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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6 - 10. / <연재소설> / <최종수정>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
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 종교,
지명, 사건 등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아동 성추행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본 작품은 저자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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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립니다. 

6. 붉은 성경책

 

 

학교 교실 안.

 

교실 안 적막이 감돈다. 칠판 앞에 두 명의 여자와 남자 어른이 서 있다. 남자 어른이 자신들이 온 기관을 설명했고,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 명의 선생님들은 성교육 전문 및 가족 성폭력 전문 상담 기관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소개한 세 명의 선생님들 중 단발머리를 한 여자 선생님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플라스틱 모형을 들고 한참 설명이 이어지자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단발머리 여자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머리를 뒤로 올려 묶은 여자 선생님이 검정 테이프를 기계 안에 넣었다. 잠시 후 텔레비전에서 영상이 나오기 시작하고, 영상 안에는 다양한 성폭력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혜령이 영상을 보다 얼굴이 붉어진다. 영상이 끝나자 남자 선생님의 말이 이어진다.

 

"자 이제 눈을 감고, 영상에서 본 것 같은 일이 있었던 친구는 손을 들어보세요. 손을 들면 우리가 전부 해결해드릴 거예요. 무서워하지 말고 반드시 알려주셔야 도와드릴 수 있어요."

 

혜령은 책 상 아래로 내린 두 손을 꽉 쥐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펴본다. 친구들이 모두 눈을 감고 있다. 혜령이 어깨를 좁히고, 아래로 고개를 파묻듯 숙였다.

 

눈을 감아요. 선생님이 볼 거예요. 눈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

 

손을 들면 안돼. 엄마랑 가족들이 다친다고 했어. 혜령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손 드셔도 되요. 주변에서 이런 일을 봤거나,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경우에 반드시 알려 주셔야 해요. 괜찮으니까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지, 교실엔 고요하고 쓸쓸한 느낌이 가득해졌다. 영상 속에 혜령과 비슷한 아이가 나왔다. 혜령은 아이가 겪은 일을 보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과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혜령은 셋째 범수의 부인인 한길 엄마 얼굴이 생각나 손을 들 수 없었다. 처음으로 혜령은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알게 됐다. 혜령은 다시 눈을 살짝 뜨고 주변을 살펴본다.

 

손을 들어도 될까. 손을 들고 난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지?’

 

혜령은 가족들을 배신한다는 기분이 들어 결국 손을 들지 못했다. 전 날 선생님들이 방문하기 전 친구들이 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요즘은 할아버지 랑도 그걸 한대. 좀 그렇지 않냐. 내가 봤어.”

 

그런 일이 있대? .. 마친 거 아니냐? 으웩. 말도 안돼.”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혜령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자신을 봤을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 염소 막으로 옥석이 혜령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혜령을 뒤로 돌게 한 후 옥석이 자신 만의 의식을 치뤘다. 혜령은 그때를 떠올렸다. 그 사이 선생님들이 교실을 나갔고,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왁자지껄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집에 오는 길, 손을 들지 못한 혜령이 속상한 마음에 교회로 향한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돼. 아니. 알려야 하는 거 아닐까? 어떡하지. 나는 더러워진 걸까. 나는 죄를 지게 된 걸까.’

옥석의 집 앞 마당, 대문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며 옥석이 대문을 쓸고 있다. 옥석은 자신을 신이 데려가든지, 사람들이 잡아가든지 둘 중 하나가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혜령이 늦어질수록 두려움이 더 깊이 들어왔다. 멀찌감치 혜령의 모습이 보이자 옥석이 빠른 걸음으로 혜령에게 다가간다. 마당 곳곳의 흙이 파여 있고, 파인 자리 하나로 혜령이 서 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은 재밌었고? 왜 이렇게 늦었냐. 바로 돌아왔어야지."

손을 들어 라고 했는데, 손을 들면 안 될 거 같아서.. 왠지 이상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요.”

잘 했다. 잘 했어.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야. 그 놈들이 다 같이 널 속이는 거야. 니가 오늘 가족들을 지킨 거야. 정말 잘 했다. 잘 했어.”

 

옥석이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을 한참 묻고서야 깊은 숨을 토해냈다. 자신을 잡으러 올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한숨을 내 쉬는 옥석 옆으로 파인 마당 한 곳을 혜령이 발로 비비고 있다.

잘 했지. 할아버지. 왜인지 아무도 손드는 사람도 없고, 나만 들면 이상하잖아.”

옥석은 다시 낮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숨이 토해진 곳에 무엇인가 채울 요량이었다. 건강을 위한다는 말로 한 잔씩 마셨던 인삼주가 점차 과해졌다. 덕분에 술이 금세 떨어졌고, 이번엔 더 많은 인삼과 소주를 사서 인삼주를 만들었다. 만들다보니 꽤 맛이 그럴싸했다. 매일 여러 잔, 마음을 충분히 적셔줄 때까지 마셨다. 인삼주는 막걸리보다 진하게 취하게 했지만 다음 날 머리는 개운했다.

 

역시 인삼이 몸에 좋군.’

 

옥석은 본격적으로 인삼주를 담아냈고 얼큰하게 취하는 날들을 보냈다. 그 이후 옥석이 거하게 취하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밖으로 내놨다. 인삼주를 먹고 나면 마음이 토해졌고, 거나하게 취하는 날이면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니 년이 날 죽일라고 밥에 독을 넣었지? 내가 다 알아. 니 년이 이 시아비를 무시하니까 인사도 제대로 안 하지. 내가 니 년을 죽이고 말거다."

술이 거하게 취하면 옥석은 범수의 부인 한길 엄마에게 욕지거리를 했다.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주변에 보이는 물건들을 던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옥석은 벼루와 붓은 던지지 않았다.

"낫으로 목을 베어 버릴 거다. 이리와. 이년."

다음 날 아침 옥석이 새벽 4시 기도를 드리고, 작은 유리잔에 인삼주를 따라 입에 털어넣었다. . 맛 좋고. 인삼과 알콜의 냄새가 섞여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매일 때마다 마시는 인삼주는 옥석을 더욱 불안정한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셋째 범수가 집에 돌아와 바로 옥석의 방문 앞에 서 있다. 범수는 늦은 밤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옥석의 방으로 향하곤 했다.

아버지, 저 다녀왔어요. 제가 좀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그래. 들어와라.”

 

아버지 오늘 애 엄마한테 소리 지르셨어요?”

 

한길 애미가 그러더냐?”

 

셋째 범수는 옥석의 행동을 직접 보지 못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저녁에야 들어오는 범수가 옥석의 행동을 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한길 엄마로부터 낮의 일들을 전해 들었던 범수는 한길 엄마의 등쌀에 밀려 옥석에게 왔고, 어쩔 수 없이 물어야만 했다. 옥석의 주변은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범수는 낮에 일어난 일을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럴 일이 무에 있다고. 걱정하지 마라. 시골 삶이 팍팍해서.. 한길 애미가 힘이

든가 보다. 내가 더 잘 하마. 걱정하지 말고. 너는 니 일만 잘 하면 된다.”

네 아버지. 쉬셔요.”

그 이후에도 범수는 여러 번 한길엄마의 부탁에 옥석 방에 들어왔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한길 엄마는 셋째 범수가 없는 한 낮이 더욱 두려워졌다.한길 엄마에게 기댈 집도, 기댈 사람도 없었다.

그 무렵, 범수는 농장의 크기를 크게 늘려갔다. 매일 엄청난 양의 병아리를 시골로 들여왔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둘째 관수의 부인과 넷째 인수와 그 식구, 막내 춘풍을 시골로 불러들였다.

 

다 같이 잘 살 수 있응게. 반드시 성공할겅게.’

 

셋째 범수가 시골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가족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셋째 범수가 더욱 바빠지자 집에서 일찍 나가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과가 됐다. 옥석은 대 낮이면 인삼주에 취해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고, 저녁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선비 같은 표정과 자세로 붓글씨를 썼다. 그럼에도 셋째 범수의 부인 한길엄마는 매일 정갈하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옥석을 대접했다. 한길 엄마는 더 이상 옥석을 쳐다보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건 쳐다볼 필요가 없어.’

 

한길 엄마는 마음을 점차 닫아갔다.

아버님, 진지 드셔요.”

옥석의 불안정한 행동들이 반복되자, 옥석과 혜령 단 둘의 식사로 바뀌었다. 한길 엄마와 한길, 운길은 다른 방에서 상을 차려 식사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옥석이 한마디 내 던진다.

 

"여기에 독이 들었는지 은수저를 넣으면..."

옥석은 두려움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문이 잠겼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확인해야만 잠이 들었다. 그 즈음 춘풍은 옥석의 집에서 물건들을 챙겨 농장이 자리한 집으로 옮겼다. 춘풍이 떠난 덕에 혜령은 방이 다시 생겼다. 그때부터 혜령은 창호지 바른 문고리에 숟가락을 꼽아놓고 옥석의 방문을 막았다.

 

혜령에게 방이 다시 생긴 후 늦은 밤이 되면 어김없이 혜령의 방 앞에서 혜령을 불렀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옥석의 밤 두드림은 애절하게 계속 됐다.

퉁퉁. 툭툭.

 

문 좀 열어봐. 이번엔 만원을 주마. 아니 2장을 줄 거야. 3장은 어떠냐. 아무 것도 안 할 테니까. 열어봐. 자냐. 자는 거 아니지?”

속삭이듯 들리는 목소리에 혜령이 귀를 막았다. 혜령은 교회에서 받았던 세면이 붉게 칠해진 성경책을 품에 안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질끈 감은 눈에서 물기가 흘러나와 베개를 적셨다.

신이 있다면 저를 지켜주세요. 엄마를 보내 주세요.’

매일 밤 사각사각 자갈을 밟는 소리,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령은 눈을 꼭 감고 옥석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 사랑을 배우기 전 혜령은 두려움을 먼저 배웠다. 조용하고 쓸쓸한 밤 공기가 혜령 방 안을 휘감았다. 붉은 성경책이 혜령의 심장 위에서 오르내렸다.

 

혜령에게 방을 다시 생긴 이후, 옥석과 혜령은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됐다. 혜령은 더 이상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혜령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다. 사람의 온기를 피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걸어 다녔다. 여자 친구들과 손을 잡고 다니지 않았고, 팔짱을 끼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불편했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해야 진짜인 거야. 그 누구도 마음을 알아선 안돼.’

 

늦은 밤이 되면 옥석은 혜령의 방문 앞에서 애절한 소리를 냈다. 다음 날 아침엔 언제 그랬냐는 듯 옥석은 좋은 가족이 되어 있었다.

. 비밀이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너 때문에 망가질 거다. 그건 다 네 책임이 될 거야. 그러니까 입 닫고, 너만 조용하면 돼.’

 

혜령의 비밀은 창호지를 바른 문처럼 약하게 흔들렸다. 누군가 구멍을 뚫어주길 바라면서 창호지 문 너머로 작은 몸을 숨겼다.

 


7. 각자의 사정

 

7. 각자의 사정

 

한길어멈은 더 이상 범수에게 아픔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해.’

 

범수의 아내 한길 엄마에게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아이들뿐이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게 한길 엄마가 지닌 신념이었다. 매일 아침 한길 엄마는 혜령의 도시락을 싸고, 옥석의 아침상을 차렸다. 밥을 곱게 지어 보온 통에 담고 반찬통에 나물과 오징어 젓갈, 김치를 담는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년이 왜 이렇게 안 일어나. 내가 언제 딸이 필요하댔어?

왜 마음대로 아무나 데려다 놓는 건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해. 검은 머리 짐승은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랬다고. 씨벌 것들. 두 년 놈을 내가 왜 책임져야 하나고. 내가 이게 아침마다 뭐냐고.”

범수의 아내 한길엄마는 옥석이 듣도록 크게 소리를 지르고, 도마를 쾅쾅 두드렸다. 옥석을 향한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아침, 혜령이 일어나 마루에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고운 햇빛의 냄새가 코에 파고든다. 혜령이 한길 엄마가 곱게 싸준 도시락을 메고 대문을 나선다.

 

산돌에게 새로운 부인이 생긴 후, 산돌은 더 이상 혜령에게 전화를 하지 않고, 교육비를 보내지 않았다. 한길 엄마의 아침 비명은 매일 더 강하게 혜령에게 닿았다. 그렇게 해야만 한길 엄마가 살 수 있었다. 혜령이 도시락을 들고 마루에서 일어서자 한길엄마가 혜령을 불러 세운다. 혜령이 엉거추춤 한길 엄마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최대한 비굴하게 보이도록 손을 모으고 한길엄마의 처분을 기다린다.

니 아빠는 돈도 잘 번다며. 대체 갖다 주는 게 뭐 있어. 니가 전화해서 말해.

이번에 학교에 얼마 내야한다고. 니 팬티 샀는데 그거 만이천원이라고 꼭 말해라.

그것도 달라고해. 알았어? 대답해. 대답하라고.”

 

.. 전화 할게요.. 근데.. 아빠가 전화를 안 받으셔서..”

 

받을 때까지 해. 알았어? 대답 안 해? . 안경 벗어.”

 

안경을 벗자, 한길 엄마가 혜령의 얼굴을 오른쪽 손바닥으로 내려친다. 얼굴이 한쪽으로 내려진 혜령의 왼쪽 뺨이 붉게 탄다.

 

빨리 옷 입고 학교나 가. 전화 꼭 하고.”

 

“...”

 

대답해. 대답 안 해?”

 

..”

 

애비나 딸년이나 싸가지가 없어 가지고.”

 

한길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고, 혜령이 마당을 나선다. 느릿 느릿 혜령이 왼쪽 볼에 손을 대고 대문을 나선다.

 

혜령이 중학생이 되자 교복이 생겼다. 혜령은 튀지 않아 안전한 느낌을 주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게 좋았다. 학교가 끝나면 공중전화에서 혜령은 매일 산돌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돌은 주마 주마하더니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혜령은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그리고 돈을 받아올 때까지 셋째 범수의 부인 한길 엄마는 매일 아침 혜령을 불러 세웠다.

산돌의 사업이 잘 되갈수록 산돌에게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책임질 식구들이 많았다. 산돌은 자녀가 네명이 있는 여인과 결혼했다. 덕분에 산돌이 책임져야할 자녀가 경희를 포함해 다섯명이 됐다. 그리고 몇 년 후 여인과 사이에 자녀가 한명 더 생겼다. 덕분에 산돌이 책임져야할 아이가 여섯명으로 늘었다. 산돌에겐 책임져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났고, 산돌은 범수가 혜령을 잘 챙길 거라 믿고 혜령을 내려놨다. 매일 혜령이 전화를 걸자 산돌은 전화를 꺼버렸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통화 연결음을 듣고 혜령이 전화기를 내려논다. 공중전화 안에서 나온 혜령이 교회로 발길을 돌린다.

 

하나님 저.. 오늘은 어떡해요..’

 

산돌의 두 번째 부인은 음식을 맛있게 했다. 그녀는 늦은 밤에 들어가는 산돌에게 따뜻한 밥과, , 정갈한 반찬을 식탁에 올렸다. 산돌은 그녀의 밥을 먹을 때마다 따뜻함을 느꼈다. 그러다 산돌이 그녀의 사정이 궁금해져 물었고, 드디어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남편 역시 버스 기사였다고 했다. 어느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냈다는 그녀가 산돌 앞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남겨진 아이들 때문에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산돌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산돌은 그녀를 책임지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는 한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녀라면 산돌의 아들을 한명쯤 낳아주는 건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름이 성철인 그녀의 막내아들이 튼튼하고 잘 생긴 게 산돌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도 성철이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돌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그녀를 성철엄마라고 불렀다.

 

산돌은 매일 열심히 일했다. 산돌에게 시간은 금과 같은 같았고, 모든 시간을 돈으로 바꿔서라도 성철엄마와 아이들을 책임지리라 마음먹었다.

 

그 즈음 셋째 범수의 모든 신경은 온통 농장을 확장하는데 쏟아졌다. 범수 역시 책임져야할 식구가 많아졌다. 그래서 범수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산돌에게 전화를 걸었고, 산돌은 혜령을 잘 키워달라며 돈을 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범수의 사업은 끊임없이 적자가 났고, 돈이 들어갈 곳이 계속 생겨났다. 가족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범수는 산돌에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손을 벌리기 시작했고 산돌은 범수의 요구가 불편하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혜령을 생각해 돈을 보냈다. 이 사실을 한길 엄마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 같이 잘 살면 되지.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더.’

 

셋째 범수는 인정이 많아 외상을 주기 일쑤였다. 덕분에 농장은 커져갔지만 한길 엄마의 주머니는 비어갔다. 생활력이 강한 한길 엄마는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닭을 잡아 팔기 시작했다. 매일 고된 하루들이 한길 엄마에게 쏟아졌다.

 

중학교에 다니시 시작한 혜령은 집에 가는 길이 기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 혜령은 클로버 잎이 가득 피어있는 길가에 들러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클로버를 많이 찾으면 내게도 행운이 오겠지.’

클로버를 열심히 찾고 또 찾았다. 혜령의 손에 네잎 클러버가 늘어갈수록 행복이 많아진 기분이 들었다. 혜령은 클로버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이걸 먹고 집에 가면 오늘은 혼나지 않을 거야.’

 

혜령은 한길이처럼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행운은 항상 혜령의 것이 아니었다. 집에 가는 길목, 멀리서 천리향 꽃향기가 맡아졌다. 혜령은 멈춰 서서 천리향의 향기를 맡았다. 인생이 꽃향기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혜령은 미리 나와 반기는 향기에 위안을 얻는다.

 

혜령이 도착해 한길엄마에게 인사를 한다. 범수의 아내 한길엄마가 옥석에게 한바탕당한 후인지 표정이 가득 굳어있다. 한길 엄마는 혜령을 보자 담아뒀던 마음의 찌꺼기를 가득 쏟아낸다.

니네 아빠한테 가 버리라고. 내가 왜 너를 맡아야 해. 너 같은 거. 니네 아빠는 짐승이야. 짐승도 자기 새끼는 안 버려. 짐승 새끼 자식이니까 너도 짐승 자식이지. 개 만도 못한 놈. 지 딸이랑 지놈 아버지를 나한테 던져놓고. 할 도리도 안하고 말이야. 나한테 머리로 신을 지어줘도 모자랄 판에.”

한길엄마의 말은 혜령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혜령은 한길엄마가 미워하는 산돌을 같이 미워했고, 미워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혜령은 자기 자신도 미워하게 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혜령의 편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받을 수 없는 한길엄마의 빈 사랑이 아팠다.

학교 교무실 안. 혜령이 국어 과제물을 들고 교무실로 갔다. 국어 선생님 책상 위에 과제물을 올려놓고 나오려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걸음을 멈춘다.

 

이번에 어버이날 어버이 상은 정해졌대요?”

 

누굴 할지. 아직 정하는 중이라네요.”

 

.. 그래요? 큰일이네. 괜찮은 이야기 가진 어머니 어디 없을까요?”

 

글쎄. 받을 분들은 이미 다 받으셔서..”

 

선생님들이 어버이 상 대상자를 찾고 있었다. 혜령은 선생님들 곁을 다가간다. 그리고 한길 엄마의 위대함을 이야기 한다. 포장하고 또 포장해서 정말 좋은 어버이 모습으로 포장해 전달했다. 덕분에 한길 엄마는 어버이날 자랑스러운 어버이 상을 받았다. 남의 아이를 정성들여 키우는 여인, 어버이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이 시대의 본받을 만한 어버이 상. 한길 엄마 만을 위한 상이었다. 혜령은 이제는 한길엄마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길 엄마의 마음에 나눠줄 사랑은 남아있지 않았다.

 

혜령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범수의 가족 사업은 무너지고 있었다. 수 만 마리의 닭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적인 어려움까지 닥쳐 범수의 사업은 완전히 접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산돌의 사업도 말라가는 시기였다. 범수는 확장한 사업을 접을 수 없었고, 이리저리 돈을 빌리러 다녔다. 범수의 아내 한길 엄마는 점 점 더 살길이 막막해졌다. 사업을 함께 이뤄가던 식구들의 삶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하면 집에 오지 마라. 이젠 여긴 니 집 아니야. 이제 돌아올 곳은 없어. 니 물건이랑 다 태워 불라니까 오지마. 오기만 해봐. 알아들어? 대답 안 해?”

 

한길 엄마는 졸업을 앞둔 혜령에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을 매일 약속하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날 혜령은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서로 헤어지게 돼서 그럴 거라고 우는 혜령을 안쓰러운 듯 기분 좋게 바라봐 줬다.

 

졸업 후, 혜령은 자라온 집을 떠나 도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다행히 고등학교에는 기숙사 시설이 있었다. 기숙사 시설에 들어가기 전 혜령은 관수의 집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관수의 집은 혜령의 고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관수의 집에 있는 동안 혜령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관수의 눈엔 날카롭고 예리한 칼이 들어 있었다. 가끔 혜령을 바라보는 관수의 눈빛에 찔리는 기분을 느꼈다. 혜령과 같은 나이의 넷째 인수의 아들 기석이 관수의 집에 함께 머물렀다. 넷째 인수의 아들 기석은 총명하고 잘생겼다. 둘째 관수는 기석에게 가장 좋은 방을 줬다. 그리고 혜령에겐 모두 지나다녀야하는 거실 같은 방을 줬다. 기숙사에 자리가 날 때까지 혜령과 넷째 인수의 아들 기석이 관수의 집에서 남인 듯 생활했다. 기석은 혜령에게 학교 가는 길에 다른 길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 누구도 기석과 혜령이 사촌임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기석은 여러 번 약속을 받았다.

혜령은 더 이상 시골집에 갈 수 없었다. 셋째 범수는 가끔 혜령에게 찾아와 책값과 용돈을 주고 갔다. 그리고 시골집에 들어와서 놀다가라 했다.

 

혜령아, 전부 너 기다린다. 아빠도 매일 너 기다려. 주말에는 공부만 하지 말고

집에 와서 좀 놀고 쉬다가.”

혜령은 주말이 되면 항상 울었다. 서러워서도 외로워서도 아니였다. 그러다 셋째 범수의 계속된 요구에 용기를 내 가보기로 했다. 혜령은 자신이 살던 옥석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항상 다니는 길이었지만 오늘 만은 매우 멀게 느껴졌다.

 

정말 날 기다릴까? 괜찮을까? 엄마가 오지 말랬는데.. .’

 

옥석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혜령은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마침 셋째 범수가 집에 없었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혜령이 옥석의 집 대문 앞에 서자 마당에 풀을 뽑던 한길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재수 없으려니까.”

혜령을 발견한 범수의 아내 한길엄마가 뽑던 풀을 패대기치고 혜령의 앞으로 다가온다.

 

, 안경 벗어.”

 

그 말에 혜령이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벗은 혜령의 얼굴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은 한길 어멈의 세찬 손이 얹어진다. 오랜만에 익숙한 아픔에 뺨이 얼얼하다.

 

내가 너 오지 말랬지?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니 년은 항상 이렇게 사람 말을 무시해. 지 아빠랑 똑같애. 짐승같은 년 놈들. 꺼져. 꺼지라고.”

 

혜령을 뒤로 하고 한길 엄마가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부엌에서 바가지에 소금을 가득 담아가지고 나온다. 소금을 가득 집어 마당에 뿌리고 혜령이 닿을 거라까지 소금을 뿌린 후 바가지 안의 소금을 털어낸다.

 

다신 오지 말라고. 재수 없이. 씨벌.”

 

갈 곳이 없어진 혜령이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혜령은 끊겨버린 버스 정류장 앉아 서럽게 울었다. 이제 막 어두워진 거리를 두리번거리다 어린 시절 친구 집이 생각나 그곳으로 걷는다.

 

친구에겐 뭐라고 하지.’

 

친구 집에서 자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걷는 혜령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 혜령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오늘만 재워 줘.”

 

가득 붉어진 눈과 코 주위로 물기가 가득하다. 밤새 울고 또 운 혜령은 아침이 되자 인사를 하고 나온다. 그 날 이후 사정을 모르는 셋째 범수가 혜령에게 전화를 계속 걸었고, 집에 오라고 끊임없이 화내 듯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딸 보고 싶다고 오라했는데. 넌 왜 한번도 집에 오질 않냐. 공부에 바빠도 가끔은 얼굴을 비춰야지. 아빠가 딸 키웠는데 너무 서운하다.”

혜령이 갔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범수는 혜령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올 것인지 묻고 또 물어 다짐을 받았다. 혜령은 한길엄마의 이야기를 할 수 없어 힘없이 대답만 네네 하고 끊었다.

 

이번 주엔 꼭 와라. 아빠가 기다릴 거야.”

그러나 언제나 혜령을 맞이한 것은 산돌을 미워하는 셋째 범수의 아내 한길 엄마와 둘째 관수부인, 그리고 넷째 인수의 부인이었다. 셋은 입을 맞춰 혜령이 들어온 적이 없다고 범수에게 말했다.

 

걔가 원래 자라면서도 누구 말 듣던 가요?”

 

둘째 관수의 부인이 범수에게 말했다.

 

맞아요. 걔가 원래 대답만 하고 뭘 안 하는 애 였잖아요. 너무 서운해 하지 마셔요. 진짜 딸도 아닌데. 어쩔 수 없죠.”

 

넷째 인수의 부인이 한마디 얹는다. 혜령은 어린 시절부터 믿어온 하나님을 원망했다. 혜령은 하나님이 미웠다. 옥석이 미워지고, 산돌이 미워지고, 자신이 미워지고, 하나님이 미워졌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걸까.’

혜령은 이제 신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고 살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신 같은 건 나한테 관심도 없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혜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 거지 같이 돌아가지도 않았을 거야. 혜령은 집 대문 앞에서 쓸쓸히 뒤돌아 나왔다.’

 

혜령이 돌아선 옥석의 집 대문 앞에 쓸쓸히 나뭇잎이 굴러다녔다.

 

 


8. 이방인

 

8. 이방인

 

물을 마시려고 부엌에 서 있던 혜령이 돌아서면서 관수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관수를 본 혜령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관수가 혜령을 보자 한마디 뱉는다.

 

, 너는 여자애가 조심성 있게 걸어야지. 그렇게 걸어다니면 집 안 욕 다 먹이는거야. 살포시 걸어다녀. 여자답게.”

 

..”

 

어른이 말을 하면 크게 대답을 해야지. 그렇게 하니까 니가 미움 받는 거야. 알았어?”

 

관수는 혜령을 보면 화가 났다. 그 감정들에 관수도 당황할 때도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내뱉고 나면 시원함을 느꼈다. 차츰 복잡한 감정들에 익숙해졌고, 혜령이 웃는 것을 보면 관수는 웃는 혜령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묘하게 산돌과 닮아있는 그 웃음이 관수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매일 아침 교복을 입고 나가는 혜령을 볼 때마다 부글부글 끓는 감정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관수와 혜령의 모습을 본 기석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지나간다. 관수가 들어가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나온 기석이 혜령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내가 은혜 교회 옆으로 돌아갈테니까, 너는 반대로 돌아 걸어와. 알았지? 사람들이 너랑 나랑 사촌인 거 알게 되는 거 정말 싫어. 그러니까. 조심해줘. 누구한테 나랑 사촌인 거 말하지 말고. 부탁해.”

 

“....”

 

혜령이 기석의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기석과 혜령은 유치원을 거쳐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으로 왔다. 기석과 혜령은 덕분에 자주 사람들로부터 비교를 당했고, 그때마다 불리해지는 건 언제나 기석이었다.

 

알았어. 걱정하지마. 어차피 너랑 나랑 닮은 데도 없으니까.” \

 

퉁명스럽게 대답을 뱉은 혜령이 기석을 지나 방으로 온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빗은 후, 양말을 신은 혜령이 밖으로 나온다. 기석은 이미 사람들이 볼까 10분 전에 출발했다. 혜령이 신발을 신으려고 하자, 안 방에 앉아있던 관수가 소리를 지른다.

 

학교 가면 쓸데없는 데 정신 팔지 말고. 끝나면 제깍 제깍 돌아와.”

 

옥석의 집보다 환경은 나아졌지만, 혜령에게 관수의 집 역시 감옥 같았다. 관수는 혜령을 볼 EO마다 행동 하나 하나를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걸어 다닐 때도, 학교에 나갈 때도 관수의 눈에 혜령이 담길 때마다 관수는 한 소리씩 늘어놨다. 이런 관수의 행동은 산돌에 대한 미움이 짙어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혜령에게 더 많은 감정으로 더해졌다.

 

산돌이 놈한테 내가 뺏긴 걸 너한테 모두 빼앗아 줄게야. . 내가 다 뺏어주고 말거야..’

 

관수는 혜령이 어릴 때부터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지켜봐 왔다. 혜령은 관수와 마주할 때마다 옥석의 집에서 개를 잡던 그 날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회상 신.

 

옥석의 집이 오랜만에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썩이고, 푸른 하늘에 햇빛이 가득찬 아주 맑은 날이었다. 바람이 잔잔히 잎 새에 머물고 콧속에 들어오는 공기 향이 부드럽고 시원하다. 혜령은 마당을 건너 옥석의 방 건너편에 있는 작은 단풍나무 아래 앉아있다. 하늘이 파랗고 풀들이 파랗게 고개를 내민다. 막 올라오기 시작한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어 혜령에게 인사를 한다.

 

오랜 만에 둘째 관수네, 셋째 범수네, 넷째 인수네가 모였고, 춘풍도 빠지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쏟아지고 옥석의 손자, 손녀들이 마당에서 한참 뛰어논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있던 관수가 뛰어노는 아이들을 큰 소리로 불러 모은다.

 

이리 와봐. 전부. 큰 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

 

둘째 관수의 부름에 뛰어 놀던 아이들이 모여들고 단풍 나무 아래에서 새싹들을 바라보던 혜령도 관수의 근처로 간다.

 

너희 모두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에서 자라는 건 참 행운이야. 알고 있지? 여기서 엄마, 아빠 없이 혼자 자라는 건 혜령이 밖에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니들이 혜령이한테 잘 해 줘야해. 알았지? 얼마나 불쌍하냐. 이렇게 좋은 날에 가족 하나 없이. 그러니까 니들이 더 잘 챙겨주고.”

 

관수의 말에 아이들은 알았노라 대답한다. 그리고 마저 하던 놀이를 하러 뛰어간다. 범수가 춘풍의 방에 있는 참외를 깍고 있던 둘째 관수 부인에게 말을 건다.

 

형수, 오랜 만에 우리 식구들 다 모잉게 좋지라. 그나저나 형수 얼굴은 더 좋아졌소. 형수가 우리 집에서 가장 이쁜 건 아요?”

 

아이고. 그게 무슨.”

 

쑥스러워하는 둘째 관수부인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웃는다.

 

그랑게라. 형님은 늘씬하고, 이쁘요. 옷 센스도 좋고.”

 

웃음들 사이로 넷째 인수 부인이 거든다. 넷째 인수 부인은 뭘 먹지 않아도 살이 자꾸만 쪘다. 무엇보다 자신을 닮아 퉁퉁한 연기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림같이 잘 생긴 인수와 달리 인수 부인의 모습은 대조를 이뤘고, 사람들은 그림 같은 아들과 퉁퉁한 딸을 볼 때마다 한마디씩 던져댔다. 그래서 관수 부인을 향한 인수 부인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아이고 뭐시 그란당가. 얼굴은 동상이 이쁘지.”

 

둘째 관수 부인은 옆에 앉아있는 한길 엄마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머리카락 한 올 튀어나오지 않게 정갈하게 올려 묶은 머리를 한 셋째 범수의 부인인 한길 엄마가 수박을 썰어 한 조각을 내민다.

 

형님, 수박이 아주 맛이 잘 들었어라. 한 입 드셔요.”

 

수박이라는 말에 혜령이 춘풍의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마루에 앉아있던 옥석이 뛰어오는 혜령을 보고 말을 건넨다. 그리고 옥석은 방으로 들어가 먹을 갈기 시작한다.

 

촐랑 거리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춘풍의 방에 둥글게 모여 앉은 부인들이 과일을 깍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느라 바쁘다. 충풍은 넷째 인수부인 옆에 앉아 과일을 집어 먹느라 바쁘다. 마침 근처로 온 혜령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준다. 과일 향에 파리들이 방으로 들어와 욍욍 거리고, 파리를 잡기 위해 한길 엄마가 한참 파리채를 휘두른다.

 

둘째 관수와 셋째 범수, 넷째 인수가 수돗가에서 개를 잡느라 분주하다.

 

복날엔 개 한 마리 먹어야지.”

 

둘째 관수의 말에 넷째 인수가 뒤뜰에서 가장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개를 데리고 나온다. 굵은 목줄을 풀어 손에 쥔 관수가 수박을 먹던 혜령을 부른다.

 

헤령아, 나와. 나와 봐. 빨리.”

 

둘째 관수의 부름에 마루로 나온 혜령의 귀에 관수가 속삭인다. 관수의 손에 쇠사슬로된0 목줄이 찰랑거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너 나오기만 해봐. 보이지. 이 쇠사슬로 니 목을 묶어서 개집에 가둬 둘 거다. 넌 거기서 다신 못 나와. 알겠어? 넌 거기서 죽을 거야. 물 한 모금 안 주고 굶어 죽일 거야. 내가.”

 

혜령은 관수의 말에 얼굴이 굳어지고, 관수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린다. 몸을 으스스 떨던 혜령이 춘풍의 방으로 들어가 셋째 범수의 아내 한길 엄마 뒤로 숨는다. 옥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방에 앉아 붓글씨를 쓰고 있다.

 

애가 왜 이래. 더워 죽겠구만. 왜 이리 엉거 붙어?”

 

한길엄마가 혜령을 앞으로 던지듯 밀어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간 혜령을 관수가 다시 부른다. 대답을 하지 않자. 더 큰소리로 부른다.

 

현이 엄마! 혜령이 좀 내보내요. 지금. 저 년은 잘해 줄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 저 버릇 내가 오늘 고쳐줘야지. .”

 

관수 부인의 밀어냄에 억지로 마루로 나오게 된 혜령이 관수의 일그러진 웃음을 보고 울기 시작한다.

 

보라구 봐. 저 년은 저렇게 고집이 세. 말도 안 들어. 내가 잘해줄라고 해도 잘해줄 수가 있어야지. 저년 고집을 오늘 내가 고쳐주고 말게야.”

마루에서 다시 춘풍의 방으로 들어간 혜령을 관수가 다시 부른다.

 

현이 엄마, 혜령이 다시 내 보내요.”

 

관수 부인이 혜령을 밖으로 밀어낸다. 나가지 않으려고 우는 혜령을 한길 엄마가 파리채로 때린다. 파리채가 지나간 자리에 붉은 선들이 생겨난다.

나가라고. 이 년아. 니 년은 정말이지 니 년 아빠처럼 말일 랑을 안 들어.”

마침 수돗가에서 개의 목을 조르던 셋째 범수가 마루에 앉아있는 관수와 엉거주춤 서 있는 혜령을 바라본다. 관수는 밀려나온 혜령의 머리채를 쥐어 잡는다.

 

네 년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산돌이 놈 눈에 피눈물 나게 해 줄게다.’

 

둘째 관수는 혜령을 질질 끌어 수돗가로 데려온다. 개를 손에 들고 셋째 범수가 옆으로 엉거주춤 비켜선다. 관수가 수돗가 근처에 놓인 주황색 바가지를 집어 들고 머리채를 움켜잡은 걸 거칠 게 놓더니 머리 위를 바가지로 여러 차례 내려친다. 바가지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뜨뜻하고 붉은 피가 혜령의 얼굴을 타고 내려온다. 천천히 눈동자 안으로, 코로, 입으로 피가 흘러내린다. 바가지가 깨지자 관수는 손과 발로 혜령을 밟아댄다. 드디어 성이 찼는지, 혜령을 놓아준다.

 

니 년이 고집이 세서. 그냥 나왔으면 이리 안 맞았을 거야. 다 니 탓이니까. 고집 같은 거 부리지 마. 여기서 니 편은 아무도 없어.”

 

둘째 관수가 더러움을 씻어내듯 한참 손을 씻는다. 그리고 혜령이 놀던 작은 단풍나무 근처에 가서 뚜어놀던 아이들을 부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관수와 큰 소리로 웃는다. 개를 엉거주춤 들고 서 있던 범수가 개를 내려놓고 혜령을 안아올린다. 혜령의 고개를 숙이게 한 뒤 깨끗한 물을 틀어 머리를 감겨준다. 찢긴 두피 사이로 피가 멈추자 셋째 범수가 두툼한 수건으로 혜령의 머리와 얼굴을 닦아준다. 그리고 혜령을 방으로 들여보낸다. 부인들이 한 마디씩 던진다.

 

그러게. 말을 잘 들어야지. 뭔 고집이 그리 센겨.”

 

그러니까요. 눈치 있게 행동했으면 안 맞았지.”

 

긍게요. 꼭 한 대 맞아야 고분 고분해지지.”

 

기운이 빠진 혜령이 옥석의 방으로 들어가 눕는다. 마침 깔려 있는 고운 이불 위에 몸을 뉘인 혜령이 잠이든다.

 

엄마는 언제 돌아올까.’

 

회상 신 끝.

 

몇 달 후, 드디어 기숙사에 자리가 났다. 혜령은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을 하루씩 세어가며 기다렸다. 기숙사에 들어가자 혜령은 더 이상 관수를 마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혜령이 기숙사 생활을 하자 관수는 혜령을 보기 위해 가족들을 모았다. 시골 농장으로 세 식구와 춘풍, 아이들이 모였다. 오랜 만에 이어진 가족 식사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세로로 세운 식탁 가장 윗머리 자리에 둘째 관수가 앉고, 관수 왼쪽 아래 옆으로 옥석이 앉았다. 반대 편엔 셋째 범수가 앉고, 범수 옆으로 넷째 인수와 춘풍이 앉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아이들과 부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끄트머리 남은 자리에 혜령이 앉았다. 큰 상 두개가 세로로 펼쳐지고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음식들이 올라왔다. 관수는 저 멀리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혜령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그 나이 되도록 젓가락질 하나 못해. 그러면 무시 받는 거야. 뭐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이러니 집안 어른이 가르치는 게 중요한 거야. 니가 그러고 다니면 집안 욕 다 먹이는 거다."

끝자리에 앉아 있는 혜령의 젓가락질을 지적하는 관수의 눈이 매처럼 날카롭다.

주변에 앉아있던 세 명의 엄마들도 말을 거든다.

그러게 말이야. 니가 잘 하는 게 있어야지. 그래가꼬 어디서 밥이나 얻어먹을라고. 니가 이 집에 왔으니까 밥도 먹고 잘 데도 있지. 어디 나갔어봐라. 이미 굶어죽었지.”

 

관수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혜령은 더 말이 이어지기 전에 나갈 요량으로 밥을 3조각으로 쪼개 입안에 넣는다. 그 모습을 본 둘째 관수가 말을 꺼낸다.

 

이제 대학 갈 나이지? 니 년이 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가 다 안 되게 할 거다. 대학 근처도 갈 생각하지 마라. 넌 무조건 안돼.”

 

둘째 관수의 말에 혜령이 셋째 범수를 바라보지만, 범수는 앞에 놓인 생선 조림의 가시를 발라내느라 바쁘다. 혜령이 밥을 언른 삼킨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그 모습을 본 관수가 한 마디 더 얹는다.

저러니 복이 없지. 자 다들 맛있게 드셔요. 한길이랑 전부 맛있게 먹어라. 잘 먹고 건강해야 공부도 잘 할 수 있는 거다.”

 

그 무렵 관수는 산돌의 사업을 빼앗기 위해 궁리를 시작했다. 산돌은 관광버스 사업을 한 후 사업이 나날이 번창했고 매일 들고 다니는 현금이 무거워 가방으로 나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둘째 관수는 밥알이 씹히지 않았다. 기사 4명을 고용해 4대의 버스를 돌려가며 관광업을 한다는 말에 관수는 다짐하듯 입술을 질끈 깨문다.

 

형님이 잘 된 것도 다 내 걸 빼앗아서 그래. 그 놈이 가진 건 원래 전부 내거라고.’

 

다음 날 둘째 관수가 첫째 산돌에게 전화를 건다.

형님, 형님이 잘 나가는데 이렇게 놀고 있는 아우 좀 도와주소. 내가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하는데, 할 게 없단 말이요. 형이 큰 형인게. 이럴 때 동생들을 챙겨야지. 형이잖소.”

 

관수는 산돌에게 입안의 혀처럼 굴며 날마다 전화를 걸었다. 산돌은 관수에게 형 노릇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둘째 관수에게 자리를 하나 마련해 보마하고 약속을 했다. 그 일이 산돌의 인생을 바꾸게 될지 산돌은 몰랐다. 이후 산돌과 관수는 같은 업종에서 일을 했다. 산돌만큼은 아니지만 관수도 꽤 많은 돈을 매일 손에 쥐고 집에 돌아갔다. 그럼에도 둘째 관수는 산돌만큼이 아니라는 것에 분노했다.

관수는 산돌의 주변부터 살폈다. 주변 인물들과 주변 평판, 그리고 산돌의 거래처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관수는 반드시 자기 것을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9. 작은 틈

 

9.작은 틈

 

화투판이 벌어진 방에 관수와 세 명의 남자가 앉아있다. 네 명이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담배 연기와 빨간 화투를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껏 열을 올려 빨간 화투 하나를 내 던진다. 입 한쪽으로 문 담배의 재가 곧 떨어질 듯 하얗게 타들어간다.

"그거 들으셨소. 그 놈이 다 가져 갈라고 한당게. 우리 노선을 전부 그 놈이 해 먹고 있소. 형님 생각은 어떠요."

​​

관수는 반대편에 앉아있던 남자에게 묻는다. 붉은 화투와 녹색으로 깔린 담요 위로 남자는 화투 한 장을 던진다. .

"그 놈이 욕은 왜 그렇게 해 대는지. 버스에 탄 할망들도 벼르고 있다고 하지. 니 놈 형이잖아. 그 놈이."

남자의 말에 관수는 언른 말을 놓는다.

"그 놈이 내 형이기 한디. 어릴 때부터 전부 내 것일랑 다 뺏아 갔소. 이번엔 나도

가만 두지 않을 겅게. 형님이 좀 도와주소."

하얀 연기가 자욱한 방 안에 빨간 화투들이 번갈아 돌아간다. 빨간 화투가 여러 번 섞이고 지폐들이 이리저리 오간다. 입가에 문 담배에서 하얀 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글씨. 내가 뭘 도와줄랑가. 모르것네.”

 

그 놈이 가진 거 우리가 나누면 되지라.”

 

그 놈이 가만히 있을랑가 모르것어. 성격이 워낙 좃 같아야제.”

 

형님, 내 성격도 한 성격 하요. 긍께. 나만 믿고 형님은 따라오면 된당께.”

그 시간 산돌은 관수에게 줄 노선표를 생각한다.

 

관수도 처자식 먹여 살리고 돈 좀 불릴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곳을 돌아야지.’

 

산돌은 관광업에 이어 인 부업까지 손을 뻗었다. 매일 새벽 사람들을 태우고 대형 농가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일만 해도 꽤 많은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해온 덕분에 산돌의 차에만 타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산돌은 입은 험해도 그들의 사정 알고 농가가 힘들면 대신해서 삯을 내주고, 먹거리를 사다주고, 챙겨주는 일을 남모르게 해 왔다. 산돌에게 큰 단점이라면 술을 먹으면 옥석처럼 누구에게나 욕을 뱉어낸다는 것이었다.

 

산돌은 혜령 엄마를 잃고 매일 술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외로웠던 산돌 곁으로 둘째 관수가 오자 든든한 기분이 들어 기운이 더 생겼다.

 

내가 그래도 형잉게.’

 

산돌은 관수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가는 길, 콧노래가 나온다. 돌아가는 길에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촐랑촐랑 걷는다. 성철엄마에게 주머니에 넣은 두툼한 현금을 줄 생각에 기분이 났다.

성철엄마, 나 왔소.”

산돌은 대문 앞까지 나와있는 성철 엄마에게 돈 다발을 건넨다. 성철 엄마는 술병을 보고 눈을 흘기다 돈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성철은 여인의 막내아들 이름이었다. 산돌은 여인을 성철 엄마라고 부르는 걸 아직까지 고치지 못했다.

 

오늘은 일이 좀 됐는 갑소.”

 

요즘은 날씨도 좋고,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농가도 안정적이니까.”

 

겉옷을 받아든 성철 엄마가 빠르게 술상을 낸다. 산돌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소주 한잔에 따뜻한 국물과 밥이면 산돌은 충분했다.

내가 잘 모아서 잘 할랑게. 걱정 마소. 차곡 차곡 잘 모으고 있응께. 당신은 일만 잘 다녀오면 되요.”

산돌은 매일 성철엄마에게돈 다발을 갖다 줬고, 돈을 받아든 성철 엄마는 잘 관리할 거라며 산돌을 안심시켰다. 열심히 갖다 준 돈을 성철 엄마의 다른 주머니만 불리는 줄 모르고 산돌은 오늘도 의기양양 돈을 모두 건넨다. 거실에 누워 잠이든 둘째 경희를 바라보며, 산돌은 열심히 일하리라 마음먹는다.

​​

오늘도 한잔. 산돌은 여인이 떠난 후 하루도 술 없이 잠들 수 없게 됐다. 술에 의지해야만 아파오는 마음과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산돌은 성철 엄마를 때렸다. 성철 엄마의 맞는 모습을 아이들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맞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성철 엄마가 한길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소. 시볼 것들. 언른 둘 다 데려가소. 내가 뭔 고생이라고 이런 것들을 데리고 살아야하냐고. 씨볼 년 놈들. 내가 다 죽일 랑게.”

성철 엄마는 맞고 난 다음 날이면 돈 다발을 가득 찢어 쥐게 쥐고 셋째 범수와, 범수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럼에도 범수의 부인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면 어김없이 혜령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뭔 죄를 지었길래. 니 년이랑 저 놈까지 밥 챙겨줘 가면서 그년 한테도

욕을 먹어야 해. 니 집으로 가버려라. . 좀 사라지라고. 내가 뭔 죄냐.”

​​

성철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하는 셋째 범수 부인 한길 엄마에게 당연하다는 듯 전화를 걸었다. 화풀이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었고, 남은 화는 산돌의 아이인 경희를 때리는 것으로 풀었다.

내가 니 년 때문에 맞는 거니까. 니 년을 내가 똑같이 때려 줄거야.”

성철 엄마는 매일 산돌의 아이를 때리고 밥을 굶겼다. 산돌이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온 덕분에 경희는 매일 밖에서 생활해야 했다. 산돌은 그날도 들어와 돈 다발을 성철 엄마에게 가득 안 겼다. 돈 다발 두께만큼 성철엄마의 입술도 한껏 위로 솟아났고, 성철 엄마의 목에 걸린 커다란 금 거북이가 반짝였다.

 

성철엄마는 5명의 아이들을 한껏 먹이고 입히며 매일을 참아냈다. 산돌의 아이인 경희는 성철엄마의 아이들이 먹는 걸 지켜봐야 했다. 매일 굶고, 맞고,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경희는 엄마와 혜령이 보고 싶었다. 경희는 산돌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밖으로 쫓겨 났고,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아졌다. 산돌은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나눠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 산돌은 성철엄마의 행동을 모른 척 했다.

그 무렵, 둘째 관수가 산돌의 것들을 빼앗기 위해 판을 짜기 시작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면 관수는 자신 있었다.

 

그래 그 놈이 성질이 급하고 못 참는 걸 이용하면 될 게야. 누구를 사용 해 볼까.’ 관수는 오늘도 화투판에서 자신의 먹잇감을 골랐다.

 

그래, 저놈.’

​​

형님, 그거 안가 모르것네. 산돌이 놈이 형님을 병신으로 불러요. 내가 동생인 게 뭐라고 말은 못했는데, 내가 형님이랑은 얼마나 두터운 사이요. 그 놈이 형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병신취급 하던지 내가 다 화가 납디다. 형님이 돈도 잘 못 벌고 멍청하다면서 형님을 그렇게 무시 한디. 내 얼굴이 뜨거웠당게요.”

뭐여 참 말이냐. 그 새끼가. 내가 그동안 같이 일하느라. 나는 그 놈을 좋게 봤는디. 아주 씨볼 놈이 없구만. 내 한번 손을 봐줄게다. 어디서 감히. 못 배운 놈이. 내가 그려도 대학까지 나온 놈이랑 게. 본때를 보여줄 거구만.”

둘의 눈빛이 서로 붉어진다.

 

옳다. 걸려들었다.’

 

관수의 입가가 올라간다.

형님 같이 멋진 사람이 어딨다고. 의리하면 또 형님 아니오. 내가 또 아는디..”

​​

내가 그 놈 한번 손 좀 봐줘야 쓰것네.”

몇 주 후, 산돌이 머물고 있는 여관 앞에 남자 한명이 나타난다.

 

돌이 너 이 새끼 나와 봐라. 돌이 너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산돌은 산돌의 버스 근처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달려 나간다. ​​

 

형님, 무슨 일이요?”

 

돌이 너 이 새끼. 니가 노선도 전부 가져가고, 사람도 따가고. 나는 뭐 먹고 살라고. 니 놈이 다 죽일라고 그러는 거 아냐.”

 

갑자기 형님 왜 그러요.”

 

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내가 못 살 것응께 그라제. 못 배운 새끼가. 부모도 제대로 없는 게 어디서 굴러먹다 와서. 위 아래도 없냐

 

부모도 제대로 없는 놈이라는 말에 산돌의 얼굴이 붉어진다.

뭐 이새끼야. 이리 와봐.”

니가 와봐라. 이 새끼야.”

화를 참지 못한 산돌의 주먹이 먼저 나갔고, 남자는 바로 바닥에 눕는다.

으이구. 못 배운 새끼가 부모도 없는 새끼가 사람 죽이네. 아이고. 사람들 보소. 빨리 신고해주소. 나 죽는 당게.”

 

산돌이 씩씩 거리며 달려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경찰이 왔고 산돌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저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당게. 어이 형사 양반 말을 들어야제. 왜 나만 잡아가. 아이 씨발. 짭새 새끼.”

산돌의 말에 경찰은 공무집행방해죄로 끌고 간다. 산돌은 누워있는 남자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일방 폭행 사건과 공무집행방해죄로 산돌이 유치장에 들어간다.

나는 정말 억울하오. 형사양반 내가 경찰을 때린 게 아니고 내 버스를 발로 찬거랑 게. 믿어주소. 그리고 저 놈이 먼저 내 성질을 긁었소. 나도 맞았다고. 왜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아 씨벌. 이 놈의 세상.”

아무도 산돌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산돌은 구속된 후 재판으로 넘겨졌다. 일이 나쁘게 돌아가자 산돌은 성철 엄마에게 돈을 마련해달라 부탁한다. 성철 엄마는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알아보고 다녔다. 그러자 아무 것도 모르는 성철 엄마에게 관수가 전화를 건다.

형수, 형 꺼낼 라면 돈이 많이 든다고 하네요. 형이 아유..형수도 걱정이 많겠네요.. 제가 변호사랑 나오는 것도 전부 알아 볼랑게. 형수는 돈만 마련해요. 변호사 선임비로 족히 천만원은 들 거 같소만. 나오게 하려면 로비도 좀 해야할 거 같고.”

아무 것도 모르는 성철엄마는 돈을 급하게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빌리러 다녔다. 이미 가진 돈은 셋째 범수가 빌려 달라 할 때마다 보내준 덕분에 현금이 부족했다. 성철 엄마는 돈을 급히 빌려 마련해 관수에게 모두 보냈다. 관수는 그 돈을 들고 화투판으로 간다. 그리고 전부 다 잃고 다시 돌아와 다시 성철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형수. 돈이 더 필요하다고. 부족하다고 하네요. 더 마련해서 주소. 내가 다 알아서 할랑게. 걱정하덜마소. 형님 빨리 나올라믄 돈을 줘야항게.”

더 이상 돈을 마련할 길이 없는 성철엄마는 산돌과 이야기 한 후 버스를 팔기로 한다. 급하게 돈을 마련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한 산돌의 재산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시골 농장.

 

형님이 들어갔다면서요. 어떻게 된 거요. 형님이 형수님한테 변호사비랑 다 가져갔다고 하더만요.”

셋째 범수가 걱정이 되어 관수에게 묻는다.

 

어 그렁게. 돈이 많이 든다네. 그나 농장 문제도 있고. 너도 돈 막을 데가 많지 않냐 이번에 형님 버스 전부 팔게 해서 농장 빚도 막고 하게..나한테 전부 맡겨 나봐.”

형님, 버스들은 산돌형님 전분데 뺏으면 되것소.”

니 처자식도 생각해야지. 지금 농장 안 막으면 이거 전부 날리는 거여. 전부 내가 알아서 할랑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지 않겠냐. 농장 다시 잘 되면 형님 버스랑 사업이랑 니가 도와주면 되제.”

밀려드는 빚 독촉에 살길 마련이 필요했던 범수가 눈을 질끈 감고 관수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일단 급한 것부터 끄고 보자.’

 

버스를 모두 팔아 그 돈을 관수에게 맡긴 성철엄마가 그제야 변호사를 찾아간다.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거여요?”

돈을 주셔야 사건을 맡지요.”

그동안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는 변호사의 말에 성철엄마의 간담이 서늘해진다.

뭔 말이에요. 제가 버스까지 전부 팔아서 다 드렸는데요.”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건 진행이 하나도 안 되고 있어요. 돈을 주셔야 진행을 할 수 있어요. 어머니.”

더 이상 돈을 마련할 길이 없는 성철 엄마는 눈물을 훔치며 산돌에게 달려간다.

산돌은 그제야 관수를 사업에 끌어들인 자신을 원망한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1년 넘는 기간 동안 산돌이 나오지 못했다. 그 사이 관수는 시외에 큰 식당을 차렸거, 십여 명이 넘는 종업원을 쓰는 사장이 됐다. 그곳으로 춘풍과 현이 엄마를 불러 가게를 꾸려갔다. 그리고 불쌍하게 거리를 떠돌던 산돌의 아이인 경희도 식당으로 데려왔다. 산돌을 향한 약간의 속죄였다. 가게는 날이 갈수록 사람이 많아졌고, 그만큼 관수의 화투판 판돈도 높아졌다. 급기야 식당 방들 중 한 곳에 도박장을 열었다.

 

1년 후, 산돌은 들어갈 때 입었던 겉옷 하나와 천원 한 장을 돌려받았다. 그것이 산돌의 전 재산이었다. 중학생 정도로 자란 산돌의 아이 경희가 멀리 보인다. 산돌은 주머니를 뒤져 천원을 손에 쥔다.

 

경희야, 이 돈으로 과자라도 사먹어라.”

산돌은 성철 엄마에게 돌아와 돈을 구해 달라 부탁한다. 급한 대로 중고 버스라도 사서 시작하겠다는 말에 성철 엄마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돈을 다 갚고 예전처럼 돈 다발을 매일 쥐어 주리라 성철엄마에게 약속한다.

그 시간 농장은 매일 백마리 이백마리 씩 원인 모를 병으로 닭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나온 관계자도 무슨 병인지 모른다고 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 없이 죽어가는 닭을 보고 있자니 셋째 범수의 속이 타들어 갔다. 매일 죽은 닭들을 묻고 치우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사료 값 한 푼도 아쉬운 처지였던 셋째 범수는 급기야 죽은 닭들을 삶아 살아있는 닭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사료 살 돈까지 떨어진 범수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농장 가족들, 아이들까지 힘써서 닭들을 돌봤지만, 결국 모든 닭들이 죽었고 그제야 끝이 났다. 셋째 범수는 허망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운이 없으려니까. 뭘 해도 운이 없구나.’

그 시각, 관수가 운영하던 가게가 잘 되자 가게에 모르는 사람이 찾아온다.

왜 내 건물에서 장사를 하고 있소. 내가 주인이랑 계약을 한 당사잔데. 잠깐 놀리는 사이에 뭔 도둑놈이 쓰고 있어.”

뭔 소리야. 이 건물은 나랑 가장 친한 형님이 빌려준 거라고. 계약서도 있소.”

부동산 등기를 보면 내가 첫 번째야. 이 도둑놈아. 나가. 당장 나가라고.”

이중 계약이었다며 나가라는 말에 관수는 등기부를 한참 바라본다. 형 동생 하던 그 형님은 그 날부터 연락이 끊겼다. 둘째 관수는 열심히 변호사를 찾아보고 알아봤다. 이중 계약이었고, 두 번째로 계약한 것이 관수였다. 변호사는 부동산 등기부를 떼어보지 않고, 계약한 책임을 모두 관수가 져야한다고 했다. 관수는 한 순간에 사업장과 사업을 잃었고, 다시 시골 농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10. 엇갈리는 마음

 

10. 엇갈리는 마음

 

관수는 식당을 비워주고 백수가 됐다. 도박 후 남은 돈으로 식당 식구들 월급을 주고 나니 주머니가 텅 비었다. 둘째 관수가 식당을 하면서 셋째 범수에게 외상으로 가져간 닭 값은 결국 치르지 못했다. 관수는 식당을 비워주고 나오는 길에 범수에게 전화를 건다.

 

. 형이다. 잘 하고 있지? 내가 이번 주에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날 집에 있냐?”

 

, 들어오소. 이번 주는 배달도 없응께. 글고 형수님도 있고, 춘풍이고 있고, 인수 네도 있으니까. 다 같이 다시 해 가면 되제.”

 

, 그래. 다 같이 식사 한번 하자.”

 

관수는 따뜻하게 반겨주는 범수가 고마웠다. 범수는 이번에도 관수의 입성을 한길엄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요한 결정은 가장은 하는 거니까.’

 

혜령과 넷째 인수의 아들 기석이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 방은 7-8명의 아이들이 지내는 방과 1-2인이 사용하는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1-2인용 방은 남녀 기숙사에 각 하나씩 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불편한 혜령은 좋은 성적을 유지하겠다는 약속 하에 2인 방에 들어갔다.

학교생활이 시작됐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데다 사람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혜령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예쁘고 키가 큰 여자아이가 혜령 책상 앞에 섰다. 혜령은 물끄러미 여자아이를 올려다본다. 이름이 백희라고 했다.

, 오늘부터 내 라이벌이야. 너가 나보다 성적이 조금 높던데. 이번 중간고사에선 내가 반드시 널 꺽어줄 거니까. 그런 줄 알어.”

 

백희의 얼굴이 반짝 반짝 빛이 났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미끄러지듯 가볍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백희를 보며 혜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아이였다. 혜령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혜령은 매일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무리를 지어 다니는 걸 혜령은 부러운 듯 바라봤다. 그러다 혜령은 밖으로 나갔다.

 

빵이라도 사와야지.’

 

뒷편 매점에 다녀오는 길, 백희가 다가온다.

 

빵이네. 그런 거 먹으면 살쪄. 날도 좋네. 저기 가서 이야기나 하자.”

 

혜령의 앞을 가로 막은 백희 덕분에 근처 벤치에 가서 앉는다. 한참 백희는 엄마 이야기를 했다. 백희는 엄마가 홀로 키운 아이였다. 백희가 어릴 적 백희의 아빠는 자리를 비웠다. 아빠가 도망가서 얼굴도 모른다는 백희는 호탕하게 웃었다. 혜령은 백희의 이야기를 듣다 엄마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친척 집에서 자랐고, 아빠가 있지만 도망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백희는 엄마 만 있어도 문제없다고 한참 떠들었다. 혜령에게 아빠가 있다면, 백희에겐 엄마가 있었다. 쿵짝이 맞는 조합 같아 혜령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백희는 그게 뭐 대수라며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백희는 그 날부터 혜령을 보이지 않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혜령 곁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백희가 괴롭히는 주체라는 걸 혜령은 알지 못했고, 인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졌고, 혜령이 지나간 자리에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쟤가 그렇게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른데. 소문 다 났잖아. 엄청 싸가지도 없고, 사람들이랑 말도 안 섞는 게. 지 잘난 줄 알아서 그런다더라.”

 

남자는 그렇게 꼬시고 다닌다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핸드폰에 이상한 문자가 들어왔다.

여우같은 년, 우리 오빠한테 꼬리 치지마.

가만 안 둔다. 나쁜 년.

혜령은 문자가 오는 걸 보고 당황했다. 주변에 친구도 없거니와 꼬리를 칠 만한 남자도 없었다. 혜령은 남자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남자 아이가 다가오면 몸을 오소소 떨었다. 그들과 혹시나 닿을까 멀리 떨어져 지나가기 일쑤였다.

혜령에 대한 이런 저런 나쁜 소문이 더 많이 생겨났다. 혜령은 아이들과 친해지겠다는 마음을 내려놨다. 그걸 아는지 백희는 더욱 과감히 괴롭히기 시작했다. 혜령의 책상 안 물건들을 다 꺼내 올려놓고, 시험 전 혜령의 공책을 복사해서 아이들에게 보란 듯이 나눠줬다. 백희가 아이들 앞에서 종이를 나눠주다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혜령을 발견하고 말을 건넨다.

 

너가 공책 정리 잘하니까. 내가 먼저 복사해서 나눠줬어. 잘했지? 애들이 너 정말 정리 잘한다더라.”

 

혜령은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을 슬쩍 본 후 자리에 앉았다. 백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혜령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 후로 백희는 혜령의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뒤진 후 당당히 쪽지를 남겼다.

이번 기말 때는 내가 너 눌러준다. 그런 줄 알어.

혜령이 친해지려고 하는 친구가 생길 것 같으면 언제 나타났는지 백희가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갔고, 어디서든 나타나서 대화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백희와 친구가 됐다.

 

혜령아, 어쩌냐. 애들이 너 엄청 욕해.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야. 내가 너 지켜줄게. 걱정하지마.”

 

백희의 말에 혜령은 고마웠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소문의 주체가 백희라는 사실을 뒤늦게 혜령도 알게 됐다.

 

다음 학년의 반 배정이 있던 날, 혜령은 백희와 또 같은 반이 되어있는 걸 확인했다. 망연한 마음이 들어 굳은 마음을 먹고 교무실로 찾아간다. 이번엔 안돼.

 

교무실 안.

 

백희와 같은 반에 있으면 전학 갈 거예요.”

 

"백희가 있으니까 너가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백희는 공부할 수 있게 청량제 역할을 해 줄 거야. 그래서 일부로 같은 반에 묶어놓은 건데. 좋은 상승효과가 있어서 선생님은 좋다고 생각해.“

 

그건 선생님 생각이시죠.”

 

물러날 곳이 없는 혜령은 전 담임선생님의 말에 바락 바락 대든다. 혜령의 전 담임 선생님이 한참 혜령을 설득한다. 혜령이 선생님의 말에도 교무실을 나서지 않자, 미술 선생님이 다가와서 묻는다.

"무슨 일이래요?"

"백희랑 혜령이 같은 반이 된 거 때문에 혜령이 반을 바꿔 달라네요."

"왜요? 백희랑 혜령이랑 무슨 일이 있대요?"

과학 선생님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혜령의 곁으로 다가온다.

"백희가 많이 괴롭힌다던데, 선생님 모르셨어요? 다른 반으로 해 주셔요. 얼마나 괴롭겠어요."

반 배정을 맡았던 전 담임 선생님은 혜령의 표정과 주변 선생님들을 바라보다 백희를 다른 반으로 배정한다. 그제야 혜령은 안도의 숨을 내 쉰다. 그 뒤로 인수의 아이가 들어온다.

 

선생님, 저도 반 바꿔주세요.”

 

혜령과 같은 반이 된 넷째 인수의 아들 기석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다. 혜령은 과학 선생님 자리로 이끌려 나온다.

너가 처음 입학할 때는 참 날쌔고 명랑했던 거 같은데.. 점점 어두워지고 몸에 살도 붙어가고.. 선생님이 걱정이 많다. 그래도 마음 놓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선생님이 응원할게. 알았지?”

 

과학 선생님의 단아한 스커트에 올려져있던 손이 혜령의 손과 겹쳐진다. 따뜻하다. 얼굴을 푹 숙인 혜령이 선생님과 한참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선생님이 주신 책을 들고 교무실을 나선다.

 

혜령은 바닥만 보고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심장이 시려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그런 날이면 혜령은 많은 음식을 먹어야했다. 많은 음식을 먹은 날은 심장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혜령은 많은 음식을 먹고 잠들기를 반복했다.그리고 자주 굶고 많이 먹는 일을 반복했다. 많이 먹은 날은 따뜻한 심장을 안고 잠이 들었다.

혜령은 주말이 되면 돌아갈 곳이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울었다. 관수의 사업이 사라진 후, 혼자 살게 된 산돌의 둘째 아이 경희가 장터 근처 집에 있다는 이야기를 범수를 통해 들었다. 주말이 되면 경희가 있는 곳에 갔다. 경희는 볼 때마다 더 많이 말라갔다. 천원 한 장을 들고 경희와 초코파이 한 박스를 샀다. 경희는 초코파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농장 식구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 잡혔다. 셋째 범수는 혜령에게 연락을 했고, 전화를 받은 후 혜령은 매일 매일 더 많이 아파졌다. 산돌이 재판 문제로 집에 돌아올 수 없자, 성철 엄마는 산돌의 둘째 아이인 경희를 기어이 밖으로 내쳤다. 경희는 제일 싸고 추운 집에 버려졌다.

나가라. 니 년이 왜 이 집에 있어? 니 집이 아니야. 당장 나가.”

둘째 경희는 자주 굶었고, 학교까지 2시간 거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 수도가 끊기고, 보일러가 끊겼지만 경희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 경희는 농장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옥석의 집에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을 해 왔다. 경희는 배가 고파 이전 사람의 선물을 찾기 위해 장판을 들추고 또 들췄다. 매일 더 반질반질해지는 교복을 입고 경희는 학교에 갔다. 점 점 더 경희는 말라갔고, 겨울나무처럼 보였다.

 

이대로 사느니 죽는 게 나아.’

 

경희는 목을 손으로 조였다. 그 순간 서럽게 우는 혜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 같이 울게 되는 혜령이 눈 앞에서 울고 있다. 경희는 목에 올렸던 손을 풀었다. 아무 것도 없는 방 안에서 둘째 경희는 울고 또 울었다. 경희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빙글 빙글 돌아 울렸다.

 

산돌이 돌아올 즈음이 되자, 성철엄마는 드디어 경희를 불러들였다. 그 사이 범수는 경희의 사정이 딱해 아주 좋은 입양처를 마련했다. 한복집을 하는 할머니였다. 경희의 사정을 듣고 자신이 키워주겠다며 경희를 만나준 고운 사람이었다. 경희는 처음으로 받아본 사랑이 너무 커서 밤마다 행복에 젖었다.

 

이제 나도 행복해질 수 있어. 나도 가족이 생기는 거야.’

 

혜령과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언제든 어른이 되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굳혔다. 경희의 마음이 매일 부풀었다. 경희는 차분히 준비를 해 갔다. 마지막으로 산돌의 도장만 받으면 경희는 따뜻한 할머니의 하나 뿐인 손녀가 될 수 있었다.

 

성철 엄마는 날로 환해져 가는 경희의 얼굴에 눈이 시어 그 집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경희를 보내지 않기 위해 성철엄마는 매일 밤잠을 설쳤다. 산돌에게 매일 딸 하나 키우면서 다른 집에 수양 딸 보내면 나중에 그 원망 어떻게 들을 거냐며 노래를 불렀다. 산돌은 성철엄마의 말이 그럴 듯해 그러마. 승낙했다. 종이를 들고 산돌 집에 방문한 범수는 도장을 받지 못했다. 이미 한복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던 둘째 경희는 다시 성철 엄마 집으로 돌아왔다.

 

앞으로는 내가 잘 해 줄랑게. 그 집 갈 필요 없어. 내가 너 지낼 엄청 좋은 집 다 구해놨어. 그러니까 그 할머니 집에 갈 필요 없어. 아빠 밑에서 자라야지. 고아도 아닌데.”

 

경희는 매일 한복 할머니가 보고 싶었고, 할머니와 함께한 그 방이 그리웠다. 산돌과 성철 엄마는 한동안 돌아온 경희를 잘 챙겨주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몇 달 안 되 경희를 다시 시장터 방으로 돌려보냈다. 경희는 춥고 배고픈 방으로 다시 혼자 돌아왔다.

 

외롭고 추운 경희에게 어느 날 사촌 언니인 넷째 인수의 딸 연기가 찾아왔다. 찾아온 인수의 딸은 엄마가 되어주겠다며 경희를 포근히 안아줬다. 그리고 경희에게 손 편지를 써주고, 맛있는 과자를 가득 사줬다. 연기가 자주 찾아와 경희를 돌봐주자, 경희는 혜령보다 연기언니를 따르기 시작했다. 경희는 혜령을 사랑했지만, 혜령이 그만큼 사랑을 관심을 주지 않아 항상 서운했다. 그렇게 경희와 혜령이 하루만큼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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