resilient Grieving』, 홍한별 옮김, 심플라이프, 2021, p. 108
→ “우리가 겪는 고통은 시간만 지나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시 써내려가는지에 따라 회복의 깊이가 달라진다.”
6. 에디스 에거, 『선택』, 김정혜 옮김, 더퀘스트, 2020, p. 245
→ “우리는 상처를 선택하진 않았지만, 그 상처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
7. 크레이그 말킨, 『나르시시즘 바로보기』, 김문주 옮김, 소울메이트, 2016, p. 56
→ “나르시시즘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적 피난처다.”
논문
8. 이영애, 「혼란형 애착의 발달과 심리적 영향에 대한 고찰」, 『한국심리학회지: 발달』, 제18권 1호, 2013, pp. 45-67
→ “혼란형 애착은 보호자에 대한 애정과 공포가 공존하는 복합적 감정 상태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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