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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16 - 21. / <연재소설> / <최종수정>


자유 - 17. 니 탓

17. 니 탓
 
응급실 맨 끝 침대 위, 누워있던 혜령이 침대 긴 쪽으로 다리를 내려 일어나 앉았다. 침대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져 있고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수술실로 들어갈 수 있을까.’
 
혜령의 눈 사이로 노란 액체가 연신 흘러내린다. 혜령의 건너편 침대로 얼굴이 붓고 피가 군데군데 묻은 남자가 앉는다. 얼굴 전체에 밴드를 붙여놓은 혜령과 얼굴이 깨진 남자의 눈이 마주친다.
 
“아가씨는 어쩌다 다쳤어요?”
 
“집에 가다 강도를 만났어요.”
 
“아이고, 재수가 없었네. 이참에 얼굴 전부 갈아엎으면 되제. 성형외과 기다리는 거죠?”
 
남자는 혜령의 얼굴을 쳐다보다 혀를 찬다. 억울한 마음에 혜령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을 보여준다. 지갑을 받아든 남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조. 나쁜 놈이 따로 없네. 아이고매.. 이쁜 얼굴이 다 망가져서 어쩐대요. 으이구. 범인은 잡았어요?
 
“아니요. 경찰이 이제 잡아주겠죠..”
 
남자는 혜령이 건넨 지갑에 걸린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돌려준다.
 
"아저씨는 어쩌다 다쳤어요?"
 
“술 먹고 집에 가는데, 그 놈이 먼저 시비를 걸어가지고.. 이길 줄 알았는데 나만 얼굴이 이 모양이 되 불었어라. 아이고. 진짜 한 대라도 때렸어야하는데.”
 
 
얼굴 만 가득 다친 혜령과 얼굴만 가득 터진 남자가 응급실에서 침대 가장 끝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상처는 응급실에서 가장 경한 상처에 해당됐다. 양쪽으로 늘어선 침대 줄이 줄어들 기미가 없자, 얼굴이 터진 남자가 혜령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혜령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한명한명 모여든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오랫동안 침대에 혼자 앉아있던 남자는 쓸쓸한 표정으로 혜령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드이어 수술방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건 혜령이 침대 줄서기를 시작하고 12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여름휴가를 맞아 성형예약이 많아 수술 방 자리가 없다고 했다. 겨우 수술방에 들어가게 된 혜령이 조용히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제발 얼굴이 돌아오게 해 주세요.. 제발요..’
 
“수술 시작합니다. 국소 마취 할 거예요. 마취가 안 된 부분은 아프다고 느낄 수 있어요. 아프면 말하세요.”
 
혜령의 얼굴의 긁어내는 소리가 방안에 퍼진다.
 
“선생님 아파요.”
 
“아파도 참으세요. 이 부분을 전부 다 긁어내야 얼굴에 흉이 안 져요.”
 
“얼굴 전면이 시멘트에 긁힌 것처럼 찰과상이 있네요. 전부 긁어내야 흉이 덜져요. 그리고 벽돌에 맞아 움푹 파인 이마는.. 에고..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네요. 두 곳이 파였는데 다시 꺼내 올릴려면 좀 시간이 걸리겠어요. 이마는 어쩔 수 없이 흉이 많이 질거예요. 그래도 흉이 가장 적게 지도록 해 봅시다. 아프더라도 참아요.”
 
 
의사의 말에 혜령이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제발요..’
 
혜령의 꺼진 이마 높이를 맞추기 위해 진행된 수술은 2시간이 지나서야 마무리 됐다. 저녁이 돼서야 혜령이 수술 방에서 나왔다. 수술 방에서 나오자 혜령의 후배가 제일 먼저 혜령을 마주 한다. 고민이 많아 자주 혜령을 찾던 여자 후배였다. 후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하다.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진 혜령을 후배가 받아들고 응급실로 휠체어를 민다. 손잡이를 잡고 휠체어를 미는 후배의 손의 떨림이 휠체어에 그대로 전해진다.
 
“언니, 언니가 다쳤다고 들어서 놀라서 뛰어왔어. 언니 많이 다쳤네. 어쩌지... 기도하면서 여기 서 있었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복도에서 만난 여자 간호사가 혜령을 멈춰세운다.
 
“병실이 없어요. 주변에 다른 병원 찾아보고 있는데. 조금 기다리셔야겠어요. 1인실도 도통 자리가 없네요. 방학이라 수술이 많아서 다인실도, 1인실도 병실이 없어요.”
 
병원에서 입원할 병실이 있는 병원을 알아보는 사이, 혜령에게 치과에 다녀오자며 교회언니가 찾아왔다. 교회 언니는 잘 아는 분의 치과 종합 병원에 가자며 혜령을 차에 태웠다. 교회 언니의 진한 색 명품 청바지 옆에 흔들리는 구찌 가방이 혜령의 눈에 들어왔다. 교회 언니는 자주 트레이드 마크처럼 구찌 가방을 메고 다녔다. 일부로 그런 것처럼 가슴 앞으로 올려 메는 그녀에게서 구찌 가방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마크였다.
 
“지금 내가 가는 곳이 평소 나한테 만나 달라. 만나 달라 이야기하는 원장이 하는 곳이야. 내가 가면 바로 너 진료 해 주실 거야. 다른 데도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걱정마. 나 밖에 없지?”
 
구찌 언니의 가방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커 보인다. 으리으리한 병원 건물 앞에 도착하자, 자동차가 멈춰선다. 세워진 자동차 안에서 혜령이 내려 병원을 올려다본다.
 
“앞 치아 두 개가 덜렁 거리긴 한데. 꿰맬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자연스럽게 다시 붙을 테니까. 그동안 치아를 사용하지 마세요. 꿰매면 오히려 늦게 치료 되요. 그러니까 가만히 두면 되요.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씹지 말고 사용하지 않으면 붙을 겁니다. 다만, 전처럼 사용하는 건 불가할 거 같고.. 꿰매는 수술을 하는 것 보다 자연 치유를 기다려 봅시다. 아랫니 망가진 건 향후에 만들어 세우면 되고요.”
 
“그럼 뭘 먹어요?”
 
“병원에 가면 유동식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빨대로 일주일 동안 드세요. 이를 사용하면 안돼요.”
 
“네..”
 
자연스럽게 붙는다는 말에 혜령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병원에 돌아오자 간호사가 수납하고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라고 전한다. 다행히 일방 폭행사건이라 국가에서 일정부분 지원해 준다는 말에 혜령이 또 한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병실이 있는 병원으로 이동하는 사이 혜령은 산돌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제가 집에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많이 다쳤어요. 병원으로 가는데 입원해야 할 거 같아요.”
 
“차라리 죽어버리지 왜 살아있어? 돈만 들게.”
 
산돌의 말에 혜령은 전화를 끊어버린다. 병원에 도착한 혜령이 1층 원무과에서 입원 수속을 한 후 8인실에 들어갔다. 병실 안 침대에 눕자 그제야 혜령이 잠이 든다.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고 누운 혜령의 뒷머리가 쑤셔왔지만 통증도 잠을 이길 수 없었다.
 
한참 잠을 자고 일어난 혜령의 눈에 막내 삼촌 춘풍이 들어온다. 그 곁으로 넷째 인수의 딸 연기가 서 있다. 그 뒤로 연기의 동생 기석과 혜령의 교회 사람들, 형사 분들이 병실 안으로 차례로 들어온다. 춘풍이 혜령의 오른쪽 머리 맡으로 자리를 옮겨서자 둥그렇게 침대 주변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넷째 인수의 딸 연기가 말을 먼저 꺼낸다.
 
“경희 이야기 듣고 왔어. 경희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하고..”
 
짐짓 연기 언니가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병실로 막 들어온 형사 두 분이 침대에 누워있는 혜령을 내려다본다.
 
“이런 사건이 워낙 많아요. 범인도 못 잡고. 아마 이것도 안타깝지만 미제 사건이 돼서 덮일 거예요. 잡힐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형사의 말에 혜령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지금도 비슷한 사건이 몇 건 터졌는데. 여기에 사인 해 주셔야하고..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형사 두 분이 방에서 나가고 뒤를 이어 연기와 막내 삼촌 춘풍도 나간다. 그날부터 연기는 매일 혜령의 병실에 왔다.
 
‘하나님 어쩌죠..’
 
혜령은 친구에게 부탁해 노트북을 병실로 가져왔다. 병실 옆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던 혜령이 그제야 로스쿨 면접을 위한 접수가 얼마 남지 않은 걸 떠올렸다. 혜령은 등불 교수님께 연락을 드린다.
 
“교수님 제가 집에 가다 좀 많이 다쳤어요. 얼굴이 다쳐서 면접을 보러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등불 교수님은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바로 오셨다. 혜령의 얼굴을 본 교수님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내신다. 교수님이 우시는 걸 본 혜령이 같이 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등불 교수님이 복도로 나가신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와
 
“왜 이렇게 많이 다쳤는지.. 이번 시험은 다음 해로 미루고, 일단 낫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기도할게요.”
 
교수님의 기도와 눈물에 혜령은 마음이 다 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이 가시고, 혜령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 내 사건을 조금이라도 알리자.’
 
혜령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노트북을 덮고 다시 잠을 청한다. 머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지만 피곤함이 다시 잠으로 이끈다. 일어나보니 주변이 시끄럽다. 방송사에서 나왔다고 했다. 전화도 여러 건 와 있다.
 
 
“취재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덕분에 혜령은 여러 방송사에 출연하게 됐다. 모자이크와 목소리 변조를 부탁하고 혜령이 촬영에 임한다.
 
‘이런 식으로 방송에 나오고 싶진 않았는데..’
 
혜령은 이어지는 상황들에 웃음이 났다. 소식을 들은 성철 엄마도 병원으로 왔다. 병실 앞 복도에서 성철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야 너 이년. 빨리 퇴원하라고. 병원비 하나라도 주라고만 해 봐라. 너 가만 안 둔다.”
 
병실 안에서 얼굴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던 혜령을 복도로 끌어낸 성철 엄마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너 때문에 돈 하나라도 들어봐라. 내 딸도 넘어져서 얼굴 다쳤는데 입원 안 했다고. 누굴 죽일라고 병원에 입원해? 내가 널 가만 둘 줄 알고.”
 
산돌 대신에 왔다는 성철엄마가 혜령의 팔을 잡아끌며 계단 쪽으로 향한다. 지나가던 환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령과 성철 엄마를 바라본다. 상황이 궁금한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혜령은 창피한 기분에 같이 소리를 지른다.
 
 
“돈 주라고 안 할 테니까. 가시라고요. 좀.”
 
성철 엄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씩씩대며 엘리베이터에 탄다.
 
“전화하지 마라. 너 또 전화하면 내가 다시 올랑게. 씨볼 년 놈들.”
 
 
성철 엄마가 사라지고 병실 안과 밖의 사람들이 혜령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혜령은 다시 침대 위에 눕는다.
 
‘잠이나 자자.’
 
혜령이 눈을 뜨자 형사 두 분 보인다. 사건 기록을 혜령 앞에 놓은 형사 한명이 혜령에게 사건이 재수사 될 거라 전한다. 사건 기록들을 살펴본 혜령이 수정 요청을 하고, 사인했다. 사인한 기록을 들고 형사들이 나가고 그 뒤로 연기 언니가 들어온다. 연기는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혜령 앞에 놓는다.
 
“줄 건 없고, 병원비에 보태 써.”
 
고마운 마음이 들어 그동안 연기를 미워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동안 혜령은 경희가 달라진 것이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연기 언니를 보내고 혜령은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오는 연기 언니를 생각하며, 그녀에게 줄 옷과 선물을 사기 위해 병원 근처로 나간다. 마침 장이 섰는지 사람들과 물건들이 정신없이 이어져있다.
 
다음 날 연기가 오자 그녀에게 옷과 선물을 내민다. 그리고 혜령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병실을 나간다. 혜령이 화장실에 다녀오다 복도 구석에서 통화 중인 연기의 목소리를 우연히 듣는다.
 
 
“돈을 줬는데, 내 선물들을 사버려서 어쩔지 모르겠어요.”
 
무슨 내용인지 한참 생각하다 혜령은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온 혜령에게 연기는 번개에 맞았다가 다시 살아난 여성의 이야기를 쓴 간증 책을 건넨다. 연기는 책을 꼭 읽어봐야 한다며, 혜령의 손을 꽈악 잡은 후 병실을 나갔다. 간증 집은 번개를 맞아 죽음 전까지 간 여자가 살아난 후, 하나님을 전하고 다니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혜령은 밤마다 찾아오는 검은 그림자와 매일 밤 싸웠다. 결국 혜령은 형사들의 권고를 듣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로 한다. 병원에는 정신과와 치과가 있어 덕분에 혜령은 병원 복을 그대로 입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치과에 들러 보수 치료를 받고 정신과로 향한다. 정신과 병원 앞에 앉아있는 여인의 표정 없는 얼굴이 눈에 밟힌다. 혜령의 이야기를 노란 종이에 적기만 한 의사가 약을 받아 가라고 종이를 건넨다.
 
“약이 몇 개 더 추가됐어요. 입이 마르고, 혀가 갈라질 수 있어요. 물을 충분히 먹고, 충분히 주무세요. 수면제도 넣어드릴게요.”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갔다. 신경과에서 뇌 사진을 찍은 날.
 
“다행히 뇌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뇌라는 게 복잡한 조직이라 나중에 어떤 장애가 나타날지 몰라요. 일단은 뇌출혈이나 뇌 문제는 없어서 다행입니다만 잘 보셔야합니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에 오셔야 해요.”
 
신경과에서 약을 받아들고 병실로 올라온다. 침대에 누워 자려던 찰나 산돌이 병원에 온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산돌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혜령은 병원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병원 근처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후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자, 옆 침대에 누워있던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며칠 전 스스로를 교통사고 나이롱환자라고 소개한, 나이롱 아주머니였다.
 
“아빠라는 사람이 왔다갔어요. 많이 우시던데. 키워주지도 못하고 자기가 버렸다고. 그리고 혼자서 잘 컸다고 미안해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내가 눈물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이름이 혜령이라고 했죠. 제가 다니는 교회가 있어요. 거기 가서 말씀 듣고 저도 많이 회복 됐어요. 같이 말씀 공부도 하고..”
 
‘아 또 시작이군. 이 세상에 참 교회라고 부르는 종교가 많구나.’
 
혜령은 그러거나 말거나 뒤돌아 잠을 청한다. 나이롱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한 달 입원이라고 했던 경희가 이른 퇴원을 하고 연기와 혜령의 병실에 왔다.
 
“경희야, 내가 병원에서 쉬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옆에서 아줌마가 계속 말씀 같이 배우자고. 너무 힘들게 해. 어떡할지 모르겠네. 으유.”
 
“뭘 그래. 언니 나한테 하는 것처럼 하면 되지. 무시해. 그러던가말던가.”
 
“매일 스물네 시간 같이 누워있는데 무시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어제는 아주머니 교회 전도사님도 왔다가고.. 교회 다닌다고 해도 전도하고 내 말을 무시하네.”
 
“몰라. 그러다 말것지.”
 
인터넷으로 글을 올린 후, 매일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말을 걸었고, 덕분에 혜령은 매우 피곤했다. 나이롱 아주머니 건너편에 입원한 여인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혜령에게 말을 건다. 명함을 내민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제가 검찰 쪽에서 일하는데 거기에 .. 뭐....”
 
뭐라고 하는지 한참 듣다 혜령은 적당히 명함을 받아들고 귀를 닫는다.
 
‘세상엔 도움을 주는 사람도 많지만 생각보다 피곤하게 하는 사람도 많구나.’
 
연기가 또 왔다.
 
“내가 다니는 병원이 있는데, 거기 수녀님이 예언 은사를 받으셔서 거기 같이 가보면 좋을 거 같아. 마침 부탁도 해 놨고. 평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받지도 못 해. 오늘 가보자.”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복을 입은 혜령의 손을 이끌고, 겉옷을 대충 챙긴 연기가 밖으로 나간다. 병원에 외출 기록을 써 놓고, 연기의 자동차에 올라탄 혜령은 그제야 묻는다.
 
“거기가 어딘데. 근데 꼭 가야돼? 예언하는 수녀님은 뭔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아무나 안 만나주시거든.”
 
연기를 따라 간 곳은 한적한 곳에 있는 성당 같은 곳이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고, 마을과 동 떨어진 곳에 세워진 곳이었다. 혜령은 적당히 내려 연기를 따라간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 다행이다.”
 
1층 복도 혜령의 앞에 다섯 사람이 엉성하게 줄을 서 있다. 다섯 사람이 사라지자 드디어 안으로 들어간 혜령은 수녀님과 그녀의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얼굴과 머리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은 혜령을 수녀라는 사람이 바라보고 말을 한다.
 
“자네 아이를 죽인 적이 있지?”
 
“아니요”
 
“낙태를 한 적이 있잖아. 그러니까 얼굴이 그렇게 됐지.”
 
“무슨 소리세요? 저는 애를 임신한 적도 없고 낙태를 한 적도 없는데요.”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어디에요?”
 
“남자는 몇 명 만났고? 잠자는 지금까지 몇 명이랑 했어? 낙태를 하지 않았어?”
 
“무슨 소리예요? 남자는 둘 밖에 없었고, 낙태는 해 본 적도 없는데요. 검사해서 보여드려요?”
 
이상한 소리만 주절거리다 예언한다는 대단한 수녀는 마지막 말을 뱉었다.
 
“다친 얼굴보다 마음에 상처가 깊으니 마음을 잘 다독이도록 해요. 얼굴은 깨끗하게 나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한참 항변만하다 나온 혜령이 볼멘소리로 연기에게 말한다.
 
“언니 예언하는 수녀가 맞아? 뭐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아.. 밑에 사람들이 모여서 찬양을 한다는 데 같이 내려가자.”
 
착한 표정과 착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찬양을 하고 빙글 빙글 손을 맞잡고 돌고 있다. 거기에 혜령을 끼워 혜령도 동동 술래 놀이처럼 한참 빙글빙글 같이 돈다.
 
“여기 사람들은 다 마음 치유하려고 온 사람들이야. 생각보다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많거든. 다음에 우리 또 오자.”
 
‘오기 싫은데..’
 
혜령은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빙글빙글 돌던 착한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그 이후로도 연기가 몇 번 더 찾아왔고, 연기는 자꾸만 어딘가에 같이 가자며 혜령을 잡아끌었다. 혜령은 연기가 가자고 하는 곳에 가지 않는다며 한참 입씨름을 했다.
 
“정말 좋은 곳이 있거든.”
 
“언니, 나 지금 너무 피곤해. 옆에서 아줌마가 매일 전도하려고 말 걸고. 자기 교회사람들 데려와서 또 이야기 하고. 너무 피곤해.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데.. 왜 언니도 옆 아줌마도 난리야. 둘이 서로 전도를 좀 해봐. 둘이 다른 종교고만 들어보니까.”
 
혜령이 퇴원할 즈음이 되자 연기는 나중에 다시 보자며 발을 끊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 드디어 병실에 평화가 왔다. 그리고 합격 후 공무원이 된 자영이 혜령의 병실에 왔다.
 
“급하게 온다고 왔는데. 이제 왔네. 많이 다쳤네. 어쩌다 이렇게 됐어..”
 
자영을 보자 혜령은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내가 면접도 얼마 안 남았고. 대체 인생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어쩌면 하나님이 이 길과 인연이 없으니까 그만 두라고 하시는 건 아닐까?”
 
“니가 싫으면 안 하는 거지. 왜 거기 하나님 이름을 갖다 대. 니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마. 병원비는?”
 
 
“사람들이 조금씩 주고 간 거랑, 서울 목사님이 돈을 보내주셨어. 그거랑 해서 내려고.”
 
“다음에 또 보자. 일단 오늘은 급하게 내려왔고. 다시 복귀해야 해. 언른 낫고. 기도할게. 내가 너 돈 안 주려고 했는데.. 너가 너무 불쌍해서 주고 간다. 이거 받아.”
 
자영은 일이 바빠 다시 서울로 급하게 올라갔다. 하얀 봉투 안에 5만원이 들어있다. 자영이 가고 난 후, 혜령은 자영의 말을 한참 생각한다.
 
 
얼굴에 붕대를 모두 풀게 되자, 혜령은 퇴원 수속을 밟는다. 퇴원하기 전 혜령은 정신과에 들러 약을 한가득 받았고, 수납을 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간다. 그동안 수험을 위해 모아뒀던 돈과 엄마 목사님이 보내주신 돈으로 원무과에서 수납을 했다. 드디어 집에 온 혜령이 겉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이 들자 꿈에 얼굴 없는 검은 그림자가 찾아와 혜령의 목을 졸랐다. 집에 온 혜령은 매일 두려움에 떠는 밤을 보냈다. 혜령은 더 이상 문 밖으로 한발 짝도 나갈 수 없게 됐고, 잡하지 않은 범인이 창문을 깨고 들어올까 무서워 떨던 혜령이 형사에게 전화를 건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어요.”
 
“신변 보호 요청 이런 건 안 되나요?”
 
“경찰 인력이 부족하고 요청한다고 해도 24시간 따라다닐 수 있진 않으니까요. 사설로 보안해주는 곳에 전화 하셔서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혜령의 작은 방을 둘러보신 형사는 언제든 전화하라며 개인 번호를 주고 가셨다. 퇴원한 후 집에 오고 며칠 후, 혜령이 셋째 범수에게 전화를 건다.
 
 
“잘 지내셨죠 ? 제가 강도를 만나서 많이 다쳤었어요. 퇴원하고 집에 와서 전화 드려요.”
 
오랜 만에 듣는 셋째 범수의 목소리가 불편했지만, 죽음 전까지 다녀온 혜령은 이제 용서하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전화를 받은 셋째 범수는 혜령에게 바로 오겠다고 하더니 그날 오후에 혜령의 집으로 왔다. 혜령은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범수에게 내어 놓는다.
 
“아빠는 제가 서운하셨겠지만, 저는 고등학교 때 매주 집에 갔어요. 엄마들이 매일 거짓말 한 거죠.. 소금도 뿌리고, 뺨도 때리고..”
 
“왜 말 안했어? 그러면 내가 해결해 줬을 텐데..”
 
“저 때문에 아빠랑 엄마가 싸우시는 게 싫었어요. 아빠랑 왠지 엄마랑 사이에 껴서.. 그냥 제가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너가 하도 집에도 안 오고,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이번 사건 들었을 때 차라리 죽어버리지. 했어. 너무 서운했거든. 근데 이런 이야기들이 있을지는 몰랐구나. 미안하다.”
 
범수와 혜령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나눴다. 그날 이후 범수와 혜령은 가까운 부녀 사이가 된 듯 지냈다.
 
집에 온 후 혜령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 다시 해보자. 뭐. 이번에 안 되면 이젠 그만 둘 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나님 들으셨죠?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이젠 다신 안 할 거예요.’
 
각오를 다지고 혜령은 다시 일어섰다. 교회에 나가고, 봉사활동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생님이 안 와서 서운했지. 선생님이 다쳐서 못 왔어.”
 
“지난번에 선생님이 얼굴붕대 감고 와서 원장님 보는 거 봤어요. 으악. 너무 많이 다쳤던데. 이제 괜찮은 거예요? 애들이 괴물이라고 난리 났었어요. 너무 충격 받아서 저도 매일 악몽 꿨어요.”
 
“이제 괜찮아. 하나님이 다 낫게 해 주셔서. 선생님 이제 주말 마다 다시 올게.”
 
“선생님 안 오시면 안 돼요. 제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선생님이 대학도 가라고 해서대학도 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 계속 와요. 내가 대학 갈 때까지.”
 
 
혜령은 아이의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 해보자. 다시.


자유 - 18. 어차피 천국 못가

18. 어차피 천국 못가
 
 
반쯤 감은 눈의 혜령이 침대 긴 편으로 다리를 내려앉았다. 벌써 새벽 4시 반이다.
 
‘큰 일 났네. 어이쿠.’
 
혜령은 머리를 대충 묶어 올린 후, 옷을 갈아입는다. 혜령이 집으로 돌아온 후, 새벽 예배에 같이 나가자며 구찌가방 교회언니는 매일 혜령을 데리러 왔다. 그녀는 새벽 4시 50분이면 어김없이 혜령이 사는 원룸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차에 오르기 위해 조수석 문을 열자 구찌 가방이 놓여 있다.
 
“뒤로 타 뒤로. 오늘 예배 끝나고 갈 데가 있어서 급하게 나오느라 짐이 많네. 그나저나 너는 10분 전에는 내려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붉게 칠해진 입술 위로, 날카롭게 올려 세워진 속눈썹에 마스카라 액이 가득 뭉쳐있다.
 
“밖이 어두워서 너무 무서워요..”
 
“이제 좀 극복해야지. 한 달 정도면 괜찮아 질 때 되지 않았어?”
 
“......”
 
“아, 오늘 저녁에 교회 집회 있는데 갈 거지?”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못 갈 거 같아요.”
 
“야. 너 데리고 간다고 교회에 말해 놨는데. 너가 안 가면 내 얼굴이 뭐가 되겠어? 그리고 언제까지 방에서 안 나오고 그러고 있을 건데. 나는 너 새벽에 교회에 데려가려고 엄청 일찍 나오는데, 무섭다고 밑에 미리 내려와 있지도 않고. 성의가 없어. 하여간."
 
“.....아..”
 
“나도 니 나이 때 택시 타다가 납치당할 뻔 한 적 있어.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아가잖아. 집에 남편이 밤늦게 들어오면 잠을 늦게까지 못 자고 그러긴 해도 이렇게 잘 돌아다녀. 그러니까 너도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고 그래. 도착했다고 연락해야 내려오지 말고. 내가 택시도 아니고.”
 
“네..”
 
“음.. 그리고 내가 요즘 자주 다니는 옷 가게가 있는데, 내가 옷을 좀 잘 입잖아. 거기 주인이 센스가 있어. 덕분에 옷 잘 입는다는 소릴 많이 듣고. 거기 알바 구한다더라. 장사가 그리되는 편은 아니라 시급대로 다 주진 못하고. 2,500 원에 맞춰 준다네. 대신 일은 좀 편안할 거라고 하길래. 내가 너 추천했어. 거기 면접 봐봐. 너 시험 보려면 시험료 필요하잖아.”
 
“지금은 병원도 다녀야하고 너무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요.. 속도 울렁거리고 죽을 거 같아요..”
 
“넌, 내가 말하는데 생각해 본다고 하지도 않고. 바로 안 된다고 해?”
 
구찌가방 언니는 혜령이 필요할 때면 전화를 해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불렀다. 혜령이 올 때까지 구찌가방 언니는 전화를 하고 받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왔다.
 
“너 여기 와서 가게 좀 봐줘. 내가 어디 좀 가야거든. 대신 여기 와서 밥도 먹고 가고.”
 
“제가 지금 학원에 가야해요.”
 
“갔다가 오면 되잖아. 나도 할 일 많아. 만나야할 사람도 많고. 너 그렇게 말 안 들으면 너 미워할 거야. 내가 너 버릴지도 몰라.”
 
구찌 가방 언니의 말에 혜령의 심장이 시큰했다. 구찌가방 언니의 하루는 혜령에게 전화를 거는 걸로 시작됐다. 혜령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전화가 올 때면 마음이 조였다.
 
‘언니가 곧 전화 할 텐데. 기다려야하나. 어디 갔다고 하면 또 화 낼 거고. 나를 버버리면 어쩌지?’
 
버림받는 것이 익숙했던 혜령은 더 이상 버림받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구찌가방언니의 모든 일과에 혜령은 자신의 일처럼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권한 옷 가게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에 나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혜령은 자주 울렁거림을 느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올라오는 고개에서 땅에 다리를 접고 앉아있어야 했다.
 
혜령이 집으로 돌아오고 며칠 후부터 혜령의 핸드폰으로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발신자 제한 표시」
 
전화를 받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팅 팅 팅.. 툭툭..” (철근끼리 부딪히는 소리)
 
“누구세요? 누구시냐구요.”
 
철근 부딪히는 소리와 공사장에서 날 법한 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다. 같은 소리만 반복되고, 혜령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다. 혜령이 끊기 전까지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혜령은 이상한 전화가 매일 계속 되자, 일전에 번호를 준 형사에게 전화를 건다.
 
“형사님 요즘 자꾸 이상한 전화가 와요. 발신자 제한표시로 오는데요. 이상해요. 혹시 범인이 전화를 거는 게 아닐까요? 너무 무서워요.”
 
“일단 사진 찍어서 보내주시고요.. 녹음도 해 두세요. 저희가 국내 통신사 어디서 걸려오는 전환지 알아보겠습니다. 누군지 물어보고 최대한 상대방이 답변을 하게끔 이야기 해 보세요.”
 
매일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는 혜령이 끊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혜령이 소리를 지르고 법석을 떨어도 전화 속 소리는 항상 같았다.
 
 
“팅. 팅. 팅. 툭. 툭.” (철근끼리 부딪히는 소리)
 
형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혜령씨 국내 3사 통신사 말고도 전부 알아봤는데요. 국내에서 걸려온 전화가 아닌 거 같아요. 대포 폰인 거 같기도 하고요. 상대방을 알 수가 없다 네요.. 아직 범인도 잡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번호를 바꾸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범인이 들고 간 가방 안에 개인서류들이 있었다고 했죠? 그 정보로 전화를 걸었을 수 있으니까요. 일단은 번호와 이름을 변경하시는 것도 방법일 거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병원 치료도 잘 받으시고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 네 개 지부 경찰서에서 사건을 진행 중이예요. 사건 당일 그 시간대에 현장 근처 기지국에서 전화를 걸었던 2천명을 직접 만나 찾아보는 중입니다. 조금 만 더 기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혜령은 전화번호를 바꿨다. 혜령이 번호를 바꾸고 나서야 발신자가 없는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날 구찌 언니가 혜령의 아르바이트 장소로 찾아왔다.
 
“오늘은 내가 특별히 너 봐 주려고 왔어. 내가 소개했는데 잘 하고 있는지 봐 줘야지. 밥은 먹었고?”
 
혜령은 구찌가방언니와 있을수록 마음이 조여 왔다.
 
“어제는 내가 누구를 좀 만났는데. 모르는 여자도 있더라고. 이것들이 나를 쉽게 보는 거 같아서 내가 딱 째려봐줬지. 그렇게 몇 분 만 하면 금방 내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해져.”
 
혜령이 물끄러미 구찌 언니를 바라본다.
 
“교회도 하나의 사회야. 교회라고 해서 다를 것 같아? 안에서 바람피고 만나고 서로 그래. 엊그제는 교회 직분자가 밤늦게 나한테 전화를 했지 뭐야. 맨날 자기 부인한테 나 좀 닮으라고 한대나 뭐래나. 차 한 잔 하자는데. 내가 무슨 차를 마시냐고 톡쏴줬더니. 자기 그런 거 아니라고 하고. 아무튼 교회 안에 직분자 건 뭐 건 안에서도 사회에서 일어날 일들은 다 일어나.”
 
“아.. 그렇네요..”
 
“요즘은 아줌마들이 산에 그렇게 다닌다더라. 아저씨들 만나서 자기 옷 사달라고 해 놓고. 나중에 가서 아들 옷으로 바꾼다고 하더라고. 신기하지. 다들 나이 들었다고 해서 바뀌지 않아. 다 같이 나이가 드니까. 나이든 사람들끼리 연애도 하고, 자고 그러는 거지.”
 
혜령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자주 혼란을 느꼈다. 그녀와 다니는 새벽 예배, 신령한 집회 안에서의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매일 같이 구찌가방 언니와 혜령의 만남이 이어졌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가고 함께 교회에 다니면서 혜령은 완전히 구찌가방 언니의 손발이 되었다.
 
“너 영어 공부 하고 있다며. 내 아들 좀 와서 가르쳐봐. 그러면 실력도 더 늘 거 아니야?”
 
“시간이 좀 없을 거 같은데요..”
 
“넌 항상 바로 된다고 하는 일이 없더라? 너 자꾸 그러면 내가 미워한다?”
 
혜령의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진다.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나를 버리면 어쩌지. 나는 소중한사람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구나..'
 
죄책감에 시달리다 혜령은 구찌가방 언니를 만나러 갔다. 비슷한 일상들이 계속 반복되자 혜령은 더 이상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졌다. 혜령은 엄마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 띠.. 띠..
 
“엄마, 저예요. 잘 지내시죠? 제가 너무 힘들어요. 왜 힘든지 잘 모르겠어요.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말씀도 자주 보고, 봉사도 하는데.. 기운이 없어요.”
 
“엄마가 기도할게. 어디 몸이 안 좋은 거니?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 거야?”
 
혜령은 그동안의 일을 엄마 목사님께 말씀드린다.
 
“그랬구나. 아무래도 그 분이 사람을 조종하는 걸 좋아하는 분인 거 같은데.. 네가 너무 힘들겠구나.. 엄마가 생각하는 건데.. 잠시 서울에 있는 교회에 올라와 있는 건 어떠니? 그런 분들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은데.. 지금은 집도 알고, 그래서 거리를 두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엄마 생각엔.. 그 사람과 인연을 끊었으면 좋겠는데. 일단 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 하고 다 챙겨서 엄마 옆으로 와 있으렴.”
 
“그 언니가 엄청 서운해 할 거예요. 저를 미워할지도 몰라요. 제겐 엄청 소중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너무 힘들어요.. 마음이 조급해지고.. 서울에 가는 걸 말 안 하고 가면 절 영원히 버릴지도 몰라요.”
 
“령아, 일단은 와서 엄마랑 이야기 하자. 기도 하고 있으마. 통장으로 차비 넣을 테니까 일단 짐을 싸서 올라와.”
 
“혜령은 그 날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로 갔다. 그리고 핸드폰을 정지했다.
 
“령아, 쉬고 기도하고 여기서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충분히 있다가 다시 내려가렴.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길도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길거야. 내려가면 교회도 옮기고.. 엄마 생각엔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 언니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언니가 너무 속상해할 거예요. 그리고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너무 좋으신 분이예요. 저 다쳤을 때도 우시고.. 기도도 해 주시고.. 옮기면 속상하실 건데.. 그리고 언니가 저한테 잘해준 것도 많고요.”
 
“그 언니는 너 없어도 잘 지낼 거야. 우리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이 세상 교회는 다 하나님 껀데. 어느 교회든 가서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되지. 일단 엄마가 밥 해 줄 테니까 맛있게 먹고, 같이 말씀보고 기도하자.”
 
목사님이 자리 잡은 곳은 서울 지하 교회였다. 엄마 목사님을 닮아 교회는 푸근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혜령은 목사님 곁에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동안 엄마 목사님과 시장에 가서 나물을 사와 무쳐먹고, 교회 안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고 난 후, 혜령은 면접을 위한 스터디를 모집했다. 그 사이 자연스럽게 구찌언니와 인연이 정리됐다.
 
 
「로스쿨 면접을 함께 준비할 분들을 구합니다. 0시 0분00 대학교 00실」
 
 
혜령은 쪽지를 도서관 게시판에 붙였다. 그리고 로스쿨 면접 스터디를 하고, 차분히 일상을 채워나갔다. 면접을 위한 정장을 사러가는 길, 범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혜령아, 장례식장에 와야 할 거 같은데.. 관수 형님..딸 은성이가.. 그렇게 돼서..”
 
“네? 그렇게 되다니요?”
 
“여기 00장례식장인데 천천히 준비하고 오거라.”
 
“아빠 제가 면접에 입으려고 정장을 사러 가던 길이예요. 그거 사서 입고 갈게요.”
 
“그래, 아빠가 정장 값 얼마 안 되지만 보내주마. 그걸로 좋은 걸로 사서 입고 오렴.”
 
천사 같은 은성언니, 은성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혜령은 두려움을 느꼈다.
 
 
장례식 장, 신을 벗고 혜령이 안으로 들어간다. 범수가 있는 곳으로 혜령이 걸어간다.
 
“아빠 저 왔어요.”
 
“그래 잘 왔다. 산돌아빠한테는 이야기 하지 말고. 워낙 둘째 형이랑 사이가 안 좋으니까.. 형님 딸이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결국은 목을 맷다고 하는 구나..”
 
“목을 매요?”
 
“돌아가면서 지켰는데. 그렇게 됐다네.. 매일 자기만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도 그래서 병원에 다니게 하고, 약도 먹게 하고.. 돌아가면서 살펴보고 그랬는데. 잠깐 외출한 사이에 그러게 됐대.”
 
“아.. 그 천사 같은 언니가. 대체 왜..”
 
“일단 꽃 놓고 인사 하러 가자.”
 
혜령은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시골 가족들을 장례식장 안에서 마주한다. 혜령을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 혜령은 은성 언니의 사진 앞으로 걸어간다. 은성언니의 고운 얼굴이 담긴 사진 앞에 선 혜령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바닥에 댄 후 한참 운다. 혜령의 눈과 코에서 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왼쪽 벽에 붙어 앉아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관수가 혜령을 발견하고 무서운 얼굴로 쳐다본다.
 
“이제 와서 어쩌라고. 어? 이제와서 어? 니년 만나고 와서 착한 내 딸이 귀신이 들렸다고. 너 때문에 죽었어. 너 때문에 죽었다고. 니 애비는 내 거 다 뺏어 가더니, 니는 내 딸까지 죽이고.. 니가 죽였어. 니가 죽였다고.”
 
삿대질과 함께 둘째 관수는 혜령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관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쏟아진다. 둘째 관수의 말과 눈빛에 혜령은 두려움을 느낀다. 옆에 있던 셋째 범수가 관수를 향해 낮은 음성으로 말을 뱉는다.
 
“형 발등을 형이 찍은 거여.”
 
혜령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곁눈질만 하며 방임하던 범수였다. 그런 범수가 처음으로 혜령의 편에 서서 말을 뱉었다. 범수의 말에 혜령은 그동안의 아픈 감정들이 한 번에 녹아내리는 듯 했다.
 
‘고마워요. 아빠..’
 
은성 언니는 혜령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온 후 매일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은성 언니는 둘째 관수의 죄가 씻기도록 교회에 나가서 빌고, 또 빌었지만 마음의 짐을 덜어내지 못했다고 했다.
 
혜령은 은성 언니에게 인사를 하고 근처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도착한 한길이 문으로 들어오며 혜령을 본다. 눈이 마주치자 한길은 바로 얼굴을 돌리고 혜령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돌린 얼굴에서 불쾌함이 떠오른다. 장례식장엔 은성언니가 다녔다는 교회 사람들 누구도 오지 않다.
 
“자살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교회 목사님이랑 성도들이 안 온다고 했다네. 으유. 교회가 그렇지.”
 
범수의 말에 혜령의 마음이 뜨끔하다. 은성언니의 아이들이 혜령의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엄청 많이 컸네..’
 
아이들을 보고 혜령이 멀찌감치 서서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저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요..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키워주셔요. 마음을 치유 해 주셔요.'
 
혜령의 뒷 편에 서 있던 집 안에서 믿음이 가장 좋다는 넷째 인수가 갑자기 찬송을 부른다. 하늘 가는 길이라는 찬송이 울려 퍼지고, 은성언니를 천천히 떠나보내는 준비가 시작됐다. 찬송의 울림 덕분에 식장 안이 더욱 경건한 분위기로 가라앉는다. 한참 찬양을 부르던 넷째 인수가 한길과 연기, 운길, 경희, 기석을 불러 모은다.
 
“자살하면 어차피 천국 못가. 알았지?”
 
넷째 인수의 목소리가 혜령의 귀에 들어온다. 그리고 인수는 마저 찬양을 부른다. 장례식 장 안에 인수의 목소리 만이 가득 울려 퍼진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 찬송가 493장
 
 
‘어차피 천국 못가. 너는.’
 
혜령의 마음에 같은 말이 쟁쟁하게 울린다.


자유 - 19. 그건 니 사정

19. 그건 니 사정
 
정신과 약을 먹고 겨우 잠이 들었던 혜령이, 핸드폰 벨소리에 눈을 뜬다.
 
“언니, 오늘 언니 집에 가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아? 언니 혼자 자는 거 무서우니까. 밤에도 내가 같이 있어 줄게.”
 
“고마워. 밤에 보자.”
 
해가 질 무렵 경희가 혜령의 집에 왔다. 경희와 혜령이 침대 위에 같이 누워있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경희가 혜령 쪽으로 돌아눕는다.

“언니,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어. 돈도 없고. 배운 것도 별로 없고. 가족도 없고.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 우리 교회 사람들은 부자에, 많이 배운 사람도 많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도 많은데.. 나는 그저 그래.”
 
“니가 왜 가진 게 없어. 이렇게 예쁘고 건강한데.”
 
한참 경희가 아무 말이 없다. 그 이후 경희는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의 매일 혜령의 집에 머물다 갔다. 경희가 한참 머물다 발을 끊을 무렵, 혜령의 집 대문을 밤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퉁퉁퉁퉁.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와 당기는 소리, 두드리는 소리)
 
문고리를 잡고 열려고 하는 소리 몇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 몇 번, 그 때문에 경찰이 자주 출동했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혜령은 밤이 더욱 두려워졌다.
 
“경희야, 요즘 모르는 사람이 자꾸 문을 두드리고, 열려고 해. 그리고 사라지는데 무서워 죽겠어. 너가 집에 좀 오면 안 돼? 경찰도 몇 번 불렀는데.. CCTV를 달아라고만 하네.”
 
“언니, 언니가 우리 교회 오면 나랑, 교회 사람들이 지켜줄게.”
 
“그건 또 뭔 소리야. 아무튼 잡히기만 해봐. 선처고 뭐고 감방에 넣어 버릴 거니까.”
 
혜령은 경희가 들으라는 듯 전화를 걸어 으름장을 놨다. 한동안 계속 됐던 문 두드림은 전화 이후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한바탕 경찰들의 방문으로 정신없는 밤을 보낸 혜령이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앉아있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이 울린다. 산돌의 전화다.
 
“그 자식 잡았대? 내 그 놈을 잡기만 하면 바닥까지 털어서 가만 두지 않을 거다.”
 
“경찰 분들이 열심히 찾고 있긴 한데요. 아직 못 찾았대요. 이사를 가라고 하는데, 이사 갈 곳도 마땅찮고, 돈도 없고.. 아무튼.. 잡으면 먼저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나저나 내가 친척 중에 돈 꽤나 있고, 권력 있는 놈들한테 전화를 걸었거든. 그 사람들한테 그 놈 좀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지. 그랬더니 며칠 뒤에 연락을 준거야. 흥신소 이런 데서 너 뒷조사 했다더라. 근데, 너 어릴 때부터 난잡해서 동네 할아버지랑 그런 거 하고 그랬대매. 원래부터 그런 년이었다고. 내가 그 말 듣고 얼마나 쪽팔렸는지 아냐? 니가 그래서 사고가 난거 아니냐?”
 
“아빠... 그거 동네 할아버지 아니고요.. 할아버지예요. 아빠.. 아버지요.”
 
“뭐라고? 누구라고?”
 
“동네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빠 아버지라고요.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아.. 그래 아무튼 잡으면 연락주고. 다음에 통화하자.”
 
산돌은 전화를 급하게 끊었다. 혜령이 한참동안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본다. 그날부터 산돌은 술을 마시고, 범수를 비롯한 시골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폭풍같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덕분에 모든 가족들이 옥석과 혜령의 비밀을 알게 됐다.
 
며칠 후, 산돌의 생일을 맞아 혜령과 경희가 산돌을 찾았다.
 
“아빠, 오늘 아빠 생신이라 왔어요. 잘 지내셨죠?”
 
“그래, 밥 먹자. 같이.”
 
산돌은 혜령과 경희가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지 말고, 좋은 걸 사오라고 당부했었다. 과거에 산돌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호통을 치며 무안을 주곤 했다. 그래서 혜령은 산돌의 집에 가기 전 돈을 모아 비싼 선물을 사려고 노력했다. 혜령과 경희는 함께 사온 꽃과 선물을 내려 놨다. 혜령이 바닥에 내려놓은 경희의 선물을 보자 산돌의 호통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경희랑 선물 고르고, 같이 샀어요. 아빠 마음에 드시면 좋겠어요.”
 
혜령은 자신이 사온 선물을 경희와 함께 사왔다고 말한 뒤, 산돌의 앞에 경희가 가져온 작은 선물과 올려놨다. 산돌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경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혜령을 바라본다. 산돌의 표정을 보던 성철엄마의 표정에 불쾌함이 가득하다.
 
“너는 그렇게 웃지 좀 마라. 듣기 싫으니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깔깔 웃던 혜령에게 성철엄마가 한마디 뱉는다. 그리고 잔뜩 화난 표정으로 부엌으로 가더니 작은 식탁을 들고 들어온다. 밥상 위에 미역국과 밥, 간단한 나물과 김치가 올라와 있다. 침대 위에 앉아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던 산돌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혜령에게 말을 건넨다.
 
“옛날 시대에는 가족끼리 결혼하고 그랬어. 할아버지 랑도 결혼 하고, 사촌끼리도 결혼하고 그랬지.”
 
산돌은 티비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역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혜령은 산돌이 하는 말의 의도를 몰라 한참 듣고 있다 한마디 뱉는다.
 
“그건 사극에서나 나오는 거잖아요. 가족끼리 결혼해서 권력을 이어가려는 건데.. 결국엔 그것 때문에 기형아 출산하고 문제 생겨서 가족끼리 결혼 안 하게 된 거 아닌가요.”
 
“넌 내가 말할 때 끝까지 듣고 말해라. 말대답하지 말고. 어른이 말하면 네네 하면 되지 니 생각을 왜 갖다 붙여? 니가 그러니까 미움을 받는 거야. 여자는 원래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암 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안 그러든? 싸가지 없다는 말 안 들으려면 가정교육을 잘 받아야해.”
 
혜령은 올라오는 마음을 꾹 눌러 잠근다.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적당히 다 했으면 이제 가라. 또 오고.”
 
혜령과 경희가 밖으로 나온다.
 
“언니, 일부로 같이 사왔다고 한 거지. 아빠가 뻔히 다 알 텐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내가 언니 때문에 불편했잖아. 내 선물이 하찮아서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뭔 소리야. 아빠가 또 소리 지를 까봐 그러지.”
 
“그니까. 그걸 왜 언니가 알아서 판단하고 마음대로 이야기 하냐고.”
 
“나는 너 생각해서 그런 거지.”
 
“그건 언니 입장이고. 불편하니까 그러지마.”
 
경희는 혜령에게 톡 쏘아붙이고 돌아선다.
 
“간다. 연락할게.”
 
경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혜령이 한참 서 있다. 혜령의 눈가가 촉촉하게 번진다.
 
로스쿨의 합격 발표가 있고 소식을 들은 산돌은 이틀을 울었다.

“앞으로는 내가 너 뒷바라지 다 해 주마. 걱정 말고.”
 
산돌이 철석같이 혜령에게 약속을 했다. 학교생활이 시작됐고, 혜령은 정말 열심히 해 보리라 마음 먹었다. 그럼에도 공부는 쉽지 않았다.
 
'머리를 많이 다쳐서 그런가. 왜 잘 안되지. 왜 이해가 안 되는 거지?'
 
처음 느껴보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혜령을 짓눌렀다. 첫 중간고사가 시작하는 날 혜령은 꿈자리가 사나웠다. 혜령의 꿈 속에서 산돌이 운전하는 버스가 뒤집혔다. 그리고 산돌이 죽었다는 소식을 꿈에서 보고 듣는다. 놀라서 잠에서 깬 혜령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꿈에서 아빠가 죽는 꿈을 꿨어. 너무 무서웠어. 아빠는 아직 예수님도 못 만났는데.. 죽으면 어쩌냐고 예수님께 따지고 울고.. 그러다 겨우 깼어.”
 
“괜찮아. 괜찮아. 꿈이잖아.”
 
친구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혜령을 다독여줬다. 전화를 끊고 혜령은 바닥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 아빠.. 너무 불쌍한 사람이에요. 데려가시면 안돼요. 이렇게 데려가시면 아빠는 분명 지옥 갈 텐데. 하나님이 아빠를 구원해 주시려고 아빠에게 저를 보내신 거잖아요. 아빠를 사랑하는 아빠의 아버지 되신 나의 하나님..아빠를 살려주세요..’
 
혜령의 간절한 기도가 계속 됐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혜령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본다. 긴 바늘이 6을 향해 있다. 그 순간 성철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니 아빠 사고 났으니까. 니가 와서 수습해. 버스가 뒤집혔다는데. 니가 경찰서 가라.”
 
“저, 오늘 중간고사 시험이 있어요. 엄마. 못 가요.”
 
“딸이 되가꼬. 아빠 다쳤다는 데 안 가보냐. 버스가 뒤집혀서 삼중 추돌 나가지고. 삼 십명 넘게 사람들 다치고, 니 아빠도 다치고. 버스는 완전히 망가졌어. 지금 니 시험이 중요해? 딸년이 정신머리가 없어서. 끊어!”
 
전화가 툭 하고 끊겼다. 혜령이 바로 산돌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 괜찮으세요?”
 
“팔만 좀 다치고, 괜찮아. 차 폐차 하러 간다. 어제 브레이크 점검하고 고쳐왔는데.. 아침에 이상하게 브레이크가 안 들고 차가 안 멈추더라고. 그래서 전봇대를 박고 겨우 섰지. 이만하길 정말 다행인 게지.”
 
“다행이에요.. 정말.. 병원 꼭 가시고요.."
 
산돌과 통화를 하자 마음이 놓인 혜령이 그제야 짐을 챙겨 학교로 간다. 3중 추돌 사고가 나 버스가 뒤집혔음에도 산돌의 기지 덕분에 승객들을 모두 살렸다고 했다.그 일로 산돌은 완전히 직업을 잃었고, 매일 밤 술을 원 없이 마셨다. 
 
혜령은 대학원에 다니기 위해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말에 과외를 했고, 월세를 벌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로스쿨을 졸업하려면 돈도 많이 필요하고, 생활비도 필요한데.. 도와주세요.’
 
로스쿨 2학년이 되자 혜령의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다. 그럼에도 혜령은 목표를 바라봤다.
 
‘그래, 나는 나 같은 아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잖아. 괜찮아. 원래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더 견고해지는 법이니까. 성경을 봐. 다들 이런 훈련 하나쯤 하잖아. 이건 필요한 과정인 거야. 하나님은 필요 없는 건 안 주시니까.. 하나님 그래도 너무 힘들어요.’
 
혜령은 주말 외에는 집에 가지 않고, 매일 학교 독서실에서 선 잠을 자며 공부를 했다. 로스쿨 건물 휴게실에서 자고, 옆에 마련된 샤워실에서 씻었다. 그리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학교 수업에 들어갔다. 드디어 중간고사 기간이 시작됐다. 갑자기 인수의 아들인 기석이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대. 지금 중환자실에 계신다는데. 니가 와 봐야할 거 같아.”
 
“나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고. 진짜 중요한 시험이라 못 가.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를 왜 만나러가. 나한테는 원수 같은 사람인데.”
 
“성경에 못 읽어 봤어? 일흔 일곱 번도 용서하라잖아. 우리는 다 죄인이고, 용서해야지. 나도 대충 들었어. 근데 할아버지 돌아가시는데 당연히 니가 가봐야지.”
 
“그러니까 내가 왜 가? 가족도 많은데 다른 사람들이 가면 되지. 그리고 내가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 시작이라 정말 못가. 정말 중요해. 이번 시험..”
 
“할아버지가 너 기다리셔. 그러니까 가봐. 그리고 용서해야지. 용서해드려.”
 
“니가 용서라는 개념을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대체 왜 용서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나는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겪어보지 않아 놓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는 거. 그거 선 넘는 거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용서를 하는 거야. 니가 믿음이 약하고 없으니까 그걸 끌어안고 사는 거지.”
 
“허.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일단 너.. 정말 알고 말하는 거 같아서 이야기 하는 건데. 지난 번에 할아버지랑 내 사건 아빠가 전화해서 뒤집는 바람에 다 알고 있다는 거 알어. 근데 니가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나 지금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는데. 너도 만약에 니 딸 태어나서 같은 일을 당하면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 일단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 하자. 나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고, 지금 내 생각 만하기에도 너무 벅차.. 너무 힘들고 아파. 다음에 통화하자.”
 
그날 이후로 넷째 인수의 아들 기석은 한동안 전화를 걸지 않았다. 혜령은 둘째 관수의 딸 은성언니의 장례식장에서 하늘 가늘 길을 간절히 부르던 넷째 인수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네. 정말.’
 
그리고 잠시 후 경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언니. 할아버지 아프시다며? 언니가 가봐야지.”
 
“그러니까 왜? 내가 가야하는데. 갈 사람도 많잖아.”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지금이 마지막인데 언니가 봐야지.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내가 왜 가야해? 가면 더 후회할거 같은데.”
 
“암튼 모르겠고. 언니가 가서 보내드려. 아빠가 언니 가라고 계속 전화하셔. 언니가 가봐야지. 그래야 언니도 마음 홀가분해 질 거 아냐. 그리고 언니 같은 일 언니만 당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 다 그런 일 당하고도 잘 살아. 유별나게 언니만 그러지마. 할아버지 잘 보내드리는 것도 믿음의 사람이 하는 거야.”
 
“그러니까. 왜 내 생각을 니가 해 주냐. 참. 어이가 없네. 허. 참.”
경희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한다며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용서하며 보내드려야 한다며 걸려오는 경희의 전화에 혜령은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 후 산돌이 혜령에게 전화를 건다.
 
“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데. 니가 가봐라. 나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도저히 못 가겠고. 너라도 가봐.”
 
“아빠. 할아버지 정말 못 보겠어요. 무섭기도 하고, 못 가겠어요.”
 
“니가 가봐. 내가 못 가면 너라도 가야지.”
 
“그러니까.. 지금 제가.. 시험기간이고 마음이 힘들어서 못 가겠어요.”
산돌은 갈 때까지 전화를 걸 요량이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혜령은 돌아가며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의 말에 화가 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용서를 못 해서구나. 용서 하고 보내드리지 않으면, 그건 하나님 사람이 아닌걸까?’
 
범수의 전화까지 받고나서야, 혜령은 병원 이름을 물었다. 친구에게 부탁을 해 혜령은 병원에 같이 갔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침대에 묶여있는 옥석이 마른 가지처럼 말라 붙어있다. 지금이라도 곧 죽을 것처럼 온 몸이 까맣고, 얼굴은 해골처럼 뼈가 드러나 있다. 산소 호흡기를 확인하러 들어온 남자 간호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쳐 깨웠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말 한마디 뱉지 못하는 옥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을 겨우 뜬 옥석이 혜령을 한참 바라본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할아버지 제가 기도 많이 했으니까. 할아버지 천국가실 거에요.”
 
혜령은 힘을 내서 옥석의 손을 잡는다. 그 순간 침대와 몸을 고정한 끈을 끊어내려는 듯 옥석이 몸부림을 친다. 산소호흡기가 벗겨지고 옥석이 마른 목소리를 뱉어낸다.
 
“가자. 왜 이제야 왔어.. 빨리 가자. 지금 가자.”
 
앙상하게 마른 손이 혜령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고 옥석이 몸을 뒤흔든다. 지금이라도 당장 혜령을 데리고 떠나려는 듯 그는 세차게 몸부림을 친다. 혜령은 놀라 밖으로 나온다.
“너무 무서워. 왜 그러시지?”
 
“원래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힘이 돌아오시는 분들이 있다더라..”
 
친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령을 바라본다. 혜령이 다시 들어가 그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 천국가실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왜... 이제야 왔어. 당장 가자. 빨리 당장.”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옥석의 얼굴에 혜령이 놀라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둘째 관수가 왔다. 둘째 관수는 옥석이 있는 중환자실 방으로 들어가 팔다리를 한참 주무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혜령이 뒤돌아 병원을 나왔다. 
 
며칠 후 범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혜령이 다녀간 후 옥석이 기운을 차려 다시 일어섰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다. 시골 가족들은 그것이 알 수 없는 신의 힘이 거나, 혜령의 기를 받아서 라고 한참 떠들었다. 10년만 더 사시게 해 주시면 부처든, 예수든 다 믿겠다던 범수의 기도가 들어졌을 거라고 혜령은 생각했다. 
 
그 날 이후 매일 혜령을 기다린다는 옥석의 이야기를 듣자 혜령은 속이 어지러웠다. 요양원으로 옮겨진 옥석은 제 발로 걸어 다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호통을 칠만큼 회복되었다. 과거 형제들이 모두 신용불량자가 된 덕분에 옥석의 병원비가 모두 국가에서 보조됐다. 그리고 요양원 비용으로 달마다 옥석 통장으로 들어오는 국가지원금 덕분에 관수가 매일 같이 옥석의 요양원으로 드나들었다. 매일 오는 관수가 고마운 옥석이 둘째 관수에게 통장을 맡겼고, 관수가 통장의 관리했다. 그 이후 요양원 비가 부족해진 옥석은 요양원에 도둑이 있다며 매일 소리를 질렀다. 범수는 최근의 근황을 전화를 통해 혜령에게 전했고, 혜령은 역시나 관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수는 옥석의 생일 날 찍은 사진으로 옥석이 혜령을 기다린다는 소식도 전했다.
 
“령아, 다음에는 너도 가족들 모임에 오면 좋겠구나.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네.. 아빠.. 제가 학교 공부 할게 너무 많아서요.. 다음에 꼭 갈게요.”
 
혜령은 매일 밤 옥석이 찾아와 끌고 가려는 꿈을 꿨다. 한손엔 낫을 들고 따라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고함치는 그를 매일 꿈에서 만났다. 혜령은 라디오 성경을 틀어놓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불면증과 악몽이 계속 됐고, 혜령의 마음에 어두움이 자주 찾아왔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도와주세요.. 하나님.. 너무 무서워요..’
 
혜령의 밤이 매일 더욱 길어졌다.
 


자유 - 20. 걷고 걸어도 안 될 때

20. 걷고 걸어도 안 될 때
 
로스쿨에 입학한 후 혜령에게 담당 교수님이 생겼다. 담당 교수는 혜령이 꾸준히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자주 연락해 도움을 줬다.
 
“혜령 학생, 오늘 중으로 연구실로 왔으면 좋겠는데. 언제가 괜찮을까요?”
 
“교수님, 저는 다 괜찮아요.”
 
“그러면 점심 후 2시에 연구실로 오세요.”
 
담당교수의 호출에 혜령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혹시, 성적 때문인가.’
 
오후 2시 10분 전 혜령은 교수 연구실 앞에 서 있다.
 
똑똑똑
 
“아, 들어오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래요, 잘 지냈죠? 이번에 중간고사는 잘 봤어요? 학교에서 성적 면담을 하게 되어 있어서 학생을 불렀어요.”
 
“네..”
 
“지난 번 말한 공부해야할 내용들 학습 했나요?”
 
“네.. 교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민법 책에 틀린 문제들을 가필해 넣었어요.”
 
프린터에서 종이 한 장이 나오고 있다. 담당 교수는 혜령의 이름과 성적이 담긴 종이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요. 잘 하고 있군요. 성적이 떨어졌네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 공부가 좀 어려워서요. 이상하게 공부가 잘 안 되네요..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어려워요.”
 
“학생이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학교 공부도 해야 하니까 어렵다는 거 알아요.. 이 성적으로는 3학년이 되도 졸업 시험 통과가 어려울 거예요. 졸업 시험 통과가 안 되면 변호사 시험 응시가 불가능한 거 알고 있죠?”
 
“네.. 졸업 시험 통과가 어려울 거 같아요.”
 
혜령이 고개를 숙인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하얀 원피스 정장을 입은 교수는 작은 냉장고로 이동한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떡을 꺼내 혜령 앞에 내려놓는다.
 
“이거 좀 먹어요. 맛있어요. 떡을 사서 바로 냉동실에 넣고 얼렸어요. 먹기 몇 시간 전에 냉장고로 내려놓으면 방금 산 것처럼 맛있더라구요. 신림동에서 공부할 때 시간이 부족해 자주 떡을 이렇게 먹었는데, 소화도 잘 되고 먹기도 간편해서 좋았거든요. 그게 습관이 됐는지 지금도 떡을 먹게 되네요.”
 
혜령이 떡을 한입 베어 물자 떡에서 달콤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음.. 혜령 학생 일단은 휴학을 해서 따로 공부를 한 후에 다시 와서 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 하세요”
 
“아.. 교수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성적이 이번에 많이 떨어져서 학고 수준이에요. 이렇게 몇 번 하면 유급도 문제고.. 문제는 이렇게 공부하면 졸업시험도, 변호사시험도 합격하기 어려워요. 일단은 휴학한 후에 신림동 학습 커리큘럼에 맞춰서 공부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교수님, 제가 휴학을 하면 휴학하는 동안 생활비도 필요하고, 다시 돌아와서 지내야하는 생활비를 준비해야 하는데.. 휴학하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무서워요.”
 
“그래도.. 신림동 학습 강의에 맞춰서 공부해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일요일에는 뭐하나요?”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교회 봉사도 있어요.”
 
“교회에 가지 마세요. 합격한 후에 가도 되니까요. 일요일에도 공부해야해요.”
 
“봉사활동도...”
 
“일단 공부가 우선이에요.”
 
담당 교수의 말에 혜령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한참 망설인다.
 
“교수님 지난 번에 주신 책들 열심히 보고 있어요. 민법 교과서랑 객관식 문제집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번 풀어보고, 반복해야 해요. 일단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네 고맙습니다.”
 
혜령은 교수님이 주신 필기구와 노트들을 받아들고 나온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독서실로 내려온 혜령이 자리에 필기구와 노트를 내려놓는다. 지하에 있는 독서실이 공부 열기로 뜨겁다. 책을 챙겨 혜령은 주말 과외를 위해 집으로 향한다.
 
‘일단, 여기서 살아남는 게 중요해.’
 
며칠 후 등불 교수가 혜령에게 문자를 보냈다. 혜령을 로스쿨로 이끈 그 교수다.
 
「혜령 학생, 시간 될 연구실로 한번 들르면 좋겠는데. 언제가 좋은가요?」
 
「교수님 저는 다 좋아요. 교수님 괜찮으신 시간에 갈게요.」
 
「그럼 오후에 연구실로 오세요.」
 
등불 교수의 호출에 혜령은 마음이 즐거우면서도 무겁다.
 
‘성적이 좋았으면 좋았을 텐데..’
 
오후 시간이 되자 혜령이 독서실에서 나와 등불교수 방으로 향한다. 복도를 걷는 걸음이 심장 고동처럼 급하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래요. 학교생활은 잘 지낼만한가요? 이번에 중간고사를 봤죠?”
 
등불 교수가 혜령 앞에 성적표를 내려놓는다.
 
“성적표를 제가 좀 봤는데. 이걸 좀 볼까요?”
 
고개가 숙여지고, 혜령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학부생일 때 여러 번 학생의 답안을 봤기 때문에 로스쿨에 와서도 분명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적표는 좀 의외군요. 무슨 일이 있을까요..”
 
“아.. 교수님.. 사고 당한 이후에 여러 번 책을 봐도 잘 이해가 안돼요. 열 번씩 읽고, 열 번씩 문제집도 풀고 했는데 막상 문제를 받아들면 아무 생각도 안나요..”
 
“일단은 지금까지 성적이 너무 낮은데.. 공부 방법을 바꿔봐야 할 거 같은데.. ”
 
등불 교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령을 바라본다. 등불 교수 손에 들린 혜령의 성적표가 혜령의 가슴을 옥죄어온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로스쿨 공부가 학부생일 때 했던 공부랑 다르지 않아요.. 다시 감을 찾는 게 중요해요. 단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장기적인 계획도 잘 세워서 변호사 시험을 최종 합격하는 걸 목표로 합시다.”
 
“네, 교수님 고맙습니다..”
 
등불 교수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도서관 교수 대출증을 혜령 앞에 내려놓는다.
 
“학교에서 책을 빌리고 하는 건 몇 권이든 가능하니까 이걸로 빌려 보고 공부해요. 할 수 있으니까 포기하지 말아요. 여기 이 대출증으로 한번에 50권까지 대출이 가능하고, 한번 빌리면 한 학기 내내 볼 수 있어요. 이거 가져가세요. 나중에 졸업하면 도서관에 반납하면 됩니다.”
 
교수님의 대출증을 받아든 혜령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혜령이 급하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온다.
 
‘그래 열심히 해야 해. 교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자.’
 
다시 학교 생활이 시작됐고, 혜령이 정신없이 학교와 집을 오갔다. 혜령은 그동안 해왔던 도서관에서 자고 일어나는 생활을 접었다.
 
‘잠은 집에서 자야해.’
 
혜령은 늦은 밤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혜령의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열심히 한다고 능사는 아니구나.’
 
졸업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졸업시험은 1, 2, 3차로 나눠져 몇 달에 거쳐 치러졌다. 1차, 2차에 합격한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혜령은 3차 시험 통과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문자메세지. 담당교수.
 
「학생, 연구실로 오세요.」
 
똑똑똑
 
“들어와요. 여기 앉아요. 점심은 먹었나요? 이거 먹어보세요. 토마토가 맛이 좋아요”
 
“네 교수님 고맙습니다.”
 
“이제 3차 시험이 얼마 안 남았군요. 졸업시험에 통과해야 변호사시험을 볼 수 있어요. 문제는 졸업시험 점수가 낮으면 통과하더라도 변호사시험에서 합격을 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알고 있죠?”
 
“네.. 교수님..”
 
“어떻게 잘 준비하고 있나요? 아직도 과외를 하고 있나요”
 
“네 아직 하고 있어요.”
 
“그만둔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이제 그만둔다고 하려구요. 문제는 과외를 해야 생활 유지가 되는데 고민이에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야해요. 그리고 졸업을 유예하고 따로 공부하는 것도 생각해봐야할 거 같고. 지금 상태로는 졸업시험 통과도 불가능할 거 같은데..”
 
“일단 마지막까지 열심히 해볼게요.”
 
“졸업시험을 통과하면 변호사시험 5회 제한이 시작 되서 계속 해야 해요. 알고 있나요? 중간에 멈춰도 시험 기회는 없어져요. 다섯 번 시험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갈 수 있어요. 한번 한번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졸업시험이 통과 안 되면 따로 공부를 시작할까하는데.. 괜찮을까요?”
 
“일단은 그렇게 하도록 하고요. 다시 만나도록 하게요. 이거 지난번에 먹은 떡이에요. 가져가서 먹어요.”
 
“교수님 고맙습니다.”
 
라벤더 향기가 날 것 같은 교수님의 뒷모습에서 혜령은 부러움과 고마움을 느꼈다. 교수실 안에서 나온 혜령이 복도에 서서 창가에 등을 기댄다.
 
‘하나님.. 과외를 이제 그만해야 해요. 알고 계시죠?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너무 힘들어요.’
 
그 시각, 혜령이 다니는 교회의 장로님이 자신의 SNS에 혜령의 개인 사정을 올린다.
 
「생활이 어려워 로스쿨 3학년이 되어서도 과외를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라는 내용들이었다. 며칠 후 한 변호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우연히 학생의 사정을 알게 됐어요. 제가 뭔가 해드릴 건 없을까 생각하다 변호사시험 보는 달까지 생활비와 월세인 40만원씩 보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저도 크리스천이고, 학생을 돕고 싶어 학교에 알아보니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줄 수 있는 없더라구요. 그래서 직접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 안녕하세요..변호사님..”
 
변호사는 치열하게 사회생활을 하다 늦은 나이에 로스쿨에 와서 고생하며 공부했다고 했다. 혜령은 하나님의 응답에 눈물이 났다.
 
‘어차피 저는 통과 못할 점수니까, 하나님 졸업시험에 통과시켜주시면 변호사 시험 보러가라는 걸로 알고 가겠습니다.주님 파이팅.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있느니라. 아멘.’
 
혜령의 3차 졸업시험이 통과됐다. 그래서 혜령은 서울 시험을 보러가기 위해 준비 했다.
 
‘시험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
 
서울에 올라가 일주일 동안 시험을 본 혜령이 시험장에서 나왔다. 1층 로비에 시험 본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났다.
 
‘나는 마중 나올 사람이 없구나.’
 
그 순간 기둥 뒤에서 누군가 나와 혜령을 부른다.
 
“혜령아, 수고했다. 엄마가 2시간 전부터 와서 기도하면서 있었어. 고생했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시험을 못 봐서.. 엄마..”
 
“괜찮아. 또 보면 되지. 일단 먹고 쉬자.”
 
손을 꽉 잡은 엄마 목사님의 손이 뜨겁다. 혜령의 시큰한 심장이 따뜻한 무언가로 덮였다.
 
정신없이 일주일 동안 시험을 본 혜령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1회 시험을 마치고 내려온 혜령이 4회 남은 시험을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를 했다. 한해 한해 준비할수록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시험 횟수는 중간에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혜령은 따로 일을 할 수 없었고, 통장의 잔고도 점점 떨어져갔다. 혜령은 학교 고시원으로 돌아갔고, 식사비용을 아끼기 위해 라면을 먹었다. 봉지 라면을 한 박스씩 사서 고시원에 있는 전자렌지를 이용해 끓여먹었다.
 
‘하나님 오늘은 누군가 민법 문제집을 버렸으면 좋겠는데. 듣고 계시죠?’
 
기도를 할 때마다 신기하게 혜령이 보려던 직전 학기문제집을 쓰레기통 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곱게 버려진 깨끗한 문제집을 받아들고 혜령은 하늘을 보고 빙긋 웃는다.
 
‘역시 아빠는. 최고.’
 
혜령의 가슴이 무언가로 풍성히 채워졌다.
 


자유 - 21. 조금만 더

 
21. 조금만 더
 

한회 시험이 끝나자, 혜령은 재시 반이라고 불리는 독립 건물 독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재시 반에 들어온 학생들의 무거운 분위기가 혜령의 마음을 더욱 끌어내렸다.
 
“우리는 어차피 버리는 카드야. 학교에선 공부해도 합격할 거라고 생각 안 하니까. 이렇게 하지.”
 
재시 반에 마련된 휴게실, 학생들의 무거운 이야기들이 혜령의 귀에 파고든다. 학교는 재시반 학생들에게 독서실 자리를 지원하고, 수험을 위한 자료와 강의들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재시 생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무거움을 덜어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횟수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혜령과 재시반 학생들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밤이 깊어지자 혜령이 짐을 챙긴다. 무겁고, 뜨거운 독서실의 열기가 혜령의 발목을 붙잡는다.
 
‘잠은 집에서 자야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혜령의 머리 속이 어지럽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월세도 그렇고.. 학자금 대출 이자도 그렇고.. 내야할 건 산더민데.. 나가서 일할 수도 없고.. 답답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시험이 끝나면 바로 재시 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 횟수는 멈추지 않고 한 회씩 사라지기 때문에, 시험을 보고 나서도 학생들은 바로 책을 들고 독서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2회 시험이 끝나고 발표가 난 저녁부터 혜령의 무거운 밤이 길어졌다. 혜령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나와 배개를 적셨다. 매년 사라지는 시험 기회가 혜령의 마음을 더욱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혜령은 매일 밤 뜬 눈으로 세운 후 아침을 맞이했고, 같은 시간에 독서실에 나갔다.
 
‘나가자.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니까.’
 
5월, 재시 반 독서실 일원을 새로 뽑는 날이 됐다. 학교에서 일원을 새로 뽑으면서, 재시 반 실장을 맡아하면 매월 10만원의 월급을 지급한다는 공지를 했다. 실장이 하는 일은 매일 아침 7시와 밤 9시에 출석체크를 하고, 학교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재시 반 실질적인 운영을 위해 매달 한번 모여 청소날짜를 정하고, 돌아가며 휴게실을 관리하게 된다고 했다. 공지를 들은 혜령은 어떻게든 실장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건 기회야. 이걸로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낼 수 있으니까. 반드시 해야 해.’
 
실장을 뽑는 자리에서 혜령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가 그녀를 부끄러움도 모르게 만들었다. 가난은 대갓집 딸도 누에고치를 치게 한다는 말이 혜령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여기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혜령은 번쩍 손을 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매년 1월 변호사 시험이 혹독하게 치러졌고, 4월 합격 발표가 나면 합격 점수가 공개됐다. 합격 점수가 매년 급격하게 상승했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다음 구간으로 훌쩍 높아졌다. 합격 점수의 상승폭이 더욱 커진 덕분에 혜령은 따라잡는 데 숨이 찼다.
 
세 번째 변호사 시험을 위해 혜령이 또 서울로 향했다. 시험장이 전국에 몇 군데 열리지 않아 세 번의 시험을 모두 서울에서 봤다. 시험료 20만원과 교통비, 일주일 숙박비, 식사료를 마련하기 위해 혜령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기도 덕분인지 혜령의 서울 목사님과 셋째 범수가 도움을 줬다.
 
“딸, 시험 잘 봐라. 궁금하니까.. 날마다 전화해서 알려주고.”
 
범수의 말이 혜령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럼에도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세 번째 시험을 앞두고, 자영이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령아, 잘 지내지? 나 막달 가까워져서 집에 누워있어. 의사 선생님이 위험하다고 누워 있으라고 하더라구.. 매일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공부는 좀 어때?”
 
“시험 보러 가려고 준비하지. 이번에도 서울로 보러가. 좀 지방에도 열리면 좋을 텐데.. 시험료랑 숙박비, 밥 값하면.. 일주일 동안 드는 돈이 일 년 생활비야..”
 
혜령의 우는 소리에 자영이 말한다.
 
“그러니까. 지방사는 애들은 대체 어쩌라고.”
 
“그러니까.. 에휴.. 잘 지내고 있지?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 하나님 아이니까. 잘 태어날 거야. 서울 목사님께서도 기도해 주신대.”
 
“고마워. 아, 내가 너 통장으로 서울 가는데 쓰라고 좀 보냈어. 50만원인데.. 신랑도 너한테 보내주라고 하더라.. 고맙지.. 돈 버는 친구라고 하나 있으면서 나도 이렇게 빡빡하게 살지 몰랐네.. 들어가는 데도 많고.. 마이너스 통장 쓰면서 사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 도와주지도 못하고.. 마음이 좀 그렇더라. 이번에 밥이라도 좋은 거 사먹어. 굶지 말고. 라면 같은 것도 그만 먹고.. 나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는데.. 내 사정이 계속 안 좋아서.. 지금 집 사고 대출금 내고 하는 것들.. 나중에 다 내 재산 되는 거지만..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 항상 미안해.. 너한테.. ”
 
“뭐가 미안해.. 너 사정 뻔히 아는데 내가 뭐라고.. 고마워.. 잘 쓸게.. 아껴서.. 고마워..”
 
혜령은 눈물이 났다. 시골 교회에 십일조로 5만원을 보내고, 변호사시험비로 20만원을 냈다.
 
‘시험만 보는데도 비싸네. 한 달 집세잖아.’
 
혜령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시험을 위해 일주일 동안 지낼 숙소를 찾아보고 미리 돈을 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돈들이 아쉬웠지만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이번에 더 열심히 하고 오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최선을 다하면 돼. 조금 만 더 힘내자.’
 
1월 시험이 끝나고, 4월 발표까지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시험 성적표를 받아들고 혜령은 생각했다.
 
‘그래 이제 2번 남았잖아. 이 정도 점수로 오르면 내년에는 문제 없을 거야. 많이 올랐다. 고맙습니다. 하나님.. 시험 보게 해 주셔서. 이곳에 보내주셔서..’
 
5월, 혜령이 다시 재시 반으로 향했다. 재시 반 일원들의 자리 선정이 제비뽑기로 진행됐다. 창가 자리와 좋은 자리들이 가장 먼저 채워졌다. 각 반 배치와 실원들 자리 선정이 끝나자, 실장 선출이 이어졌다. 실장을 뽑는 순서가 되자 혜령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할 게요. 제가요. 반드시 제가 해야 해요.”
 
한 해의 평온한 하루들이 채워져 가고 있을 무렵, 범수가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 주말에 집에 와서 쉬다가렴.”
 
“아빠 이번 주에는 안 되고, 조금 후에 갈게요. 이제 공부 다시 시작하는데 준비할게 좀 많아요.”
 
“그래, 금방 오는 거다.”
 
“네.”
 
옥석이 요양원에 들어가자, 범수는 한길 엄마의 마음 치료를 위해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갔다. 셋째 범수의 집은 옥석의 집 근처에 마련됐다. 혜령은 옥석의 집이 있는 마을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범수가 시골에 들어오라는 전화를 해 올 때마다 혜령은 더욱 잠을 자지 못했다. 혜령에게 옥석의 집이 있는 동네는 상처를 기억나게 하는 곳이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참 가혹하네.. 거기 가면 정말 아픈데..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혜령은 범수의 계속 된 전화에 결국 시골에 발을 들였다. 마음이 두근거리고 어린 시절 기억들이 혜령의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딸 왔구나. 아빠는 잠깐 밖에서 일 좀 하고 오마. 엄마랑 대화하고 있으렴.”
 
예쁘게 사과와 배를 깎아 접시에 올린 한길 엄마가 혜령의 곁으로 다가온다. 혜령이 로스쿨에 들어가고부터 한길 엄마는 혜령을 딸처럼 예뻐했다. 반찬도 가끔 주고, 혜령이 오는 날이면 맛있는 음식을 가득 해 놨다. 혜령은 예전의 한길엄마가 떠올랐지만, 현재가 중요하다며 마음을 덮었다.
 
“과일 좀 먹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한길 엄마와 대화에서 혜령은 낯선 느낌에 마음이 가글 거렸다. 한길 엄마와 눈을 마주보고 대화했을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참, 이번에 한길이가 시험을 본다네. 기술직이긴 한데 잘 되야 할 텐데. 취업이 너무 어려워서.. 요즘 세상이 참 그래.. 결혼은 또 언제 할는지. 나이만 들고 취업도 안 되고, 여자 친구도 없다고 하고. 같이 기도하자. 기도 밖에 답이 없지?”
 
“네. 한길이 잘 될 거예요. 분명. 그 녀석 정말 착하고 좋은 아이잖아요.”
 
뭔가 중요한 시간을 건너뛴 듯, 그 시간들이 혜령에겐 기쁨으로, 때론 부담이 됐다.
 
“저녁 먹고 가렴.”
 
혜령과 한길 엄마 대화는 그녀의 일상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집을 나서는 길, 한길 엄마가 혜령의 손에 하얀 봉투를 들려준다.
 
“이거 얼마 안 되는데, 공부하는데 책이라도 사렴.”
 
한길 엄마는 연신 괜찮다고 손 사레 치는 혜령의 주머니에 봉투를 우겨넣는다.
 
“내가 해준 게 없어서 그래. 그러니까. 내가 없어서.. 준 것도 없고. 줄 것도 없고.. 차비라도 하렴.”
 
혜령은 그녀가 싸준 반찬들과 봉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선다. 처음 느껴보는 가족 같은 느낌에 혜령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학교생활이 시작되고, 혜령은 다시 열심히 해 보리라 다짐한다.
 
‘하나님, 당신 밖에 없어요. 아시죠. 제 인생을 책임져 주세요. 당신이 보내셨으니, 마무리도 모두 맡깁니다. 저는 끝까지 할게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가급적이면 시험장도 지방에 열어주시고요.’
 
4번째 시험장이 드디어 지방에도 열렸다. 혜령은 집에 머물면서 시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다.
 
‘그래 이게 하나님의 응답인거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셨잖아. 그러니까 힘내자.’
 
4번째 시험을 끝내고 혜령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4월 성적표를 받아든다.
 
‘어떤 결과든 당신의 옳으심을 믿어요.’
 
합격 발표 페이지, 불합격. 불합격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지 않게 혜령에게 다가왔다.
 
‘뭐 한 두 번도 아닌데. 다시 하자. 또 하면 되지. 한 번 더 남았잖아. 괜찮아. 하나님, 이제 한번 남았어요. 듣고 계시죠?’
 
발표 후 며칠 뒤, 혜령에게 한길 엄마가 전화를 건다.
 
“한길이가 이번에 어버이날이라고.. 같이 여행 가자는데 너도 가자.”
 
“아.. 네.. 고맙습니다. 어디로요? 언제요?”
 
“저기 어디에 꽃 축제가 한다는데. 케이블카도 있다고 하고.. 거기 가보자. 이번 주에 시간 되니?”
 
한길 엄마와 약속한 날, 혜령과 한길이 먼저 만났다. 하얀 승용차가 혜령의 원룸 앞 골목으로 들어선다. 한길은 취업하자마자 제일 먼저 자동차를 구매했다. 한길의 자동차는 도시 느낌의 하얀 승용차로, 깔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얀 자동차가 혜령 앞에 멈춰서고 창문이 천천히 내려간다.
 
“누나 타. 가서 고기도 먹고 놀다오자.”
 
가족 모임에 같이 한다는 생각에 혜령은 고마웠다. 한길의 승용차에 한길 엄마와 운길이를 마저 태우고 한길이 능숙한 동작으로 자동차를 움직였다. 한길의 승용차가 어딘가로 향하다 멈춰 선다. 자동차 안, 한길 엄마가 혜령을 바라본다.
 
“출발하기 전에 할아버지 계신 곳에 들렀다가 가자. 음료수도 좀 놓고 오고. 잘 계신지 보고. 너 온다고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겠다.”
 
한길의 차가 멈춰선 곳은 병원 건물 앞이었다. 한길이 음료를 사오겠다며 운길이와 차에서 내렸다. 한길 엄마는 혜령을 강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같이 올라가자. 할아버지가 너 기다리셨어. 오랫동안.”
 
“안 갈래요.”
 
“너가 가야 우리가 빨리 나올 수 있어.”
 
멀리서 한길이 음료 박스를 들고 걸어온다.
 
“엄마 왜?”
 
“아, 혜령이랑 같이 가려고 하는데 같이 안 간다네.”
 
한길 엄마가 혜령의 손을 잡아끈다. 가지 않는다며 혜령이 다리에 힘을 준다. 한길과 운길, 그리고 한길엄마가 혜령을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너가 가야 우리가 빨리 나와. 할아버지 한번 찾아봬야지. 한 번도 안 갔잖아..”
 
“제가 거길 왜 가요.”
 
“그래도 할아버지 보고 인사는 해야지. 요즘 할아버지 상태도 안 좋고. 얼마나 더 사실지도 모르고..”
 
“안 가요.”
 
한길은 혜령이 계속 가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말하자, 그제야 혜령을 잡은 한길 엄마의 손을 잡는다.
 
“누나는 그럼 1층에 있어. 우리끼리 갔다 올게.”
 
1층 로비에 앉아 큰 어항을 바라보는 혜령을 한길 엄마가 탓하듯 돌아본다. 혜령은 한길 엄마의 표정을 못 본 척 하고, 어항 안의 붕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왜 싫다는데 가자고 하는 거지? 알고 있으면서.. 그러는 거지? 내가 진짜 딸이었어도 저러겠어?’
 
무너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혜령이 숨을 내쉰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길과 운길, 한길 엄마가 나온다.
 
“할아버지 잠들어 계서서 음료만 놓고 왔네. 너도 가도 됐겠어.”
 
혜령은 한길 엄마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 한길의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처음으로 함께 가는 가족 여행이었다. 날이 좋지 않아 케이블카는 탈 수 없다고 했다. 한껏 기대했던 한길 엄마의 표정에 아쉬움이 어렸다.
 
“엄마 다음에 또 오게. 또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케이블카도 타고 그러면 되지.”
 
숯불 고기 집, 안으로 들어서자 숯불 향이 코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허기진 배가 냄새를 더욱 달콤하게 한다. 숯불이 놓여지고, 양념이 진하게 벤 고기들이 불판 위에 올려 진다.
 
“많이 먹고 가자. 혜령아 많이 먹어.”
 
한길 엄마는 혜령의 그릇 위에 고기를 가득 올려준다. 고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길 엄마는 가장 비싼 고기를 시켰다. 다 먹고 나자 한길이가 취업 턱을 낸다며 의기양양하게 지갑을 빼들었고, 덕분에 한길 엄마의 입술이 가득 끌어올려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음에 또 오게. 같이 이렇게 가니까 좋잖아.”
 
한길엄마가 혜령에게 말한다. 가족 모임에 혜령도 함께 했다는 생각에 가족이 된 듯 우쭐한 마음이 든다.
 
‘그래 나도 잘 하자. 한길이 한테도. 엄마한테도.. 동생들.. 내가 잘 해준 적 없잖아.. 누난데..’
 
집으로 돌아온 혜령은 고기를 밥그릇 안에 가득 올려준 한길 엄마 만을 생각한다.
 
‘나도 가족이니까. 언른 자리 잡아서 누나 역할을 하는 거야.’
 
혜령은 반드시 합격하리라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 달,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앞두고 혜령은 두려움에 오소소 떨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잖아. 이번에 떨어지면 정말 앞이 없어.. 돌아갈 곳도 없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나님 도와주세요. 정말 되야 해요. 여기 오게 하신 분도 당신이시고..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매일 밤 혜령이 간절히 하나님께 책임져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혜령은 어쩌면 자신이 하나님의 응답을 오해해서 이곳에 오게 된 건 아닌지 매일 밤 고민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오해해서 온 거면 어쩌지. 그래서 이렇게 계속 떨어지는 거면.. 내가 선택해 놓고 그 분께 그러는 거면..’
 
아침이 밝아왔고, 혜령은 어김없이 출석체크를 하기 위해 학교로 향한다. 푸석한 얼굴을 한 혜령이 집을 바삐 나선다.
 
'잠을 못 잤더라도.. 가야해. 이걸 해서 10만원을 받는 거니까. 이걸로 이자를 내야해..'
 
혜령이 급한 걸음으로 학교로 향한다. 혜령의 빚기다 만 엉킨 머리카락 위의 물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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