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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22 - 25. / <연재소설> / <최종수정>
자유 - 22. 감옥, 해방
22. 감옥, 해방
혜령은 매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두려움과 걱정이 불면의 밤을 만들었고, 오랫동안 지속된 밤들이 혜령을 심연으로 데려갔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러워요. 저를 데려가주세요. 주님.. 너무 힘들어요. 앞이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울고 또 우는 날이 계속 됐고, 덕분에 눈가가 퉁퉁 붓고,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어김없이 아침 해가 떠올랐고, 혜령이 정독실로 출발한다.
‘괜찮아. 해보자. 괜찮아.. 하나님, 오늘 힘내서 해 볼게요.’
저녁, 집에 돌아와 벽에 등을 대고 누운 혜령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혜령은 무에 그리 서러운지 우는 이유도 모르고 운다.
‘왜 눈물이 이렇게 나는 거야.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너무 답답해요. 갑갑해요.. 흐어억..’
혜령의 눈물과 탄식이 뒤 섞인 밤이 깊어갔고, 어김없이 아침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밤이 되면 혜령은 또 울었다.
‘하나님 오늘은 저를 좀 찾아와 주세요. 저를 안아 주세요..’
울다 지쳐 잠든 새벽 갑자기 혜령의 등이 따뜻해져온다. 하얗고 노란 느낌의 빛이 혜령의 등을 감싸 안는다. 덕분에 혜령은 아주 깊은 잠을 잤다.
“개운하다!!!으아!”
힘찬 목소리로 개운함을 외친 혜령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님, 저 알았어요. 제 문제를 알았어요.. 제 우상이 변호사였군요. 변호사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했어요. 변호사만 되면 행복해지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우상화하고 있었어요. 변호사가 된대도 어제 같이 매일 운다면 직업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돈이 무슨 소용이에요.. 그날이 마지막이겠죠.. 고맙습니다. 하나님.. 변호사 안 주셔도 괜찮아요. 하나님이 계시니까.. 당신의 옳으심을 믿어요. 그러니까 오늘도 달립니다.’
혜령은 등이 따뜻하게 감싸 안아진 그날부터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리고 힘차게 일어나 정독실로 향했고, 마지막을 위한 공부에 매진했다.
정독실 안,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정독실원 한명이 오늘도 급하게 와서 잡음을 만들어낸다.
뒤적 뒤적. 부스럭. 쓰으윽. 퉁퉁. 툭툭.
그 실원은 당연한 듯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소음을 권리인 것처럼 만들어내고 정독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저 사람은 왜 올 때마다 저렇게 하는 거지? 모르는 건가?’
혜령이 그 실원을 따라나선다.
“저기요.. 제가 정독실장인데요..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왜요?”
“잠깐이면 되요.”
휴게실 안, 가방을 든 실원과 혜령이 마주 서 있다.
“오실 때마다 옷도 안에서 벗으시고, 가방도 안에서 여시면서 책도 마구 놓으시고.. 책도 던지시고.. 조금 소음이 있어요.. 문도 너무 세게 열고 닫으셔서.. 조금만 줄여주실 수 있나요?”
“그쪽은.. 그쪽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르나보죠? 소문도 안 좋던데. 사람들이 그쪽 다들 피해요.”
“네? 제가.. 시끄러웠군요. 죄송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람들이 다들 그쪽 피해요.”
“왜요? ”
“그걸 모르니까 그쪽이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알려주세요. 저는 몰랐어요.”
남자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쓰레기 보듯 혜령을 내려다본다. 가방을 오른쪽어깨로 올려 멘 남자의 입 꼬리 한쪽이 위로 끌어올려진다.
“소문 들어보니까.. 그 쪽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왜 너 같은 거랑 대화하면서 시간을 낭비 해?”
남자의 더부룩하다는 손동작과 표정에 혜령의 마음이 따끔해진다.
“네? 아..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화장실로 간 혜령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울린다. 다시 휴게실로 돌아간 혜령이 힘을 내서 남자에게 묻는다.
“알려주세요. 제가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하니까요.”
“흠.. 흠... 그쪽 사람만 만나면 전도해댄다면서요. 사람들이 싫어해.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 이야기 하고 전도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 안 해야지. 지금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시간 아깝고.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해? 아이 씨발.”
징그러운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남자의 표정에 혜령의 눈에 물이 가득 고인다.
“그렇군요.. 정독실 안에서 시끄럽다고 하신 거.. 고쳐볼게요. 말씀 고마워요..”
남자의 표정에서 승리감이 묻어난다. 혜령은 화장실에 가서 한참 운다. 어제까지 혜령은 하나님을 믿었다가 상처 받아 떠난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사이비 종교에서 작업이 진행 중인 사람을 만나면 득달같이 달려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달려왔던 혜령에게 오늘의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님 보셨죠? 하나님을 전하는 게 소명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세요. 하나님이 해결해주세요.’
남자의 이야기에 눈물을 쏟아내던 혜령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 눈물을 닦는다.
‘어제까지 밤들이 아니었으면, 오늘 망가졌을 거야. 이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인생 뭐 있어. 상관없어. 사람들이 뭐라 건.’
혜령은 남자의 말에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이유도 모르면서 울었던 밤들보다 오히려 가벼웠다. 숱한 눈물의 밤들이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 라는 생각에 오히려 불면의 밤들이 고마워졌다.
‘칫, 사람 무시하고 그래. 좋게 말해주면 덧나나. 그리고 누가 지랑 친해지고 싶댔어? 아주, 국을 사발로 들이 키고 있네. 혼자 잘났어. 정말.’
혜령이 겪었던 불면의 밤들이 오히려 혜령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모의고사들이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6월에 1차 모의고사가 진행됐고, 8월에 2차 모의고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10월 3차 모의고사가 진행됐다. 덕분에 혜령은 정신없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제 정리하자. 보러만 가면 돼. 괜찮아. 변호사 그거 어차피 다 하나님 뜻이고 다 알아서 먹여 살리시겠지. 지난 밤들처럼 매일 울면 그날이 내 마지막 날인데 뭐. 가자. 괜찮아. 괜찮아.’
1월,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산돌이 갑자기 혜령에게 전화를 건다. 과거 산돌은 폭행사건으로 시비가 붙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고, 그 때문에 혜령과 연락이 끊겼었다.
과거 산돌이 교도소에 들어가자 성철엄마와 범수가 혜령에게 산돌에게 가볼 것을 요청하며 수차례 연락을 해 왔다. 혜령은 공부를 핑계로 가지 않았고, 그 이후 산돌과 연락을 끊었다. 그 후, 혜령은 잠이 들면 산돌이 칼을 들고 찾아와 찌르려는 꿈을 꿨다.
그리고 얼마 전 산돌이 출소 소식을 셋째 범수가 전해왔다. 늦은 밤 혜령의 핸드폰이 울린다. 산돌이다. 갑자기 걸려온 산돌의 전화에 혜령이 한참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응, 그래. 아빠다. 아빤데. 잘 지냈냐? 아빠가 너 사랑한다. 범수한테 들었는데 너 마지막 시험이라며.”
술기운이 가득 묻은 산돌의 목소리에 혜령의 목소리가 떨린다.공부를 핑계로 혜령은 산돌의 숱한 요청에도 교도소에 방문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린다. 불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떨린다.
“네.. 아빠 저도.. 아빠 사랑해요.”
“시험 잘 보고.. 날을 세서 공부해. 그러면 잘 볼 수 있어. 나도 매일 날 세서 공부하고 그래. 죽을 만큼 해야지.”
“아빠, 저는 날 못 세요. 몸이 안 좋아서요.”
“내일도 전화하마.”
“제가 시험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아니 날마다 전화해.”
산돌은 매일 밤, 술을 거나하게 먹고 어김없이 전화를 했다. 혜령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올지도 모를 산돌이 무서웠다. 산돌은 혜령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혜령의 집 근처로 찾아와 고성을 지르고 이름을 불렀다. 혜령이 사는 원룸은 주변 집들 시세에서 십여 만원은 저렴한 집이라 혜령은 이사를 가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산돌의 술주정이 심할 때면 공부를 핑계로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친구 집에 가서 몇 달 동안 살았다.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혜령은 산돌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 시험을 이틀 앞두고 이사를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럼에도 이사를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는 게 웃음이 났다.
산돌은 구속 재판을 받으면서, 먹지 못했던 술을 집에 돌아오자마자 들이키기 시작했다. 고성을 지르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산돌의 행동이 계속됐다.
‘그동안 챙겨드리지 못했으니까.. 전화를 받아서 안심시켜드리자..’
일주일 동안 시험이 진행됐고, 산돌은 매일 전화를 걸어 시험을 묻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너 교회 다니지? 아직도 다니냐? 내가 니 엄마 교회 못가게 할 라고 그리 때렸는데. 다니더만. 결국 너도. 으크. 그 도사 놈 있잖냐. 니 엄마 죽을 거라고 했던 그 놈. 내 친구였거든. 교회 목사 아들 놈인데. 그 놈이 어느 날 갑자기 신을 받더만 돈 방석에 앉았어. 집도 으리으리해지고, 대궐 같은 집 사서... 그 집 앞으로 어찌나 줄이 길게 서던지. 만나기도 어려운 놈이 됐어. 그러더만 여자 생기면 지한테 데리고 오라더라. 친구니까 지가 봐 준다고. 그래서 내가 니 엄마랑 결혼 할라고 데리고 갔지. 그때 그 놈이 그러더만. 우리 둘이 만나면 애가 태어나는데 천명을 타고난 애가 나올 거라고. 그래서 누군가 죽어야한다고.”
“... 아.. 네.. 들었어요. 아빠가 자주 이야기 해 줬잖아요.”
“야, 내가 말을 하면 끊지 말고 들어. 싸가지 없이. 그러니까. 그때 그 놈이 그랬단 말이지. 나랑 니 엄마가 결혼하면 애가 태어날 건데. 그 놈이 천명을 타고난 애일 거라. 계모 밥 먹을 팔자 타고 날 거라고.. 그래. 3년 안에 니 엄마가 대신 죽을 거라고 하더라. 그 말 듣고 니 엄마가 죽을 날 받아 논 사람처럼 살았는가벼. 혼인신고 하라고 신고서 줬는데, 나중에 니 엄마 그러고 나서 농 열어보니까 그대로 있더만. 니가 엄마 죽게 한 거야. 알고 있지? 니 엄마 딱 3년 살았다. 듣고 있냐? ”
“네..”
“그때 액땜한다고 니 이름 받아놨는데, 이름 올릴라고 면사무소 갔지. 내가. 근데. 하필 령 자가 중국 한자라서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 온다고 하고 놔뒀는데. 범수 그 놈이 지 맘대로 한자만 바꿔서 올린 거지. 이름을 그때 그 한자로만 했어도.. 니 엄마... 흑.. 흑.. 니가.. 니가.. 그런거야. 듣고 있냐? 어? 듣고 있냐고? 대답을 해야지.”
“....네. ”
혜령은 다음 날 시험을 위해 급한 눈으로 책을 훑어본다.
“너, 변호사 되면 내가 예수든 뭐든 다 믿으마. 그러니까. 열심히 해.”
“아빠 정말요? 예수님 믿으실 거예요?”
“그래, 니가 변호사만 되면 예수든, 부처든 뭐든 내가 믿어주마. 그니까 죽을 뚱 말뚱 해서 합격 해. 나 끊는다. 내일 시험 잘 보고. 날 세서해. 내일 또 전화 하마. 연락해서 잘 봤는지 말해주고.”
“.. 네.. ”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에 혜령의 가슴이 갑자기 희망으로 차오른다. 혜령은 바쁜 눈으로 마저 책들을 눈에 담는다.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나온 혜령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 4월까지 발표만 기다리면 되겠다.’
1월의 마지막 자락에 경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외갓 댁 식구들 찾고 싶은데.. 엄마가 살았던 동네 나랑 같이 가자.」
「싫은데. 너나 찾던가. 지금 와서 왜. 반가워하지도 않을 거 같은데.」
몇 년 만에 연락을 해온 경희에게 혜령은 차갑게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일주일 후, 35년 만에 혜령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람에게서 문자가 온다.
「통화를 하고 싶은데.. 너무 떨리고 울다 말도 못할 것 같아서 톡으로.. 뭐라고 써야할지도.. 미안한 마음만 들고 이렇게 지금이라도 찾았다는 게 벅차고 떨리고 기쁜데.. 혜령이도 그래줄지도 무섭고.. 이모는 살면서 혜령이.. 생각 많이 하고 살았어.. 엄마랑은 나이 차이가 나서 큰 기억이 없지만 혜령이는 이모 어릴 때....... (중략) ...혜령아, 동생이 우릴 찾았거든. 정말 오랫동안 너희들 찾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네. 정말 보고 싶다. 엄마 그렇게 되고 우리도 힘들었거든...... (중략)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너 시간 될 때 우리 보자.」
갑작스러운 연락, 돌아가신 엄마의 친 동생이라는 사람의 메시지에 혜령은 전화를 건다.
뚜뚜..
“아, 안녕하세요. 이모시라고요. 제가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요.”
“경희가 너 로스쿨 다닌다고 해서 내가 거기 다니는 조카가 있거든.. 그래서 걔한테 물어봤어.. 너 마음이 될 때 보고 싶은데.. 잘 생각해 줘...”
시간을 건너 뛴 만큼 혜령과 이모의 통화가 길어졌다. 혜령의 이모는 혜숙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혜령도 자신의 이야기를 혜숙에게 한참 풀어냈다.
“우리 자주 만나자. 이모가 엄마 대신이니까. 엄마라고 생각해.”
4월 마지막 주, 혜령의 시험 발표가 났다.
‘하나님의 승인이 어떻게 됐는지 보자.’
「김혜령 님은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하셨습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혜령은 불을 끄고 벽을 보고 눕는다. 불을 끈 방에 혜령이 벽에 등을 대고 누워 자고 또 자고 밀린 잠을 자듯 혜령은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산돌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야 너 떨어졌다매. 나는 너 합격할지 알았다. 니가 멍청해서 떨어진거지.”
“아.. 네..”
힘겹게 대답을 내놓은 혜령이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혜령이 몸을 동그랗게 만다. 그리고 자고 또 자는 날을 보내며 일어나지 않았다. 거의 한 달을 혜령은 불을 끈 방에 누워있었다.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고, 아침 해를 볼 마음이 들지 않아 커튼을 걷지 않았다.
6월 9일, 전화벨이 울린다. 힘겹게 손을 뻗어 혜령이 전화를 집어 든다. 범수의 아들 한길의 전화다.
“누나,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OO 장례식장인데 누나 몇 시에 올 거야?”
“어? 뭐라고?”
“할아버지 새벽에 돌아가셨어. 나 장례식장 가고 있어. 누나도 빨리 와.”
“나 빨리 못가. 늦게 갈게. 근데 내가 가야해?”
“다들 온대, 누나 몇 시에 오냐고 다들 물어봐.”
혜령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돌아가셨구나. 근데 나한테 왜 오라고 하는 거야. 올 건지부터 물어봐야하는 거 아니야?’
혜령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혜령은 범수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저예요.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면서요.”
“그래, 새벽에 그렇게 됐다네.. 산돌 형한테는 이야기하지 말고. 알았지? 또 알게 되면 난리 나니까.”
“괜찮을까요? 아빠가 나중에 알면 화 많이 내실 건데요.”
“와서 술 처먹고 장례식장 뒤집고 던지고 할 건디. 장례식을 잘 치러야하니까. 예전에 친척 할머니 돌아가신 곳에 와서 술 몽땅 먹고 다 뒤집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때 경찰도 부르고. 이번엔 조용히 잘 치러야하니까. 말하지 말렴..꼭이다. 너 언제 올 거니?”
“저녁에 갈게요. 이번 주에 시험이 있어서 그것도 좀 봐야하고요.”
“그래 이따 보자. 아빠는 이미 와 있다.”
오후가 되어가자 한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누나 언제와. 엄마랑 전부 다 장례식장에 있대. 누나 언제 오냐고. 물어보네.”
“한길아, 지금 가고 있어.”
한길의 재촉에 혜령이 한숨을 내쉰다.
도착한 장례식장 1층에서 혜령은 전광판에 있는 옥석의 사진을 찍는다. 입관 6월 9일 13시, 발인 6월 10일 7시
‘드디어 가셨구나. 참.. 오래 사셨네..’
혜령은 옥석의 장례식 장 앞에서 그가 떠난 걸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전광판을 보고 또 본다. 그리고 한 계단 한 계단 무게를 주며 혜령이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혜령이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옥석의 핏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든다.
“이거 입어.”
넷째 인수의 부인이 혜령 앞으로 검은 옷을 내민다.
“작아서 안 입어요. 살이 좀 쪘거든요.”
“사이즈 많으니까, 맞는 걸로 입으면 되지. 넌 무슨 애가 장례식장 오면서 입술을 칠하고 와. 이걸로 좀 닦아.”
휴지를 가득 뜯어 넷째 인수의 부인이 혜령의 입술을 닦아댄다. 그리고 혜령에게 잡아낼 트집이 없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혜령이 자리에 앉자 인수 부인이 혜령의 정면에 앉는다.
“이걸로 마저 닦아. 장례식 장 오면서 화장 하고 오는 건 예의가 아니야.”
“작은엄마, 제가 사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거 아세요? 중학교 이후로 스물 세살까지 하나님 안 계시다고 한 거. 그거 작은엄마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서는 항상 착한 천사고, 나오면 맨날 나한테 짐승 자식이다. 니 같은 게..부터 못된 말만 하셨잖아요. 작은엄마들끼리 모여서 엄청 험한 말만하고. 정말 다 죽었으면 했어요. 그리고 제가 죽고 싶었고요. 자살하면 천국 못 간다는 거 알고 죽지도 못 했어요. 하나님 안 믿었으면 저는 나쁜 사람이 됐을 거예요.”
“내가 언제?”
혜령은 멀찌감치 서서 다가오지 않는 춘풍을 바라본다. 춘풍과 혜령의 눈이 마주친다.
“저기 삼촌한테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항상 현장에 계셨으니까.”
눈을 마주친 막내 춘풍이 고개를 돌리고 옆에 있는 사람과 무어라 대화를 나눈다.
“여기 제가 왜 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대체 왜 저한테 이런 강요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솔직히 정말 화나요.”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원래 맞은 놈만 아프죠. 오늘 너무 힘들어요. 언른 가고 싶어요. 오늘은 아빠 봐서 왔어요. 아빠는 할아버지를 정말 사랑하니까. 정말 아빠 봐서.. 할아버지 참은 거니까. 할아버지 사건 13세 미만 범죄라 공소시효 없는 거 아시죠? 정말 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다 죽어서 사라지면 좋겠어요.”
넷째 인수의 부인 연기엄마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음식을 뜨러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자리에 셋째 범수의 부인인 한길엄마와 한길이 다가와 앉는다.
“누나 오늘 여기 있을 거지? 여기 옷. 몇 시까지 있을 거야?”
“나 지금 갈 거야. 내일 해야 할 것도 있고.”
“.. 음.. 그럼 내일은 몇 시에 올 거야?”
“못 와. 내일 일 있어. 주말에 시험도 있어서 못 와. 사람도 많으니까. 내가 올 필요 없겠네.”
“그래도 와야 하는데. 가족이잖아.”
한길이 아쉬운 듯 말 꼬리를 흐린다.
“나 이제 간다. 너가 잘 보내드려.”
혜령의 말에 한길 엄마가 입을 연다.
“혜령이 너도 내일 와서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엄마, 제가 진짜 내일 해야 할 게 있어요. 엄마가 잘 보내드리세요.”
혜령이 한길 엄마에게 주려고 들고 온 선물을 가득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을 나서는 혜령을 보고 옥석의 유일한 딸 인경이 따라나선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옆으로 범수의 자녀들과 인수의 자녀들이 혜령을 둘러싼다.
“내일 올 거야? 너 오랜만에 봐서 좋은데.. 내일도 같이 보내드리고 그러면 좋잖아.”
“내일 못 와요. 저 없어도 가족 많잖아요. 제가 꼭 올 필요도 없고요. 할아버지 잘 보내드리세요. 다들. 그리고 고모도요..”
장례식장에서 나온 혜령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둡기도 디게 어둡네.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겨우 도착한 혜령이 피곤한 듯 침대에 몸을 뉘인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정말.’
다음 날, 옥석의 장례식은 아침 일찍 그를 땅에 묻고 나서 끝이 났다. 경희가 보내온 영상을 통해 혜령은 드디어 마음을 놓았다.
‘드디어 가셨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어.’
안도의 숨을 내쉰 혜령이 잠이 든다. 시골 흙집, 마당에 선 혜령을 대문을 나서는 옥석이 돌아본다. 하얀 옷을 입은 옥석이 혜령을 향해 환하게 웃는다.
“나 이제 간다.”
“가세요. 할아버지. 천국 가서 만나요.”
“그래.”
대문을 나서는 옥석이 하얀 빛과 함께 천천히 점멸해간다. 꿈에서 깬 혜령은 이제 옥석이 세상에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 잡는다.
‘그래, 이제 내 인생을 살아가자. 제대로. 나를 마주하면서. 나를 잃어버리지 말자.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살지 말고, 누군가에게 인생을 뺏기지 말자. 원한도 아픔도 내려놓고, 내 삶을 살자.’
혜령은 다짐한다. 하얗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며 돌아서던 옥석을 떠올리며 혜령은 드디어 그를 놓아준다. 그리고 혜령이 혜숙 이모에게 전화를 건다. 그동안의 일들을 전해들은 혜숙 이모가 혜령에게 말을 건넨다.
“령아, 그동안 네가 너무 고생 많았어. 이모가 없었던 시간동안 네가 너무 아팠겠다. 이모는 솔직히 그 사람들 너무 화가나. 이제부터 혜령아. 혜령이 너를 존중하는 사람, 그리고 너를 존중하는 장소에만 너를 둬야 해. 그게 너를 소중하게 대하는 방법이야.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너를 아프게 하면 그게 뭐든 허용해선 안 돼. 너만 희생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바뀔 기회를 뺏는 일이 될 수 있어. 너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독해져야해. 이제부터는 이모랑 같이 걷자. 알았지?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이제는 네 가족은 네가 허락한 사람만 가족이 되는 거야. 약속하자. 우리.”
“네, 이모.. 고마워요. 이모.”
“이제부터는 니가 선택하는 거야. 가족이든, 친구든. 네 삶은 네 꺼니까. 이제부턴 뺏기면 안 돼.”
혜령은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 흰 종이 위에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 만을 채우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책상에 앉은 혜령이 하얀 종이에 가족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시 시작. 다시 가보자. 혜령은 종이 맨 위에 이름을 적었다. 김혜령. 그래. 이젠 내가 내 유일한 가족이고, 시작인거야.
자유 - 23. 다시 시작
23. 다시 시작
어둡게 닫혀있던 커튼을 걷은 혜령이 상쾌한 숨을 내뱉으며 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벌써 해가 걸려있다. 우우웅 우우웅 진동소리. 핸드폰이 울린다. 혜숙이모다..
“령아, 이모야. 시간되니? 이모가 너 만나고 싶은데. 맛있는 거 먹고, 차 마시러 가자. 내가 데릴러 갈게. 준비하고 있어.”
동그라미 네 개가 겹쳐진 마크를 단 늘씬한 자동차가 혜령의 원룸 앞에 선다. 골목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느낌에 혜령의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혜령아 타. 이모가 좋은 데 봐 놨는데. 거기 가서 차 마시자. 분위기도 좋고 맛있는 디저트도 많대.”
혜숙이모는 자주 들러 혜령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좋은 곳이 생겼다며 혜령을 데려갔다. 한적한 시골 거리에 옛 느낌의 건물이 있고, 주변의 나무들이 전통 집을 감싸 안는 형태로 늘어서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에 혜령이 차장을 내리고 창문에 팔을 얹어 얼굴을 내민다.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이 간질간질 따뜻하다.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상큼하게 인사한다.
“좋네요. 이모는 이런데 어떻게 아는 거예요?”
“맛 집이랑 여행 좋아하는 친구들이 알려줬어. 가보라고. 너랑 오니까 더 좋다야.”
이모와 찻집 안으로 들어간 혜령이 벽이 있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혜령이 앉자 의자의 솜이 푸욱하고 들어간다. 혜령이 앞에 놓인 메뉴판으로 손을 뻗는다.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여기 디저트들 전부 맛있대. 직접 만든다는데 이 만큼 맛있고 깨끗한 집 찾기 어렵다나 뭐라나.”
“이모, 저는 아무 거나 괜찮아요.”
혜령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른다. 가슴이 항상 답답했던 혜령은 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셨다. 마시는 동안 느끼는 시원함이 심장의 뜨거움을 식혀주는 느낌에 아이스 음료를 선호했다.
“여기 오곡 쿠키세트랑 치즈 케익, 생크림 케익, 아이스 아메리카노, 국화차 한잔 주세요. 혜령아, 먹고 더 시켜.”
고개를 옆으로 돌린 혜령의 눈으로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 낮은 소나무들이 들어온다. 하얀 솜뭉치 같은 강아지가 나비를 잡으려고 연신 뛰어다닌다.
“혜령아, 요즘 뭐하고 지내? 이모는 항상 네가 궁금해. 더 빨리 만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참 아쉬워.”
혜숙이모는 늦둥이로 태어난 덕분에 혜령과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계획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나온 혜숙 이모의 사연과 혜령의 사연이 닮아있었다.
“너랑 나랑 9살 정도 차이나나?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지. 너 3살 땐가. 몇 번 언니 집에서 봤는데. 그때 기어 다니던 애가 이렇게 컸네. 이모가 너 많이 찾았어. 너 어릴 때 이름이 혜련이었는데 혜련이라는 이름 만으로 찾으니까 안 찾아지더라. 외삼촌들이랑 나랑 얼마나 너 찾았는지 몰라. 어릴 때 너 이모랑 참 많이 닮았다고 그랬었는데. 그때가 엊그제 같네. 이름이 혜련에서 혜령으로 언제 바뀐 거야?”
혜숙 이모의 말을 한참 듣던 혜령이 얼음 한 조각을 입 안에 넣고 굴린다.
“이제 1년 정도 지났지.. 요즘은 무슨 공부하고 있어? 이제 뭘 할 건지 정했고?”
“잘 모르겠어요. 학부도, 대학원도 법학으로 나왔으니까. 전공 살려서 취직을 할까도 생각하고 있고, 법무사 공부를 시작할까도 고민하고 있어요.”
“그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야? 이모는 이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요. 인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법무사 공부 끝나면 심리학 대학원에 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상처에 대해서도 공부해보고, 다른 사람 상처도 돌보는 일을 해 보고 싶고..”
“그럼,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대학원 가는 거네?”
“그렇죠. 일단은 돈은 벌어야 하니까, 안정적인 수입원을 줄 직업을 갖고 싶어요.”
혜숙 이모가 국화꽃잎이 담긴 유리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혜령아, 이모가 너보다 조금 더 살아봤잖아. 인생이 그리 길지 않더라. 이모는 공부를 너처럼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길이 하나만 있는 거 같진 않고.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대학원을 가서 법무사 공부를 하는 건 좀 어렵나?”
“대학원에 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생활비도 그렇고, 등록금도 그렇고. 언제까지 공부만 할 수 없으니까요.”
“음. 그러면 이모가 대학원 다니게 도와 줄 테니까. 대학원 일단 가서 법무사 공부도 해. 대신 열심히 하는 거다. 이거 공짜 아니야. 나중에 자리 잡으면 이모한테 다 갚아야하는 거야.”
혜숙 이모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린다. 혜령은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진다.
“아니.. 아니요. 이모.. 괜찮아요. 미안하기도 하고..”
“혜령아, 진작 만났으면 대학도, 대학원도 이모가 다 해 줬을 거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마. 엄마 대신이라고 생각해. 그동안 이모가 너 찾는 동안 혼자 고생 많았잖아. 그러니까 이제 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공부를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다른 것도 좋고.”
“.. 이모.. 고마워요. 제가요. 지금까지 살면서 힘든 게 참 많았는데..”
혜령의 눈가가 물기로 가득해진다.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 벌컥 들이킨 후 혜령이 말을 잇는다.
“대학 휴학하고.. 1년 간 공무원 시험도 봤어요. 그러다 공무원 시험이 저랑 안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로 돌아갔어요. 학교에서 일하면서 사법 시험이라는 걸 알게 되고, 관심이 생겼어요. 사법시험 보려면 영어성적이랑 채워야하는 교과목이 있어서 그걸 채우면서 하다가.. 로스쿨이라는 제도가 들어와서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죠.. 저를 지지해 주시던 교수님도 로스쿨로 오라고 하셨고요.. 근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거예요. 물론.. 일도 많았고요..”
혜령이 잠깐 뜸을 들인다.
“남들은 서울에서 일 년에 몇 천씩 써가면서 입학시험 준비한다는데.. 저는 안 되니까 그냥 책 보면서 공부했어요.. 들어가려고 하니까.. 학부 성적이랑 리트 시험 점수, 봉사활동 경력, 대외활동 경력, 논술시험, 면접까지.. 너무 준비해야할 게 많았어요. 3번 시험 보고 나서 겨우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그때가 스물여덟이던가.. 남들도 보통 두 번 세 번이 기본이고, 다섯 번 입학시험을 본다고 하니까. 그래도 다행인거죠. 근데 들어가고 나니까 대학원 졸업까지 3년, 그리고 남은 시험 4번 보고 나니까 삼십대 중반이 된 거 있죠.. 정말 허망했어요.. 마지막 시험 떨어지고 나니까.. 당황했던 게.. 정말 할 게 없는 거예요. 취업 프로그램도 듣고, 취업 면접도 보러가고.. 자격증 시험도 보고.. 근데.. 제 자리는 없더라구요.. 국가에서 만든 오탈 제도가 있어서 더 이상 시험도 못 보게 되고.. 세월을 뚝하고 떼서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생각하면서 계속 허송세월만 보냈죠.. 뭘 할까. 인생이 뭘까 하구요.”
“그래.. 그래.. 네가 공부 말고도.. 할 것도 많고, 신경써야할 것도 많았잖아. 원래 시간이 정말 짧아. 나도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더라.. 근데 너는 오죽했겠니. 으유. 내가 정말.. 이모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이모... 제가 집에 있으면서 가만히 지난날들을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서야 알았어요. 제가 사람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 너무 몰라서 이렇게 됐다는 걸요..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꿰진 게 지금의 내가 될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심리학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어요. 법무사 시험 합격하고 나서 자리 좀 잡으면 대학원에 가려고 했죠..”
“그래. 심리학 대학원 나오면 뭘 하는 거지? 정신과의사 같은 건가? 차라리 의대를 준비해서 가는 건 어때?”
“지금 나이에 의대를 가는 게.. 너무 힘들 거 같아서요.. 제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사람 마음에 대해서만 공부하고 싶은데, 의대에 진학하면 다방면으로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게 힘들 거 같아요.”
“공부가 좀 힘들지. 원래 가만히 앉아서 책만 보는 게 가장 어려운 거야. 이모 봐라. 맨날 이렇게 싸돌아다니잖아. 그러다 사업도 여러 개 하게 됐고. 인생에는 기회라는 게 오는데 그걸 잘 잡아야해. 그러니까. 너도 지금 이모 잘 잡아. 그리고 미안해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도 돼.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해.”
혜령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어깨가 들썩인다. 입안에 굴리던 얼음들이 어느새 녹아 따뜻하게 혀를 감싼다.
그날 이후 혜령이 대학원 진학 방법을 알아봤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방송통신대학으로 학사 과정을 마쳤다. 학사 과정을 마치자 본격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위해 준비를 했다. 혜령은 같은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을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같이 준비를 했다. 입학 원서를 넣는 날이 되자 혜령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면접 날, 혜령이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 정장을 입고 복도를 걷고 있다.
‘늦었어. 늦었어. 아이 진짜. ’
뛰는 혜령과 누군가 부딪힌다.
“앗.”
“어엇.”
남색 정장의 멀끔한 남자가 엉거주춤 서 있고, 혜령의 면접 답변을 적은 종이들과 가방 안의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남자와 혜령이 물건들을 함께 줍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하게 가는 바람에.”
“아니에요. 좋은 일 있으신가 보네요.”
남자의 미소에 혜령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면접 보러가요.”
“이 대학에 들어오시나 보네요.”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집어 올려 혜령의 가방에 넣어주는 남자의 손과 혜령의 손이 마주친다.
“들어오려고 하는 거지, 들어오게 될지는 몰라요. 면접 보러 가세요?”
“아니요, 저는 그냥 지나는 길입니다.”
가방 안에 물건을 쓸어 담고, 종이들을 대충 모아 양 옆으로 낀 혜령이 다시 복도를 뛴다.
“감사합니다.”
뛰어가며 고개를 살짝 돌려 인사를 잊지 않는 혜령을 남자가 한참 바라보고 서 있다. 몇 달 후, 합격 발표가 났다. 합격 발표 후 혜령은 바로 혜숙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 됐어요. 됐어요. 이모 덕분이에요.”
“혜령아, 진짜 잘했어. 수고했어. 이제 다시 시작이네. 넌 정말 잘 할 수 있어. 이거 이거 한국에 대단한 심리학자 하나 나오겠네. 하하.”
“이모, 저 심리 공부도, 법무사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괜찮아. 더 좋은 기회가, 더 좋은 길들이 가득 열릴 거야. 그러니까 천천히 아프지 말고 걸어가자. 이모가 같이 가줄게.”
“고마워요. 이모. 오늘 우리 만나요. 지금 가고 있어요.”
몇 달 후, 대학원에 입학한 혜령이 교실 안으로 들어선다. 혜령이 중간 자리 가운데 앉아 책상 위에 책과 노트를 올려놓고, 한쪽 팔에 얼굴을 괴고 교수님을 기다린다. 교실 안을 혜령보다 어리거나, 비슷하거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다양한 나이 대 친구들이 교실을 채워준 덕분에 혜령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교실 앞 교탁으로 마른 체형의 남색 정장 남자가 들어선다.
‘어? 어? 그 남자다.’
혜령의 가슴이 붉게 뛴다.
“안녕하세요. 정신 분석학 수업을 맡은 정연후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00의과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했고요. 덕분에 정신의학을 가르치면서 이 대학에 겸임 교수로 정신 분석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여러분과 오늘부터 육개월 동안 마음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공부를 하게 될 거예요.”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 혜령을 본 듯 남자의 인상이 한층 밝아진다. 혜령의 눈이 동그래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학교에 다니며 혜령은 매일 행복한 감정을 느꼈다. 평안하고, 평온한 하루들이 채워졌다. 학교 건물을 나와 혜령이 막 날리기 시작한 벚꽃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곁으로 누군가 다가온다.
“혜령씨, 뭘 보고 있어요? 하늘엔 아무 것도 없구만.”
연후씨다. 혜령이 얼굴을 붉히며 연후를 바라본다.
“꽃이 너무 예쁘죠. 항상 이 맘 때 꽃이 날렸던 것 같은데. 이렇게 꽃을 맞으면서 서 있긴 또 처음인 것 같아요. 너무 예뻐요.”
“꽃이 예쁘긴 하네요. 혜령씨처럼요. 흠흠. 점심시간 와 가는데 같이 나가시죠. 거기서 맛있는 거 먹어요. 좋은 밥집 알아놨어요.”
“싸고 맛있는 거면 저도 좋아요. 제가 살게요. 교수님.”
“이제 혜령씨 학교 들어온 지 일 년 넘었죠? 아직도 교수님이라니요. 연후씨라고 불러요. 수업도 이제 다 끝났고, 이제 저 혜령씨 교수님 아닙니다. 제 과목은 이제 수강신청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들이 불공정하다고 나중에 말 나올 수 있잖아요. 하하.”
“그러기엔 점수를 너무 낮게 주셨던데요.”
“B제로면 많이 드린 겁니다.”
“짜요. 짜. 아무튼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싸고 맛있는 집으로 부탁해요.”
연후와 혜령이 꽃이 날리는 거리를 걷는다. 분홍 꽃들이 혜령의 볼에 얹어진 듯 분홍빛이 가득하다. 꽃이 흩날리고, 꽃이 가득 깔린 길을 연후와 혜령이 한참 걷고 또 걷는다.
자유 - 24. 문을 열다
24. 문을 열다
따뜻한 오후, 연후의 교수실 안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가운데 놓인 동그란 테이블에 혜령이 앉아있다. 헤이즐넛 향을 풍기며 한참 커피를 내리던 연후가 옴팍하게 낮아 금테가 둘러진 잔에 커피를 담아 혜령 앞에 놓는다.
“음.. 향이 너무 좋네요.”
“이거 며칠 전에 친구 놈이 외국 갔다 왔다면서 사온 커피에요. 향기가 아주 진하고 좋은게.. 혜령씨가 생각났어요. 마셔봐요. 커피 좋아하잖아요. 오늘은 아이스 말고 따뜻한 걸로 먹어요.”
혜령이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으로 넘긴다. 커피의 향기와 따뜻함에 혜령의 얼굴에 평온함이 떠오른다.
“혜령씨, 이번 주에 저희 부모님이 혜령씨 보고 싶다는데. 부담되겠지만 만나줄 수 있나요? 부모님이 혜령씨 정말 보고 싶어 해요. 우리가 이제 만난 지 1년도 넘어가고요..”
“아... 제가 보여드릴 게 없어서.. 나중에 뭔가 되고 나서.. 뵙고 싶어요.”
혜령의 난처한 표정에 연후가 유리 주전자를 들고 와서 벌써 비어버린 혜령의 잔을 가득 채운다.
“저희 부모님, 정말 좋으신 분들이세요. 연애 결혼하셨는데 지금도 얼마나 사이가 좋으시다고요. 제가 자주 혜령씨 이야기해서 그런지 너무 궁금해 하세요. 제가 이제 나이도 있고.. 그래서 더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아.. 연후씨가 괜찮으면.. 저도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연후의 간절한 표정을 본 혜령이 말을 했다. 혜령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은 걸 눈치 챈 연후가 바로 말을 잇는다.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이번 주 주말에 같이 밥 먹는 건 어때요? 어머니께서 집에서 밥 해주고 싶다고 오라고 하시네요.”
“아.. 네. 좋아요.”
혜령은 연후의 말에 여러 번 망설였다. 그럼에도 혜령도 연후의 부모님과 연후가 자란 곳이 궁금했다. 커피의 뜨거움이 말랑말랑해진 마음에 두근거림을 더한다.
주말, 복숭아 빛 원피스를 입은 혜령이 연후의 집 앞에 서 있다. 처음 와본 연후의 집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혜령이 기가 죽어 벨을 누르지 못하고 등을 돌려 앞에 서 있다. 그럴 걸 알았는지 시간 맞춰 연후가 대문 앞으로 나와 문을 연다.
“혜령씨, 들어와요. 부모님 모두 기다리고 계세요. 혜령씨 이렇게 서 있을 걸 알고 제가 마중 나왔어요. 잘 했죠.”
연후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 혜령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떠오른다.
철컥. 대문이 열리고 혜령이 안으로 들어간다. 문 앞에 점잖아 보이는 나이든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여자의 옷차림에서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이 묻어난다. 혜령이 여자를 보고, 입고 온 옷차림을 다시 확인한다. 여자가 혜령에게 말을 건넨다.
“왔어요. 혜령씨. 그동안 얼마나 궁금하고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혜령은 연후가 미리 일러준 대로 프리지아와 안개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 왔다. 혜령이 들고 온 꽃다발을 연후 어머니에게 안겨준다.
“아.. 프리지아네요. 내가 이 꽃 정말 좋아하는데. 어찌 알고 사왔어요? 센스가 좋네요. 음.. 향기 좋다. 들어와요. 불편하겠지만 내 집이다 생각하고 들어와요. 식사 준비했는데, 우리 먼저 밥부터 먹어요. ”
연후의 어머니가 혜령의 손을 잡는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식탁에 차려져있다.
“이 녀석이 장가를 가라가라 해도.. 글쎄.. 마흔 훌쩍 넘긴지가 언젠데.. 늦게까지 안 가서 속 썩이더니.. 혜령씨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이거 먹어봐요. 원래 평소에 음식 해 주시는 분이 계신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제가 했어요. 맛이 좀 덜 해도 영양가는 좋으니 많이 먹어요.”
금테가 둘러진 고급 식기 위에 음식들이 정갈하게 담아져있다. 혜령이 조심스럽게 음식을 집어 밥 그릇 위에 놓는다.
“혜령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제가 오늘 부른 건 혜령씨에게 상의할 게 있어서예요. 연후가 이제 나이가 마흔 중반인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고민이 이만 저만 한 게 아니에요. 혜령씨도 연후랑 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에 불렀는데 괜찮죠?”
혜령의 얼굴이 당혹감에 붉어진다.
“네..?”
“제가 성격이 급해서 그래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놀랐죠? 평소에 혜령씨 이야기 연후 통해서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만난 게 처음 같지 않아.. 너무 급했네요. 음.. 연후 이야기 들어보니까 혜령씨가 성실하고 좋은 아가씨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런데.. 결혼식을 올해 가을에는 했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혜령씨 사정 들어서 알고 있어서.. 결혼식은 따로 양가 부모님 부르지 말고 작은 교회에서 간단하게 식 올리고, 저랑 연후 아빠랑, 연후, 혜령씨랑 같이 한달 간 여러 나라 여행 다녀오는 걸로 했으면 하는데.. ”
“아.. 네..”
부모님 자리를 채울 수 없는 혜령을 배려해 연후 어머니는 간단하게 결혼식을 치르자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던 혜령이 고마움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다.
“요즘 누가 결혼식을 으리으리하게 하나요. 요즘은 결혼식 누가 한다고 해도 부르면 반가워하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가볍게 하고, 같이 여행가서 중간에 이탈리아에서 헤어져요. 거기부터는 각자 부부끼리 여행하는 걸로 하게요. 어때요? 이번 기회에 여행도 가고 너무 좋을 거 같아. 그쵸. 여보? 친구들이야 가족끼리 조용히 식 올렸다고 하면 되니까..”
연후 어머니가 연후와 연후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본다. 연후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후의 입꼬리 양끝이 가득 올려져있다. 연후 어머니의 배려에 혜령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그릇에 있던 음식을 입에 넣던 혜령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그 옆으로 연후 어머니가 와서 혜령을 감싸 안는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제 혜령씨 우리 가족이니까.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이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요.”
그 이후 혜령과 연후 어머니는 자주 만나 데이트를 했다. 연후 어머니는 혜령에게 엄마 대신이라며 같이 음악회, 뮤지컬, 미술관 등 예쁘고 좋다는 것이라면 혜령과 함께 하려고 했다. 혜령은 연후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행복했다.
드디어 결혼식, 작은 교회 안 복도에 혜령이 하얀 레이스가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서 있다.
“연후씨, 빨리요. 빨리.”
멋지게 머리를 한다며 화장실에서 한참 머리를 만지던 연후가 혜령에게 뛰어온다. 예배당 문이 열리고 혜령과 연후가 안으로 들어선다. 피아노 연주 소리가 가볍게 깔리고 걷는 길 양쪽으로 꽃들이 가득 장식되어있다. 연후 어머니와 연후 아버지, 연후의 가까운 친척들과 혜령의 외가 식구들, 그리고 엄마 목사님과 등불 교수님이 양쪽으로 나눠 앉아있다.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지고, 혜령의 왼쪽 손에 연후가 반지를 끼워준다.
“고마워요. 혜령씨. 이제 제가 행복한 일만 가득하게 해 드릴게요. 나한테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혜령의 눈에 눈물이 가득 채워진다. 음악과 꽃들이 가득한 길을 연후와 혜령이 걷는다.
일년 후, 이른 아침 혜령의 집 초인종이 울린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이지?’
혜령이 인터폰의 화면을 보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화면 안에 셋째 범수의 아내 한길 엄마가 서 있다.
“혜령아, 나야. 나.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어. 이야기 좀 하자.”
혜령이 한참 고민하다 문을 연다. 한길 엄마가 혜령의 마당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집까지 오시고. 무슨 일 있으세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자. 내가.. 너무 힘들어서.. 너 찾아왔어.”
눈물을 가득 쏟아낼 듯한 표정으로 한길 엄마가 혜령을 바라본다.
“네.. 여기로 오세요.”
혜령이 거실에 놓인 식탁 앞에 방석을 깔고 한길 엄마를 앉게 한다.
“여기 앉으세요.”
“그래. 고맙다. 고마워.”
한참, 혜령이 내어놓은 커피를 마시다 한길 엄마가 입을 연다.
“내가.. 너무.. 힘들어가지고.. 너를 찾아왔어.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안 떠오르더라.. 내가 미안한 게 많은 것도 있고.. 사과도 하면서.. 부탁도 할라고.. 흑..흑..”
한길 엄마가 울기 시작한다. 놀란 표정의 혜령이 한길 엄마 앞으로 앉는다.
“한길이가 요즘 매일 술만 마셔. 너 마지막으로 집에 왔다가고.. 한길이한테 여자가 생겼거든.. 근데. 그 여자애가 처음엔 그렇게 잘했어.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번 갔다 왔던 거야. 혼인 신고가 됐고, 이혼한 게 분명한데.. 남자가 마음대로 신고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그리 울더라.. 그래서 그거 듣고 내가 반대를 좀 했어. 한길이는 초혼이잖아. 내 아들인데 이혼한 여자한테 보내기가 영 그렇더라고.. 그랬더니.. 한길이가 집 나가고 자기들끼리 살기 시작하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했지. 결혼하고 나서는 여자애가 우리 집에 발을 뚝 끊었어. 한길이도 그렇고.. 아들 하나 잃어 버린거지.. 근데.. 그 여자애가.. 최근에 뭔 놈이랑 눈이 맞았는지.. 한길이 돈 다 들고, 집도 마음대로 팔고 나간거야.. 우리 한길이 어쩌냐.. 흐흐흑흑흑.. 취업하고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흐흐흐흑흑흑..”
한길 엄마가 한참 운다. 혜령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한길 엄마 앞에 앉아있다.
“내가 이 이야길 어디 가서 하냐. 동네 챙피해서.. 그 년이 바람나가지고 서방 버리고, 재산 다 들고 날랐다고 어디 가서 말해. 눈물이 너무 나서..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가고.. 염치 불구하고 너 집 물어 물어 온거야. 그동안 내가 너한테 그리 나쁘게 했던 게 다 돌아온 가벼.. 미안해. 미안하다. 나도 너무 어렸고 나만 생각하느라.. 내가 너를 혼자 크게 했어.. 미안해.. 내가 그리 못 되게 하고.. 너한테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흑흑흑.. 내 죄가 커서.. 이렇게 벌을 받는 게 벼.. 미안하다... 흑.. 흑.. 으억..”
한길 엄마가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혜령이 각 티슈를 한길 엄마 앞에 놓는다. 한길 엄마가 티슈를 코에 대고 흥흥 풀어댄다.
“들어보니까. 너 남편이 정신과 의사라며. 뭐 심리상담도 한다고 하드만. 그거 듣고.. 내가 너한테 부탁할라고.. 왔어.. 한길이가 저러다가 큰 일 날까봐.. 너무 무섭고.. 어찌할지를 모르겠어서.. 혜령이 네가 정서방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 내가 염치 없지만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그래..”
“아... 저녁에 남편 오면 물어볼게요.. 한길이가.. 안타깝게 됐네요.”
“내가 정말 미안해. 혜령아. 정말 미안해.. 우리 한길이 좀 살려주라..”
한참 울던 한길 엄마가 기운이 다 빠졌는지 쇼파에 기대 눕는다. 잠이 든 한길 엄마를 보고 혜령이 한숨을 내쉰다. 진한 잠을 잤는지 한길 엄마가 일어나 겉 옷을 걸친다. 그리고 혜령을 바라본다.
“부탁 좀 할게. 꼭 부탁하마. 혜령아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했다. 미안해. 엄마 갈게. 연락 주라. 그리고 이거 얼마 안 되는데 결혼식도 했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준 게 없잖아.. 그러니까 살림에 보내써..”
“아니에요. 엄마 쓰세요. 지금 집도 힘들잖아요.”
“아니.. 이건 내가 꼭 주고 싶어서 그래.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할 거 같고. 나 간다.”
현관을 나서는 한길 엄마의 뒷 모습을 보고 혜령이 한참 생각에 잠긴다. 늦은 저녁, 피곤한 표정의 연후가 대문을 들어선다. 혜령이 대문 앞에 나가 연후의 가방을 든다.
“요즘 통 피곤해보이고, 쉬엄쉬엄해요.”
“논문을 좀 써야 해서. 요즘 통 정신이 없네.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요? 요즘 졸업 논문 쓴다고 여보도 바쁘죠?”
“저야 뭐, 잘 쓰고 있죠.. 그나저나 낮에 한길이 엄마 왔다 가셨어요.”
서재에서 겉옷을 벗어 걸어놓던 연후가 혜령을 돌아본다.
“그래요? 집은 어떻게 아시고 오셨대요? 무슨 일 있으시대요?”
“물어물어 오셨다나 봐요. 한길이가..”
혜령이 낮에 있었던 일을 연후에게 전한다. 한참 듣던 연후가 혜령에게 말을 잇는다.
“원래 상담을 할 때 알다시피 가족이나 친구는 직접 하지 않잖아요. 내가 능력 있는 친구한테 연결해 줄게. 그 친구가 잘 치료해 줄 거예요. 많이 힘들겠네. 한길씨나, 어머님이나.”
“고마워요. 내일 전화 드릴게요. 한길이가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걱정되네요.”
“걱정하지 마요. 괜찮을 거예요.”
주방 식탁에 앉아 혜령이 페퍼민트 차를 마시고 있다. 혜령의 복잡한 마음을 페퍼민트차가 가볍게 눌러준다.
‘그래, 남이라도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까. 이건 가족이라서가 아니니까. 하나님, 한길이를 지켜주세요.’
밤이 깊어가고, 혜령의 뒤로 연후가 와서 감싸 안는다.
“여보,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 잡시다.”
자유 - 25. 안녕, 자유야
25. 안녕, 자유야
엄마 목사님을 만나는 날, 혜령이 엄마 목사님이 좋아하는 커피숍에 미리 와서 앉아있다. 주변을 둘러보다 일어난 혜령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시켜 푹신한 쇼파를 골라 다시 앉았다. 멀리서 엄마 목사님이 걸어온다.
“딸, 오늘은 아이스 아니네?”
“네, 엄마. 이제 따뜻한 거 먹어요. 따뜻한 게, 속도 따뜻하게 해 주고 좋더라구요.”
“그래, 엄마는 네가 항상 차가운 얼음만 먹어서 걱정됐는데, 반가운 소식이네. 요즘은 어찌 지냈고?”
“잘 지냈죠. 엄마는요?”
“엄마는 항상 같지.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엄마, 저 요즘 정말 살맛나요.”
“대학원 갔다고 했지? 요즘 대학원 공부는 어때? 법학이랑 또 다를라나?”
“다르긴 한데, 재밌어요. 사람들도 좋고.”
“거기 있는 남편이 좋은 거 아니고?”
“남편은 매일 집에서 보는 데요 뭘.”
“딸, 요즘은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니?”
“요즘.. 저.. 용서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용서?”
“네, 예전엔 사람들이 용서하라고 하거나, 용서 이야기만 들어도 화가 났거든요.”
“음..”
“근데.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마음이 좀 달라졌어요.”
“그래?”
“옛날에는 그리 아픈 말이었는데, 이제 알게 됐어요. 용서라는 게 타인을 위한 게 아니구나.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거구나. 용서하지 못하는 동안 저 많이 아팠잖아요. 몸도 마음도. 생각해보니까 용서 안 하면 나만 아프더라구요. 뼈가 녹고, 혈관이 터지고, 위장 다 상하고. 근데 용서 빌어야할 놈들은 하나같이 건강하고 잘 지내는 거에요. 용서를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용서라는 게 그렇지. 안 하면 나만 아픈 거니까.. 딸이 많이 성장했구나.”
“얼마 전에 한길 엄마가 오셨어요. 집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집 앞에 오셔서 초인종을 눌러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랬어? 그래서?”
“일단, 문을 열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했죠. 그리고는.. 얼마나 우시던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이미 많이 지나선지, 아니면 용서를 이미 했어선지 몰라도 아무 감정이 안 들더라구요.”
“그 이야기 하려고 오진 않았을 거 같은데.”
“엄마, 참 정확해. 맞아요. 뭐라더라. 한길이가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이 결혼할 때부터 이혼녀였다나 봐요. 그 사실 알기 전까진 그렇게 잘 하더니. 누가 와서 그 여자가 이혼녀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미주알고주알 알려주고 갔다나 봐요. 원래 남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걸 알고 한길 엄마가 속이 상해서 결혼을 반대했대요. 그리고 여자 분이 갑자기 애가 생겼다고 하더니, 갑자기 일주일 만에 유산됐다고 울고불고 했대요. 그래서 한길이가 집을 나가서 따로 살림을 차리고.. 결국 결혼시키고..”
“그래가지고.. 지금은 잘 지낸대?”
“결혼하자마자 여자애가 집에 발을 뚝 끊었대요. 그렇게 잘하던 애가 결혼할 때 반대했다는 걸로 상처 받아서 유산도 됐고 했다고 인연을 끊자고 했다나 봐요. 한길이도 그렇고. 재밌죠. 결혼식까지는 다 불러놓고..”
“아이고. 그랬구나. 그래서?”
“그리고 나서 한참 후에 여자애가 남자가 생겼는지 돈 다 들고, 집 팔고 나갔대요. 한길이가 집에 와서 술만 먹고 있나 봐요. 회사도 안 가고.. 그래서 남편한테 상담이랑 부탁하려고 왔다고 하더라구요. 울고불고..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아이고.. 어쩌다 그랬대.”
“그러니까요. 그 날 한길 엄마가 오셔서 저한테 미안했다고. 자기가 죄가 있어서 그런 거 같다고 그러시는데.. 마음이 아프기만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용서라는 게 누가 용서를 빌든 빌지 않든 할 수 있는 거구나. 용서를 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내 마음을 지킬 수 있구나. 그런 것들을 알게 됐어요.”
“그래도 엄마가 와서 미안하다고 해줘서 나는 고맙네..”
“뭐랄까. 미안하다는 말보다 엄마가 우시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구요.”
“엄마도 목회하다보니까 용서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구나. 아무래도 상처 받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까. 그러면서 엄마가 알게 된 건, 용서라는 게 누가 용서하라고 한다고 해서 해 지는 게 아니더라. 그래서 엄마는 상처 받은 사람들한테 용서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어. 그게 또 상처가 되니까. 아물고 아물도록 들어주고, 또 들어주다보면 게워내다가 결국은 자신을 위해 용서할 수 있게 되니까.”
“맞아요. 엄마. 용서는 정말.. 타인이 강요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또 다른 폭력이 되니까요. 그래서 스스로 용서를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게 내가 나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 딸이 더 성장해서 엄마가 참 기쁘다.”
“용서 안 하면 결국 손해는 나만 보는 거니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미워하던 게 참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미운 놈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만 그리 아팠으니.. 왠지 손해 봤다는 기분이 이제 들더라구요.”
“나중에 혜령이 네가 상처 받은 사람들 만나면 정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경험들로 하나님이 주신 거야. 엄마는 딸이 다 회복해서 참 기뻐.”
따뜻한 커피와 따뜻한 말들이 오가는 카페에 푸근함이 감돈다. 혜령과 엄마 목사님이 만나 그동안 풀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가득 풀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저녁 혜령의 집, 퇴근한 연후가 겉옷을 서재 옷걸이에 걸면서 혜령을 돌아본다.
“여보, 오늘은 어땠어? 엄마 목사님 만난다고 했었지?”
“네, 오늘 잘 만나고 왔어요. 엄마는 여전히 유쾌하고 예쁘셔요.”
“혜령씨는 참 혜령씨를 닮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 그래서 항상 기분이 좋아요. 밥은 먹었고요?”
“연후씨랑 먹으려고 기다렸어요.”
“그럼, 우리 빨리 밥부터 먹읍시다. 아, 그리고 한길씨 친구한테 연결해 줬어요. 요즘 술 안 마시고, 회사 잘 다니고 있다고 고맙다고 어머님께서 전화 주셨어요.”
“다행이네요. 아이구. 한길이.. 정말 행복해져야 할텐데.. 한길이도 어릴 때 집에서 이만 저만 힘든 게 아니었을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직접 겪지 않았어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법이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한길씨가 그 분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고요. 이번 기회에 상처를 돌아보고 회복하는 시간 잘 보내고 나면 행복한 선택들만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래요. 그럴 거예요.”
“이제 우리 더 늦기 전에 밥부터 먹읍시다.”
연후와 혜령이 부엌에 들어가 앉는다. 연후가 가장 좋아하는 계란찜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몇 개월 후 이른 아침, 혜령이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두 줄이 그어진 막대기를 들고 연후를 찾는다.
“연후씨, 연후씨, 빨리 와 봐요.”
“지금 가요. 무슨 일 있어요?”
서재에 있다 혜령의 목소리를 듣고 연후가 다급하게 뛰어온다.
“이거 봐요. 이거.”
하얀 막대기를 본 연후의 입술이 양껏 끌어올려진다. 연후가 혜령을 와락 끌어안는다.
“고마워요. 고마워.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학교에서 강의 끝나면 바로 달려올게요.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응, 알았어요.”
혜령이 오른 손을 아랫배에 올리고 미소를 짓는다.
“혜령씨, 아기 태명은 뭐라고 지을 거예요?”
“아.. 자유요. 자유.”
“자유요?”
“네, 너무 예쁘죠.”
“혹시. 이름도 자유로 할 건 아니죠?”
“왜요?”
“그러면.. 정.. 음.. 자.. 아. 그러니까. 이름은 우리 다른 걸로 해요.”
“이름은 어머니께서 결혼한 날부터 지어놓고 계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연후가 출근한 후, 혜령이 연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어머니, 어머니, 제가 아이가 생겼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두 줄 나오네요.”
“뭐? 그래? 너무 잘했어. 대견해. 고마워. 고마워. 혜령아. 엄마랑 오후에 병원 같이 가자. 혜령이 너랑 아기 모두 건강하려면 병원에 일찍부터 다녀야해. 집에 있어 엄마가 자동차 끌고 거기로 갈게. 엄마가 이름은 이미 정했어.”
“알아요. 안 그래도 연후씨에게 말했어요.”
“그래, 그래 우리 금방 보자.”
전화를 끊은 혜령이 배를 두손으로 감싸 안는다.
‘‘자유야, 내게 와줘서 고마워. 고마워. 엄마가 너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줄게. 아가야. 우리 행복한 일 가득 만들자. 너랑 나랑 아빠랑 셋이서 정말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 사랑해. 안녕, 자유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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