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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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가족 안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상처와 갈등을 그렸다. 그 과정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가족이야기다. 상처 없는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다. 90% 이상의 가정에서 드러내지 않는 상처와 고통의 과정이 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상처와 아픔을 가진 성인아이로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상처와 고통을 물려준다. 자유 소설은 한 아이가 태어나 구성원 안에서 희생자가 되어 자라는 과정과 치유여정을 담았다. 자신의 내면을 깊숙한 곳에 묻고 모습만 성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혜령이 다가온다. 자유는 모습만 어른이 된 혜령과 함께 치유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회복과 치유를 담은 성장 소설이다. 자, 이제 혜령과 함께 자유를 향해 떠나보자. 진정한 자유가 당신과 혜령에게 찾아올 것이다.
자유
3. 사과와 여인
3. 사과와 여인
옥석은 아침부터 구두를 닦고 있다. 안 그래도 하얀 구두가 오늘따라 더 말갛게 빛난다. 마루에 앉아 한참 구두를 닦던 옥석에게 여인이 다가온다. 옥석의 집에 얼마 전부터 둘째 관수의 부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 산돌 대신 큰 아들 노릇을 하고 싶다는 관수가 부인을 먼저 옥석 집에 들어 앉혔다.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는 관수의 성화에 관수의 부인은 얼마 전부터 옥석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매일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하루 세끼 옥석의 식사 준비를 했다.
“현이 에미야. 나 나갔다 오마.”
“아버님 식사 안 하시고, 일찍 어디 가신가요? 식사하고 가세요. 제가 진지 올릴게요.”
“응응, 갈 데가 있지. 거기서 밥 먹고 오마.”
옥석은 사과가 가득 든 검은 봉지를 양손에 들고 둘째 관수 부인을 쳐다본다. 관수 부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둘째 관수 부인은 하루가 멀다하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상을 차려냈다. 그럼에도 옥석은 관수 부인에게 사과 한쪽 내밀지 않았다. 그런 옥석이 여인의 집에 갈 때면 사과를 담은 봉지를 양손 가득 들었다. 얼굴이 굳어 고개만 까딱하는 관수 부인을 뒤로 하고 옥석이 대문을 나선다.
하얀 백구두, 챙 달린 모자, 하얀 양복 3박자를 갖춘 옥석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신사라도 된 것처럼 양껏 꾸미고, 사과를 양손에 가득 들고 나서는 옥석의 발걸음이 가볍다. 둘째 관수 부인은 마당에 서서 한참 옥석을 바라본다. 관수 부인을 눈짓으로 들어가라고 한 후 옥석이 대문을 나선다.
둘째 관수의 부인은 한참 어린 여인을 대신해, 큰 며느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린 현이를 데리고 들어와 사느라 생활이 팍팍한데다, 옥석의 차별에 관수부인의 마음에 매일 불길이 일었다. 매일 관수부인이 최선을 다해 봉양을 했음에도 옥석은 고맙다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관수부인은 사과를 볼 때마다 여인과 산돌이 미웠다.
여인의 집에 도착한 옥석이 큰 소리로 여인을 부른다.
“아가야. 아가야. 나 왔다.”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마당을 지나 대문 앞으로 나온다. 살짝 열려있는 대문 틈으로 여인의 바쁜 걸음이 보인다. 옥석은 여인에게 사과 봉지를 들어 보인다.
“아이고. 넘어질라. 천천히 와라. 천천히.”
“아버님, 제게 주세요. 무겁게 뭘 또 가져오셨어요.”
“아니다. 내가드마.”
배꽃 같이 화사한 여인이 얼마 전 옥석의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가벼운 걸음으로 20분이면 시골에선 꽤 가까운 거리였다.
"아가, 밥은 먹었고?"
“이제 막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직이시면 아버님도 드시고 가셔요.”
마루 위에 앉자 방 안에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이가 보인다.
“이름이 혜령이라고 했지?”
“네, 그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이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누가 그랬다 네요.”
“그놈 아니냐. 그놈. 그 무당 나부랭이 놈.”
“그이 친군데.. 혜령이라는 이름이 좋대요. 아이의 이름으로 뭔 액을 막아야 한다고.. 그이가 그랬는데.. 자세히는 저도 잘 몰라요,”
“목사 아들 놈이 뭔 신을 받아 가꼬. 그런 놈이 뭔 친구여. 사기꾼이지.”
옥석이 한참 씩씩댄다. 아이 이름은 자신이 지어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무당 나부랭이 놈이 옥석의 기회를 빼앗아갔다.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의 얼굴에서 인화가 보였다. 고놈, 참 잘 생겼네.
“아버님, 방으로 들어가 계셔요.”
“아니다. 밥은 시원하게 마루에서 먹자구나.”
옥석이 가져온 사과를 정갈하게 깍아낸 여인이 부엌에 들어가 한참 뭔가를 굽고 있다. 옥석의 콧속으로 고소한 냄새가 들어온다. 킁킁. 옥석의 마음에 여인의 뒷모습이 냄새와 함께 그려진다. 마루에 상이 차려지자 근처에 혜령이 와서 숟가락을 가지고 논다.
“이리, 내렴. 아가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다.”
아이는 숟가락을 꽉 쥐고 놔주지 않는다. 그러다 옥석 옆에 놓인 사과를 봤는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아이의 눈이 총알총알 빛이 난다.
“이거 먹으렴. 아가야.”
사과를 입에 대고 한참 빨다 아이는 사과를 옥석에게 내민다. 사과를 받아든 옥석이 여인에게 말을 건다.
“아가, 여기 와서 같이 먹지 않고.”
“아버님, 먼저 드세요. 아이랑 같이 먹을게요.”
옥석의 곁으로 오지 않는 여인을 못 내 아쉬워하며 옥석이 숟가락을 든다. 맛있다. 여인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옥석은 둘째 관수의 부인이 들어온 덕분에 여인이 오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솜털마저 아름다운 여인은 산돌보다 12살 어리다고 했다. 그래서 여인의 집에서 이 결혼을 무척이나 반대했더랬다. 그 즈음 산돌은 시외 버스기사로 차곡차곡 입지를 다져갔다. 덕분에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오는 일이 태반이었고, 옥석이 혜령을 보러 자주 여인의 집에 방문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챙겨야지.’ 옥석은 마음을 다졌다.
“사과가 좋더라. 사과를 먹으면 예뻐지고 건강해진다고 그래. 사과 파는 놈이 만날 사과 좋다고 사가라고 얼마나 성화던지. 많이 먹고 더 건강해져야지.”
사과를 안 먹어도 예쁜 여인이지만 사과를 볼 때면 그녀가 떠올라 사과를 가득 품에 안았다. 여인을 안은 것처럼 가슴이 몽글몽글 해졌다. 옥석은 비싸서 사본 적도 먹어본 적 없는 과일을 척척 사서 부지런히 날랐다. ‘마음을 주는 것 그래, 이게 사랑이지.’
옥석은 남모르게 시작한 사랑 덕분에 행복에 겨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같이 둘째 관수부인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걸어 여인의 집에 왔다. 옥석은 관수 부인 앞에서 사과 장수 욕을 그리 해 대며, 여인의 집으로 사과 봉지를 날랐고, 관수 부인에게 사과 한쪽 남겨주지 않았다.
“혜령이가 많이 자랐구나.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아이야.”
바닥에 앉아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혜령을 바라보며 옥석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여인을 닮기도, 인화를 닮기도 했다. 혜령이 마당에서 쭈구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고 있다.
“아버님, 진지 드셔요.”
“여기 와서 같이 먹자구나. 산돌이는 오늘도 늦고?”
마주 앉아 먹는 밥에 옥석의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뭐 필요한 건 없고? 시골 사는 게 힘들지? 부모님이 멀리 계셔서 외롭겠구나.”
“아버님이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복이 많은 가 봐요.”
내일 또 오마. 라는 말을 뒤로 하고 무겁고 아쉬운 걸음으로 옥석이 마당을 나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흥에 겨워 시장에서 막걸리 한잔을 걸친다. 날도 좋고, 기분도 좋고, 이게 사는 거지. 옥석은 한참 막걸리를 들이킨다. 지나가는 어떤 여인도 옥석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골 아낙이래야 못생긴 년들뿐이라..’
옥석의 기분만큼 막걸리 병이 주변에 뒹굴고 있다. 자리를 나서기 위해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 옥석의 다리가 꼬여 바닥에 다시 앉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옥석의 흥얼거림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마당을 쓸고 있던 둘째 관수 부인이 옥석의 휘청거리는 걸음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현이 에미야. 넌 뭐라고 그렇게 생겼냐. 생긴 게 그러면 밥이라도 잘 해야지. 못난 것이 잘하는 것 하나 없이. 에잉.. 쯧쯧.”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옥석의 말에 관수 부인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진다. 흘겨보는 둘째 관수 부인의 눈빛이 사납다. 옥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방으로 들어선다. 대자로 누워 여인을 떠올리자 마음에 배꽃이 가득 피어난다.
오늘도 일어나자마다 옥석은 흰 모자, 흰 정장, 흰 구두, 3박자를 갖춘 후 대문을 나섰다. 사과 봉지를 가득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여분을 걸어 도착한 여인의 집 대문에서 옥석이 여인을 부른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자, 옥석의 마음이 조여온다.
"나 왔다. 아가야."
"..아버님, 오셨어요. 막 식사 준비 했는데.. 드시고 가셔요.”
한쪽 얼굴을 손으로 가린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어디 다친 게냐. 산돌이 놈이 때린 게냐. 어디 봐봐."
"아니요. 아버님. 넘어진 거예요. 집 근처 풀 뽑다가 그만 정신이 팔려 이렇게 됐지 뭐예요."
"정말이냐. 산돌이 놈이 그랬으면 이놈을 내가 가만 두지 않을 라니까. 말해봐. 그 놈이 자기 부인 귀한지 모르고. 산돌이 그놈이 맞지."
“아니에요. 아버님. 오늘도 혹시 오시면 아버님 드리려고 생선 구웠어요. 드시고 가셔요. 생선이 참 신선하고 맛있대요.”
생선을 내오는 고운 손과 여인의 울긋불긋한 얼굴이 옥석의 마음을 붉게 한다. 옥석은 한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에 물기가 촉촉해진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결국 장으로 돌아선다. 장에 들러 막걸리 한잔만 하려다, 술이 가득 부어졌다. 옥석의 붉어진 얼굴과 몸이 하얀 양복과 대조를 이룬다.
‘이놈의 새끼. 때릴 데가 어딨다고. 그렇게 아까운 사람을.. 내 이놈을 내가 그냥.’
옥석의 마음이 울그락 붉으락 들썩이고 끓기 시작한다. 여인을 만난 후 무슨 감정인지도 모를 감정이 옥석을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옥석의 마음이 끓는 만큼 얼굴과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집에 들어가는 길 걸음도, 혀도, 마음도 꼬인다.
“현이 어멈은 혼자 밥만 잘 먹고, 만날 놀고 있지. 니가 밥이라도 잘 해야지. 에잇. 호랭이가 물어갈 년. 쯧쯧.”
부엌에서 불을 지피던 관수 부인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 지어진다. 매일 같이 여인과 비교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둘째 관수 부인 마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리고 여인을 향한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날이 갈수록 켜켜이 쌓여갔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마당을 나서려는 옥석을 보고 둘째 관수 부인이 말을 건다.
“아버님, 큰 형님 도시 나가 산다고 짐 싸던데 알고 계셔요?”
“그건 또 뭔소리냐.”
“큰 아주머님이 큰 형님이랑 살 집을 알아보셨다고 하더라구요. 지난 밤에 아범이 말해줬어요.”
혜령이가 두 살과 세살 사이 여인은 시골 살이를 접고 도시로 나간다고 했다. 옥석은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여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온 몸이 땀에 절어 대문 앞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내쉬고 여인을 불렀다. 여인은 잠깐 외출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옥석은 대문 앞에 서서 여인을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도시라고 해봐야.1시간이면 후딱이니까.’
옥석은 오히려 도시가 여인에게 더 잘 어울릴지 모른다고 마음을 쓰다듬었다. 여인이 떠나고 얼마 후 둘째 관수부인도 도시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조용한 집이 오늘따라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애꿎은 사과만 바닥에 굴리며 옥석이 달력을 바라봤다. 어렸던 인경과 춘풍도 어느 정도 자라자 옥석의 곁을 떠났고, 옥석은 혼자가 됐다.
옥석은 외로움을 사랑보다 먼저 배웠다. 그래서 옥석은 외로움을 느낄 때면 친구삼아 막걸리 한잔을 걸치곤 했다. 언젠가부터 시장에서 마시는 술도 외로움을 가시게 하지 못했다. 혼자가 되자 옥석은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산 인삼으로 술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손수 만든 인삼주를 약처럼 마셨다. 씁쓸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옥석의 외로움도 같이 쓸려 내려갔다.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살다 가는 게지. 내일은 혜령 어멈한테 갔다 와야지.’
옥석이 달력을 한참 바라본다.
도시로 떠나 자리를 잡은 여인의 집은 아름다운 정취가 있었다. 원래 집이란 이런 느낌인가 싶은 그런 향수가 곳곳에서 피어나왔다. 옥석에게 여인의 집은 고향에 온 듯한 그리움과 푸근함을 안겨줬다.
"잘 지내고 있었던 게지."
"아버님 잘 지내셨죠?"
혜령이가 걷고 뛰면서 주변을 지나다닌다. 아이들은 볼 때마다 자란다더니.. 혜령에게서 여인과 인화가 더 많이 피어올랐다.
"혜령이가 많이 자랐구나. 너도 좀 닮고 죽은 할미도 좀 닮은 같고. 널 닮아 더 이뻐질 게다. 여기 사과 받으렴."
고르고 골라 담아 깨진 데 하나 없이 붉고 예쁜 사과를 건넨다. 사과 장수와 입씨름하며 여러 번 바꾼 사과였다. 옥석은 마음을 건넨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이 귀한 걸. 요즘 사과들이 잘 안 됐다면서요. 비싸다던데. 고맙습니다. "
"사과 이게 뭐라고. 너만 건강하면 된다. 사과를 매일 아침에 먹으면 그리 좋다더라."
여인을 만난 후 옥석은 그동안 해 오던 새벽 4시의 기도에 여인을 위한 기도를 추가했다. 품에 안을 수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여인은 옥석에게 여신이었고, 구원이었고, 행복이었다.
한참 인삼주를 들이키던 한 낮의 해가 하얗게 하늘에 걸린 날, 범수로부터 옥석에게 여인의 소식이 전해진다. 여인이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위급하다는 소식. 소식을 전하러 온 셋째 범수는 여인이 매우 위독하다고 전했다.
‘나의 그녀가 왜.’
얼굴이 달아올라 가만 앉아있을 수 없던 옥석은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팽개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정신이 없어 3박자를 모두 갖추지 못하고, 마당을 나섰다.
조금만, 조금만, 지금 내가 가고 있응게. 조금만 더 기다려주련.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