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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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가족 안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상처와 갈등을 그렸다. 그 과정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가족이야기다. 상처 없는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다. 90% 이상의 가정에서 드러내지 않는 상처와 고통의 과정이 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상처와 아픔을 가진 성인아이로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상처와 고통을 물려준다. 자유 소설은 한 아이가 태어나 구성원 안에서 희생자가 되어 자라는 과정과 치유여정을 담았다. 자신의 내면을 깊숙한 곳에 묻고 모습만 성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혜령이 다가온다. 자유는 모습만 어른이 된 혜령과 함께 치유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회복과 치유를 담은 성장 소설이다. 자, 이제 혜령과 함께 자유를 향해 떠나보자. 진정한 자유가 당신과 혜령에게 찾아올 것이다.
자유
자유
23. 다시 시작
23. 다시 시작
어둡게 닫혀있던 커튼을 걷은 혜령이 상쾌한 숨을 내뱉으며 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벌써 해가 걸려있다. 우우웅 우우웅 진동소리. 핸드폰이 울린다. 혜숙이모다..
“령아, 이모야. 시간되니? 이모가 너 만나고 싶은데. 맛있는 거 먹고, 차 마시러 가자. 내가 데릴러 갈게. 준비하고 있어.”
동그라미 네 개가 겹쳐진 마크를 단 늘씬한 자동차가 혜령의 원룸 앞에 선다. 골목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느낌에 혜령의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혜령아 타. 이모가 좋은 데 봐 놨는데. 거기 가서 차 마시자. 분위기도 좋고 맛있는 디저트도 많대.”
혜숙이모는 자주 들러 혜령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좋은 곳이 생겼다며 혜령을 데려갔다. 한적한 시골 거리에 옛 느낌의 건물이 있고, 주변의 나무들이 전통 집을 감싸 안는 형태로 늘어서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에 혜령이 차장을 내리고 창문에 팔을 얹어 얼굴을 내민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이 간질간질 따뜻하다.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상큼하게 인사한다.
“좋네요. 이모는 이런데 어떻게 아는 거예요?”
“맛 집이랑 여행 좋아하는 친구들이 알려줬어. 가보라고. 너랑 오니까 더 좋다야.”
이모와 찻집 안으로 들어간 혜령이 벽이 있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혜령이 앉자 의자의 솜이 푸욱하고 들어간다. 혜령이 앞에 놓인 메뉴판으로 손을 뻗는다.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여기 디저트들 전부 맛있대. 직접 만든다는데 이 만큼 맛있고 깨끗한 집 찾기 어렵다나 뭐라나.”
“이모, 저는 아무 거나 괜찮아요.”
혜령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른다. 가슴이 항상 답답했던 혜령은 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셨다. 마시는 동안 느끼는 시원함이 심장의 뜨거움을 식혀주는 느낌에 아이스 음료를 선호했다.
“여기 오곡 쿠키세트랑 치즈 케익, 생크림 케익, 아이스 아메리카노, 국화차 한잔 주세요. 혜령아, 먹고 더 시켜.”
고개를 옆으로 돌린 혜령의 눈으로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 낮은 소나무들이 들어온다. 하얀 솜뭉치 같은 강아지가 나비를 잡으려고 연신 뛰어다닌다.
“혜령아, 요즘 뭐하고 지내? 이모는 항상 네가 궁금해. 더 빨리 만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참 아쉬워.”
혜숙이모는 늦둥이로 태어난 덕분에 혜령과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계획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나온 혜숙 이모의 사연과 혜령의 사연이 닮아있었다.
“너랑 나랑 9살 정도 차이나나?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지. 너 3살 땐가. 몇 번 언니 집에서 봤는데. 그때 기어 다니던 애가 이렇게 컸네. 이모가 너 많이 찾았어. 너 어릴 때 이름이 혜련이었는데 혜련이라는 이름 만으로 찾으니까 안 찾아지더라. 외삼촌들이랑 나랑 얼마나 너 찾았는지 몰라. 어릴 때 너 이모랑 참 많이 닮았다고 그랬었는데. 그때가 엊그제 같네. 이름이 혜련에서 혜령으로 언제 바뀐 거야?”
혜숙 이모의 말을 한참 듣던 혜령이 얼음 한 조각을 입 안에 넣고 굴린다.
“이제 1년 정도 지났지.. 요즘은 무슨 공부하고 있어? 이제 뭘 할 건지 정했고?”
“잘 모르겠어요. 학부도, 대학원도 법학으로 나왔으니까. 전공 살려서 취직을 할까도 생각하고 있고, 법무사 공부를 시작할까도 고민하고 있어요.”
“그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야? 이모는 이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요. 인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법무사 공부 끝나면 심리학 대학원에 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상처에 대해서도 공부해보고, 다른 사람 상처도 돌보는 일을 해 보고 싶고..”
“그럼,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대학원 가는 거네?”
“그렇죠. 일단은 돈은 벌어야 하니까, 안정적인 수입원을 줄 직업을 갖고 싶어요.”
혜숙 이모가 국화꽃잎이 담긴 유리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혜령아, 이모가 너보다 조금 더 살아봤잖아. 인생이 그리 길지 않더라. 이모는 공부를 너처럼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길이 하나만 있는 거 같진 않고.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대학원을 가서 법무사 공부를 하는 건 좀 어렵나?”
“대학원에 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생활비도 그렇고, 등록금도 그렇고. 언제까지 공부만 할 수 없으니까요.”
“음. 그러면 이모가 대학원 다니게 도와 줄 테니까. 대학원 일단 가서 법무사 공부도 해. 대신 열심히 하는 거다. 이거 공짜 아니야. 나중에 자리 잡으면 이모한테 다 갚아야하는 거야.”
혜숙 이모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린다. 혜령은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진다.
“아니.. 아니요. 이모.. 괜찮아요. 미안하기도 하고..”
“혜령아, 진작 만났으면 대학도, 대학원도 이모가 다 해 줬을 거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마. 엄마 대신이라고 생각해. 그동안 이모가 너 찾는 동안 혼자 고생 많았잖아. 그러니까 이제 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공부를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다른 것도 좋고.”
“.. 이모.. 고마워요. 제가요. 지금까지 살면서 힘든 게 참 많았는데..”
혜령의 눈가가 물기로 가득해진다.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벌컥 들이킨 후 혜령이 말을 잇는다.
“대학 휴학하고.. 1년 간 공무원 시험도 봤어요. 그러다 공무원 시험이 저랑 안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로 돌아갔어요. 학교에서 일하면서 사법 시험이라는 걸 알게 되고, 관심이 생겼어요. 사법시험 보려면 영어성적이랑 채워야하는 교과목이 있어서 그걸 채우면서 하다가.. 로스쿨이라는 제도가 들어와서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죠.. 저를 지지해 주시던 교수님도 로스쿨로 오라고 하셨고요.. 근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거예요. 물론.. 일도 많았고요..”
혜령이 잠깐 뜸을 들인다.
“남들은 서울에서 일 년에 몇 천씩 써가면서 입학시험 준비한다는데.. 저는 안 되니까 그냥 책 보면서 공부했어요.. 들어가려고 하니까.. 학부 성적이랑 리트 시험 점수, 봉사활동 경력, 대외활동 경력, 논술시험, 면접까지.. 너무 준비해야할 게 많았어요. 3번 시험 보고 나서 겨우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그때가 스물여덟이던가.. 남들도 보통 두 번 세 번이 기본이고, 다섯 번 입학시험을 본다고 하니까. 그래도 다행인거죠. 근데 들어가고 나니까 대학원 졸업까지 3년, 그리고 남은 시험 4번 보고 나니까 삼십대 중반이 된 거 있죠.. 정말 허망했어요.. 마지막 시험 떨어지고 나니까.. 당황했던 게.. 정말 할 게 없는 거예요. 취업 프로그램도 듣고, 취업 면접도 보러가고.. 자격증 시험도 보고.. 근데.. 제 자리는 없더라구요.. 국가에서 만든 오탈 제도가 있어서 더 이상 시험도 못 보게 되고.. 세월을 뚝하고 떼서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생각하면서 계속 허송세월만 보냈죠.. 뭘 할까. 인생이 뭘까 하구요.”
“그래.. 그래.. 네가 공부 말고도.. 할 것도 많고, 신경써야할 것도 많았잖아. 원래 시간이 정말 짧아. 나도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더라.. 근데 너는 오죽했겠니. 으유. 내가 정말.. 이모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이모... 제가 집에 있으면서 가만히 지난날들을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서야 알았어요. 제가 사람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 너무 몰라서 이렇게 됐다는 걸요..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꿰진 게 지금의 내가 될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심리학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어요. 법무사 시험 합격하고 나서 자리 좀 잡으면 대학원에 가려고 했죠..”
“그래. 심리학 대학원 나오면 뭘 하는 거지? 정신과의사 같은 건가? 차라리 의대를 준비해서 가는 건 어때?”
“지금 나이에 의대를 가는 게.. 너무 힘들 거 같아서요.. 제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사람 마음에 대해서만 공부하고 싶은데, 의대에 진학하면 다방면으로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게 힘들 거 같아요.”
“공부가 좀 힘들지. 원래 가만히 앉아서 책만 보는 게 가장 어려운 거야. 이모 봐라. 맨날 이렇게 싸돌아다니잖아. 그러다 사업도 여러 개 하게 됐고. 인생에는 기회라는 게 오는데 그걸 잘 잡아야해. 그러니까. 너도 지금 이모 잘 잡아. 그리고 미안해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도 돼.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해.”
혜령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어깨가 들썩인다. 입안에 굴리던 얼음들이 어느새 녹아 따뜻하게 혀를 감싼다.
그날 이후 혜령이 대학원 진학 방법을 알아봤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방송통신대학으로 학사 과정을 마쳤다. 학사 과정을 마치자 본격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위해 준비를 했다. 혜령은 같은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을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같이 준비를 했다. 입학 원서를 넣는 날이 되자 혜령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면접 날, 혜령이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 정장을 입고 복도를 걷고 있다.
‘늦었어. 늦었어. 아이 진짜. ’
뛰는 혜령과 누군가 부딪힌다.
“앗.”
“어엇.”
남색 정장의 멀끔한 남자가 엉거주춤 서 있고, 혜령의 면접 답변을 적은 종이들과 가방 안의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남자와 혜령이 물건들을 함께 줍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하게 가는 바람에.”
“아니에요. 좋은 일 있으신가 보네요.”
남자의 미소에 혜령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면접 보러가요.”
“이 대학에 들어오시나 보네요.”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집어 올려 혜령의 가방에 넣어주는 남자의 손과 혜령의 손이 마주친다.
“들어오려고 하는 거지, 들어오게 될지는 몰라요. 면접 보러 가세요?”
“아니요, 저는 그냥 지나는 길입니다.”
가방 안에 물건을 쓸어 담고, 종이들을 대충 모아 양 옆으로 낀 혜령이 다시 복도를 뛴다.
“감사합니다.”
뛰어가며 고개를 살짝 돌려 인사를 잊지 않는 혜령을 남자가 한참 바라보고 서 있다. 몇 달 후, 합격 발표가 났다. 합격 발표 후 혜령은 바로 혜숙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 됐어요. 됐어요. 이모 덕분이에요.”
“혜령아, 진짜 잘했어. 수고했어. 이제 다시 시작이네. 넌 정말 잘 할 수 있어. 이거 이거 한국에 대단한 심리학자 하나 나오겠네. 하하.”
“이모, 저 심리 공부도, 법무사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괜찮아. 더 좋은 기회가, 더 좋은 길들이 가득 열릴 거야. 그러니까 천천히 아프지 말고 걸어가자. 이모가 같이 가줄게.”
“고마워요. 이모. 오늘 우리 만나요. 지금 가고 있어요.”
몇 달 후, 대학원에 입학한 혜령이 교실 안으로 들어선다. 혜령이 중간 자리 가운데 앉아 책상 위에 책과 노트를 올려놓고, 한쪽 팔에 얼굴을 괴고 교수님을 기다린다. 교실 안을 혜령보다 어리거나, 비슷하거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다양한 나이 대 친구들이 교실을 채워준 덕분에 혜령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교실 앞 교탁으로 마른 체형의 남색 정장 남자가 들어선다.
‘어? 어? 그 남자다.’
혜령의 가슴이 붉게 뛴다.
“안녕하세요. 정신 분석학 수업을 맡은 정연후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00의과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했고요. 덕분에 정신의학을 가르치면서 이 대학에 겸임 교수로 정신 분석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여러분과 오늘부터 육개월 동안 마음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공부를 하게 될 거예요.”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 혜령을 본 듯 남자의 인상이 한층 밝아진다. 혜령의 눈이 동그래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학교에 다니며 혜령은 매일 행복한 감정을 느꼈다. 평안하고, 평온한 하루들이 채워졌다. 학교 건물을 나와 혜령이 막 날리기 시작한 벚꽃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곁으로 누군가 다가온다.
“혜령씨, 뭘 보고 있어요? 하늘엔 아무 것도 없구만.”
연후씨다. 혜령이 얼굴을 붉히며 연후를 바라본다.
“꽃이 너무 예쁘죠. 항상 이 맘 때 꽃이 날렸던 것 같은데. 이렇게 꽃을 맞으면서 서 있긴 또 처음인 것 같아요. 너무 예뻐요.”
“꽃이 예쁘긴 하네요. 혜령씨처럼요. 흠흠. 점심시간 와 가는데 같이 나가시죠. 거기서 맛있는 거 먹어요. 좋은 밥집 알아놨어요.”
“싸고 맛있는 거면 저도 좋아요. 제가 살게요. 교수님.”
“이제 혜령씨 학교 들어온 지 일 년 넘었죠? 아직도 교수님이라니요. 연후씨라고 불러요. 수업도 이제 다 끝났고, 이제 저 혜령씨 교수님 아닙니다. 제 과목은 이제 수강신청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들이 불공정하다고 나중에 말 나올 수 있잖아요. 하하.”
“그러기엔 점수를 너무 낮게 주셨던데요.”
“B제로면 많이 드린 겁니다.”
“짜요. 짜. 아무튼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싸고 맛있는 집으로 부탁해요.”
연후와 혜령이 꽃이 날리는 거리를 걷는다. 분홍 꽃들이 혜령의 볼에 얹어진 듯 분홍빛이 가득하다. 꽃이 흩날리고, 꽃이 가득 깔린 길을 연후와 혜령이 한참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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