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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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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11 -  15. / <연재소설> / <최종수정>


자유 - 11. 치러야할 대가

 
11. 치러야할 대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혜령은 공부에 의욕을 잃었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둘째 관수가 대학에 보내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렸고, 생선 가시를 바르느라 혜령을 신경 쓰지 않던 범수의 얼굴도 떠올랐다. 혜령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혜령은 매일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화장실에 가거나 점심시간 외에는 책상에 팔을 괴고 얼굴을 한쪽으로 뉘었다. 고3 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쉬는 시간마다 혜령에게 왔다.

“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해야지.”

선생님은 혜령에게 영어 문제집을 한권 건넨다.

“이거 출판사에서 보내준 건데. 봐 보렴. 선생님이 보니까 괜찮은 책이야.”
 
“선생님, 어차피 집에서 대학 안 보내 준대요. 학교 갈 돈도 없어요. 어차피 안 될거 노력해야 뭐해요.”
 
“노력하면 하늘도 열리게 되어 있어. 혜령아 눈앞에 있는 것만 해 보렴. 미리 포기 하지 말고.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줄게.”
 
선생님은 혜령에게 쉬는 시간마다 와서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혜령은 책상 위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해봐. 뭐라도. 괜찮아.”

혜령에게 지지대가 되어줄 가족은 없었지만, 마음을 보듬어 주려는 여러 명의 선생님이 계셨다. 그럼에도 혜령의 심장은 매일 더 추워졌다.
 
고등학교 3학년 담당 교무실 안. 수학 선생님이 혜령을 불렀다. 혜령은 반쯤 감은 눈으로 교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넌 과학계통이나 물리, 화학 전부 잘하는 데. 왜 수학이 안 되지?”

긴 생머리를 반으로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선생님이 물으신다. 혜령을 따뜻한 손으로 한참씩 잡아주던 그 과학 선생님이시다.
“하는 것만 보면 딱 이관데. 아. 이상하네.”
 
“잘 모르겠어요. 이과가 맞다고 적성검사에도 나오는데. 수학만 하려면 마음이 어려워져서 잘 안돼요.”

옆에 있던 수학선생님들이 껄껄 웃는다. 고3 담임선생님들이 의자를 돌려 혜령을 바라본다. 두 명의 수학 선생님이 혜령에게 말을 건넨다.

“나중에 수학 잘하는 신랑을 만나면 되지.”

“한번 놓쳐서 그렇지 기초부터 쌓으면 될 거야.”
 
혜령의 어두운 표정에 선생님들의 표정이 머쓱해진다. 혜령은 수학 문제집을 받아들고 교무실을 나온다.
 
“선생님이 수학시간마다 봐 줄게.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거다.”
 
‘안 할 건데요. 수학..’
 
혜령은 지독히도 수학을 어려워하고 싫어했다. 수학을 싫어하게 된 데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머리를 많이 맞아서 머리가 나빠진 게지. 어차피 대학 같은 거 못 갈 텐데..’
 
대학교 입시를 위한 원서 접수기간이 되자 반 아이들이 분주해졌다. 어디에 갈 건지 고민하느라 쉬는 시간마다 대화를 나누고 또 나눴다. 백희는 반이 바뀐 후부터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는지 혜령에게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백희가 점심시간 혜령이 서 있는 줄에 같이 선다.

“나랑 같이 밥 먹어. 너 아니면 나 혼자 먹어야 해.”

“뭔 소리야.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

백희는 혜령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같이 앉아 밥을 먹었다. 백희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괴롭혔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백희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 둔 아이가 얼마 전 학교로 백희를 찾아왔다. 그 날은 백희에게 가장 치욕적인 날이 됐고, 그 이후 아이들은 백희를 피해 다녔다. 아무도 백희와 말을 섞지 않았고, 같이 다니려고 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 백희가 혜령을 찾아온 것이다. 매일 백희는 혜령과 밥을 먹었다. 혜령은 백희를 매우 불편해 했지만, 백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 너 정말 싫어. 왜 너랑 같이 다녀야 해. 그냥 좀 꺼져주라. 니가 생각해도 너무 하다 생각하지 않아? 나는 너 때문에 친구 하나 없는데 니가 이럴 일이야?”

“너 아니면 혼자 밥 먹어야 해서 안돼. 니가 나랑 먹어줘야지. 너 밖에 없잖아.”

혜령은 백희의 뻔뻔함에 웃음이 나왔다.
 
‘니가 그러니까 백희지.’
 
혜령이 적극적으로 백희를 피해 다녔지만, 백희는 더 적극적으로 혜령 앞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러다 새로운 친구를 찾았는지 혹은 먹잇감을 발견했는지 인사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없네.’
 
빈자리가 시원, 쓸쓸하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혜령이 이를 닦고, 손을 씻고 있다.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혜령과 백희가 거울에서 눈이 마주쳤다. 백희는 혜령을 보곤 말을 건냈다.

“씨발, 뭘 꼴아봐?”

혜령은 어이가 없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었다. 분노를 끌어내 혜령도 한 마디 던진다.

“진짜 미친년이네. 정말.”
 
“뭐? 너 뭐라고 했어.”
 
“진짜 미친년이라고”
 
“너 이리 와봐.”
 
혜령은 백희를 뒤로 하고 화장실을 나온다. 가슴이 너무 뛰어 나와야 했다.
 
‘천천히 걷자.’
 
혜령은 어린 시절 욕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그 이후 욕을 하면 어지러움 증을 느꼈다. 머리와 몸을 부여잡고 천천히 화장실을 나왔다.
 
‘쫀 것처럼 보이면 안 돼.’

그 후로 백희는 혜령을 볼 때마다 욕을 해 댔다. 혜령은 백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이 욕하다가 쓰러질 순 없으니.’
 
혜령은 무시하고 백희 옆을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백희에 대한 미움이 점 점 커져갔지만 혜령에게 그 마음을 마주할 기운이 없었다. 주말에 시골에 들어가야 하나 라는 걱정만으로도 백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있을 경희를 걱정했다.
 
‘대학교는 정말 갈 수 없나. 내 인생은 이대로 끝나는 건가. 내가 그렇지. 뭐.’
 
혜령의 마음이 복잡했다. 그럼에도 다른 어려움들을 마주하기에 혜령이 직면한 짐들이 무거웠다. 혜령은 담임선생님이 들고 오신 원서를 채워 대학교에 보냈다. 담임선생님은 원서비를 주시면서 잘 될 거라.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혜령은 드디어 대학생이 됐다.

‘돈 때문에 인생이 거지같았잖아. 나는 돈을 많이 벌거야.’

혜령은 대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시간 열심히 일해서 받는 돈은
1,600원 이었지만, 하루에 꼬박 꼬박 4-5시간 씩 일하면 학교 갈 차비와 김밥 한 줄 사먹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 무렵 시골 농장은 점 점 더 기울어졌고, 결국 폐업을 하게 됐다. 시골 농장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빚쟁이들의 전화가 매일 집에 왔고, 범수는 주마 주마하며 산이든 들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다 아이들에게 만원씩을 나눠주긴 했지만, 대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만원으론 버스비로도 부족한 돈이었다.
 
혜령은 아르바이트 첫 월급을 받아 그럴싸한 옷을 샀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옷 한 벌 살 여유가 없어 교복을 입고 소풍에 갔던 것이 한이 됐다. 혜령이 첫 월급으로 40만원을 받았다는 소식이 시골 가족들에게 알려졌다.
 
“그 년이 돈을 받았으면 동생 빨간 내복이라도 해 줘야 제. 이래서 남의 자식 키워봐야 소용 없당게.”

둘째 관수의 부인이, 한길 엄마의 화를 돋우려는 듯 말을 뱉었다.

“지가 이렇게 우리들이 살고 있는데 속이 있어야지. 들어보니 잘 먹고, 남자도 많이 만나고, 옷도 많이 사고, 엄청 사치스럽다드만.”
 
넷째 인수의 부인인 연기 엄마가 말을 거든다.

“그년이 안 그럴라고.”
 
범수의 부인인 한길 엄마가 화가 끓어 욕을 뱉어내려다 참는다. 세 명의 엄마가 혜령에 대한 주제로 소통과 화합을 이뤄갔다. 그리고 얼마 후 혜령은 범수에 의해 시골로 불려갔다.
 
“이번 주에 꼭 집에 와야 한다. 아빠랑 약속해.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랑게. 안 오면 안 된다.”
 
“아빠, 이번 주에 제가 정말 바빠요. 다음 주에 가면 안돼요?”
 
“이번 주에 가족들 다 모이니까. 안 오면 큰일 나. 알았지? 꼭 오는 거다.”
 
셋째 범수의 말에 혜령은 알았다는 대답을 했고, 가기 싫은 발걸음을 옮겼다. 시골 장터, 관수는 새로운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닭과 오리를 유통하는 일을 했다. 관수가 연 새로운 가게는 살림방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오랜 만에 식구들이 모두 모이기로 했다.
 
혜령이 범수가 알려준 시장터 가게로 들어서자 먼저 나와 있는 관수와 눈이 마주쳤다. 혜령은 방에 들어가 짐을 내려놨다. 방안에 옥석과 현이 엄마, 인수, 인수부인, 춘풍이 앉아있다. 한길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고, 그 앞엔 혜령의 물품들이 가득 부어져 있었다.
 
“여기 앉아봐라.”
 
손가락으로 가운데를 가르키며 관수가 말을 잇는다.

“너 밤마다 남자 만나러 다닌다매? 돈도 물 쓰듯이 쓰고. 내가 다 들었다. 이거 니꺼지 봐라.”
 
넷째 인수 부인은 전 날 혜령과 연기, 경희가 사는 단칸방에 들러 혜령의 물건들을 바구니에 담아왔다.

“제가 언제요? 남자친구도 없는데요? 돈도 없는데 무슨 돈을 물 쓰듯 써요? 누가 그래요?”

“말대꾸 하지 말랬지. 연기도 그러고, 경희도 그러더라. 니가 완전 엇나간다고.”

혜령은 밖으로 나오라는 관수의 말에 따라 나간다. 관수는 칼을 가는 긴 봉을 들어 혜령의 머리를 내려친다.

“이 년이 항상 말대꾸야. 어른이 말하면 잘못 안 했어도 네. 네. 하라고 말했냐. 안 했냐. 가르쳐도 소용이 없어. 어디서 어른 눈을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래? 싸가지 없는 년. 내가 니 년 버릇을 다 고쳐줄 거야.”

관수는 혜령을 때리고 또 때린다. 방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관수를 거들 듯 자리를 지킨다. 범수가 시골 장터 관수 가게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관수는 들고 있던 봉을 내려놓고 범수를 맞이한다.
 
“갔다 왔냐. 내가 이 년 버릇 좀 고쳐주고 있었다.”
 
범수는 혜령을 한번 쳐다보고 방으로 들어간다.
 
“니년은 항상 마음에 안 들었어. 누가 안경 쓰고 다니래? 내가 안경 쓰지 말랬지.”

관수는 더 이상 때릴 이유가 없어지자 아무 이유나 갖다 댔다. 시골 장이 서는 날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사람들 틈에 껴 혜령은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주변 사람들이 서러운 목소리와 눈물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면서 지나간다. 울고 또 울다 혜령은 짐을 챙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옥석, 둘째 관수와 그 부인, 셋째 범수와, 넷째 인수와 인수 부인, 춘풍이 밥을 먹고 있다. 혜령은 짐을 챙겨 버스를 겨우 타고 집이 있는 곳까지 왔다. 도시에 있는 단칸 방에 들어가 혜령은 마침 집에 들어온 둘째 경희에게 물었다.

“너랑 연기 언니가 그랬대매. 어른들한테. 내가 남자 만나고 다니느라 늦게 오고, 돈도 물 쓰듯 쓴다고 했다며. 너도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렇게 말했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언니가 또 늦게 들어오긴 했잖아. 나도 안 챙기고. 청소도 안 하고.”

“대체 그거랑 그거랑 뭔 상관인데. 미안하다고 해.”

경희는 혜령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달 전, 셋째 범수가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방 주인 아저씨가 그러는데 이상한 종교 활동 한다며? 널 봤다던데.”

“교회도 안 다니는데 뭔 소리예요. 경희랑 연기 언니가 다니는 거 같던데. 경희 멀리서 보면 저랑 비슷하대요. 제 옷 입고 다니니까 저로 착각했겠죠. 아마 경희일 거에요. 근데 이상한 종교 뭐요?”

“그러냐. 너는 교회를 왜 안 나가고?”

“나가봐야 뭐해요. 신도 없는데. 뭐 할라고 교회 같은 거 다녀요. 어차피 인생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켜줄 것도 아니고.”

생각에 잠긴 듯, 셋째 범수가 잠깐 동안 대화를 멈춘다.

“그래. 학교 잘 다니고 있고, 아빠랑 곧 보자. 용돈 주러 가마.”

“네.”
 
그리고 한달 후, 연기와 경희의 말을 듣고 셋째 범수가 둘째 관수 집으로 불렀다.
 
범수는 때때로 찾아와 과일을 사주고 용돈을 주고 갔다. 혜령은 범수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혜령이 대학교에 가자 범수의 아내는 결국 옥석을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로 나갔고, 옥석은 또 집에 혼자 남았다. 그래서 셋째 범수는 혜령에게 올 때마다 시골에 혼자 남은 옥석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셋째 범수가 찾아올 때마다 혜령의 어깨가 움츠려졌다.
 
혜령은 학교 생활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몸이 많이 아파졌다. 더 이상 몸이 움직여지지 않자 드디어 병원에 갔다.

“당장 입원해야할 거 같은데. 어떻게 걸어 다니고 있어요. 척추 쪽으로 대상포진이 와서.. 엄청 힘들 거 같은데.”

“엇. 이번 주부터 중간고사라 입원 안돼요. 약 먹으면서 안 될까요? 시험도 봐야하고, 아르바이트도 가야해요.”

“약을 주긴 할 건데. 엄청 힘들 거예요. 진통제 세게 줄 테니까. 너무 힘들면 꼭 다시 와야 해요.”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온 혜령이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 샀다.
 
‘악착같이 살아 남아야해. 어차피 죽어봐야 남 좋은 일만 하는 거지.’
 
혜령이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학교에 갔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학교 근처에서 전단지를 돌렸다. 전단지를 돌리는 일은 아르바이트 중 수익이 가장 좋았다. 한 시간에 무려 2500원을 받았다. 4시간 꼬박 하고나면 손에 만원이 생겼다. 혜령은 돈을 받으면 집에서 굶고 있을 경희를 생각해 만원 피자를 들고 집에 갔다. 경희가 맛있게 먹을 걸 생각하면 없던 기운이 솟았다.
 
그 즈음, 넷째 인수의 딸 연기 언니는 경희를 이상한 종교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연기와 경희는 둘만의 일기장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일기장엔 작은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경희가 연기 언니를 따르는 것이 좋아 보여 혜령은 궁금했지만 내버려뒀다. 혜령이 집에 오면 연기와 경희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언니가 나를 안 챙겼으니까.”
 

그래서 경희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자유 - 12. 신에게 가는 길

12. 신에게 가는 길
 
침대에 앉은 혜령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대상포진으로 몸이 아파 걷기가 어렵게 되자, 혜령은 신에게 기도했다.
 
‘있으시다고 하니 말이나 해볼게요. 몸이 좀 낫게 해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너무 아파요.’
 
그 무렵, 넷째 인수의 딸 연기와 산돌의 둘째 경희는 매일 성경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경희의 얼굴이 밝아져가는 것을 보고 혜령은 신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성경 공부를 마친 후 돌아온 경희가 교회 사람들이 너무 좋다고 혜령에게 한참 풀어 놨다.
 
“우리 전도사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몰라. 교회 사람들도 너무 따뜻하고 가족 같아.”
 
혜령은 경희의 얼굴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힘이 들면 혜령은 자주 교회에 들러 한참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래, 이참에 교회에 다시 나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 생각을 하자 심장이 쿡쿡 아프기 시작했다.

‘하나님, 당신이 있다고 생각 안 해요. 그래도 혹시 살아 계시다면 제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제 인생이 행복해지도록 도와주세요.’
 
혜령은 기도 내용에 풋 하고 웃었다.
 
학교 교실 안, 교수님의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혜령은 잠깐 졸다 끝날 무렵 잠에서 깼다.
 
“조 모임 만들어서 발표할거에요. 다들 조를 이뤄서 주제를 선택한 후 제출하세요.”
 
웅성 웅성. 네 다섯 명이 팀을 만들어 교수님께 제출하고 나가는 모습을 혜령이 바라본다.
 
‘아, 나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혜령은 자리에 남아 주변을 둘러본다. 그때 여자아이 한 명이 혜령에게 다가온다.
 
“안녕, 나는 자영이야. 민자영. 조는 만들었어? 없으면 내 조에 너도 들어올래? 딱 한 명 비었거든.”
 
“아.. 응. 고마워.”
 
“이름이 뭐야?”
 
“혜령. 김혜령이야.”
 
혜령이 수줍게 웃어 보인다. 종이에 혜령의 이름을 적은 자영이 교수님께 종이를 제출한다. 교수님이 나가고 자영은 자리에 앉아 무엇인가 적고 있고, 그 곁으로 해령이 다가간다.
 
“나 나갈 건데. 넌 어디로 가? 밥은 먹었어? 저기 학교 앞에 닭 잘하는데 있는데 먹으러 갈래?”
 
닭이라는 말에 혜령이 잠시 머뭇거린다.
 
“어차피 나도 밥 먹어야 하고. 닭튀김이 대충 먹기 좋잖아. 가자. 내가 살 게.”
 
닭튀김 이야기를 하며 자영이 입맛을 다신다. 자영은 마지막까지 남아 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책들을 챙겼다, 교실 앞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끄고 나가던 자영이 혜령을 돌아본다.
 
“너 남자친구는 있어? 잠은 자 봤고?“
 
“어?”
 
자영의 눈빛과 목소리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엇인가 있었다. 자영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그런 자영의 눈을 보다 고개를 숙인 혜령의 얼굴로 자영은 고개를 숙여 혜령의 눈을 바라본다.
 
“너, 사람 눈 잘 안 보는구나?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을 못 믿어. 그러니까 너도 당당하게 사람 눈 보면서 이야기해.”
 
“아.. 응”
 
혜령이 다시 고개를 들어 자영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의 자영이 혜령의 손을 잡아끈다.

"통닭은 역시 언제 먹어도 맛있지. 여기 진짜 찐 맛 집이야. 여기 와 봤어? 나는 선배들이랑 왔었는데 정말 놀랐어. 닭은 정말 주는 게 많지 않아?"

자영이 혜령에게 한참 닭 이야기를 하더니 묻는다.
 
“근데 넌 매일 혼자 다녀? 하늘만 보고 걸어 다니길래. 하늘에 뭐 있나 하고 나도 몇 번 봤다. 뭐 하나도 없드만.”
 
혜령은 그제야 자영에게 이야기를 쏟아낸다. 감정의 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눈과 코에 물들이 번졌다. 자영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망울로 혜령을 바라본다.
 
“넌 근데 예쁜데, 착한 것 같네. 원래 예쁜 애들은 예쁜 걸 이용하면서 살던데. 넌 좀 다른 것 같아. 오늘부터 우리 친구하자. 친구. 자주 보자. 내가 닭 살게.”
 
친구라는 말에 혜령이 왈칵 울음을 쏟아낸다. 자영은 학교에서 유명하고 유망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영어 회화, 글쓰기, 토론 대회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아이였다. 자영은 서울권 대학을 포기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왔다고 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자영에게 이곳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자영은 천천히 혜령에게 언니가, 친구가 되어줬다.

“자영아,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집이 넘어 간다고 사채 빚 좀 써 달래. 키워주신 아빠가 날마다 전화해서 갚을 건데.. 왜 안 해주냐고 하셔서..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키워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자꾸 그러시는데 마음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해야겠지?”

"키워준 거랑 사채 빚 써주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그럴려고 키워줬대?
어이없네. 난 솔직히 니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정말 너를 생각해서 말하는데. 니가 사채 빚 써주고 나면 너 인생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니까. 하는 말인데. 너 사채 그거 해주면 나랑 친구 안 할 줄 알어. 그런 마음으로 거절해. 거절이 안 되면 전화번호를 바꾸고. 잠수를 타든지."

자영의 언성이 높아졌다. 혜령을 한참 나무랐지만 혜령은 자영의 말들이 고마웠다.

"근데, 마음이 너무 무거워. 무섭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몇 천이나 되는 거 같은데.. 시골 집이 넘어간대.. 갚는 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어. 너 그거 절대 안돼. 난 너 망가지는 거 못 봐."

저녁, 범수가 혜령에게 전화를 건다.

"그거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냥 가서 해주면 내가 알아서 갚으마. 어려울 때 도와야지. 니가 살던 집이 넘어가는 거야."

범수의 전화를 받고 혜령이 범수의 아내 한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가 자꾸 사채빚을 써달라는데. 엄마가 좀 막아주시면 안 될까요?”

“나도 몰라. 나한테 이야기하지 마라. 나도 복잡하니까.”

뚜뚜. 전화가 끊기자 혜령이 망연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그래 세상에서 나를 유일하게 위해 주는 자영이 안 된다면 안돼. 이걸로 자영이를 잃는다면 나는 하나 뿐인 친구를 잃는 거야.’

혜령은 결국 범수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화를 받지 않자 며칠 후 범수와 관수의 아들 현이 혜령을 찾아왔다.
 
“가서 찍기만 하면 돼. 아빠가 갚는다는데. 딸이 되가지고 어찌 그럴 수가 있냐. 아빠가 얼마나 너한테 잘해 줬는데. 니가 그러면 안 되지.”
 
혜령은 결국 사채사무실에 관수의 아들과 방문한다.
 
사무실 안,
 
“여기 서류에 쓰시면 되요. 여기 생년월일이랑. 쓰시고.”
 
사각 사각. 적는 소리.
 
“아직, 생일이 안 지났네요. 그럼 미성년잔데. 지금 빌리시면 사백만원 밖에 못 빌려드려요. 법이 그래요. 한 달 뒤에 오면 사천만원까지 바로 해 드릴 수 있어요. 어떡 하실래요?”
 
사무실의 실장이라는 사람이 범수와 관수의 아들 현이를 번갈아 본다.
 
“혜령아 일단, 오늘은 그냥 가고, 한 달 뒤에 다시 오자.”
 
셋째 범수의 말에 혜령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집으로 온다. 한 달 뒤 날짜가 되자 범수의 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혜령은 범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혜령은 매일 범수가 올 것 같은 시간을 피해 집에 들어왔다 빠르게 나갔다. 혜령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너 호적에서 파버릴 거니까. 그리 알아라.⌟
 
그날부터 범수와 혜령은 연락하지 않았다. 범수는 더 이상 혜령에게 아빠가 아니었다. 문자를 본 혜령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콱 죽어버려.’
 
범수는 혜령에게 마지막 문자를 남기고 연락을 끊었다.
 
자영은 큰 꿈이 있었고, 그 때문에 대학을 남들보다 빨리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이 나라를 바꾸는 사람이 될 거야.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합격하고 올게.”

자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집이 어려웠던 자영은 몇 년 안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다짐하듯 말을 내어놓고 서울로 갔다. 혜령은 자영이 하는 일은 반드시 될 거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기도해줘. 너 기도는 하나님이 잘 들어주실 거 같아.”

자영의 말에 혜령은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혜령이 경희에게 물었다.

“너 요즘 교회 다니지? 열심히 다니는 걸 보면 정말 좋은 교횐가봐. 나도 데려가면 안돼? 나도 교회에 다녀야 할 거 같은데.. 기도할 것도 있고."

“아, 언니 내가 알아볼게. 우리 교회는 막 아무나 올 수 있는 데가 아니라서.”

‘요즘엔 교회에 다니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구나.’

그 날부터 혜령은 주변 교회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십자가가 걸린 교회를 찾아보니 주변에 정말 많았다. 십자가만 걸려있으면 들어가서 예배를 들었다. 예배를 드린 게 아니라 한참 듣다 나왔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왔다.
 
‘좋은 교회에 다녀야 기도도 들어주실 거야. 자영이가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려면 좋은 교회에 가야지.’

혜령은 눈에 보이는 교회 마다 들어갔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지 못했다. 괜찮다 싶으면 헌금 바구니가 돌려졌다. 매주 일요일이면 다음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저울질 했다.
 
‘이상한 곳이네. 대체 정체가 뭐야?’

교회마다 설교도 사람들의 느낌도 모두 달랐다. 경희가 혜령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동안, 혜령은 작은 교회를 골랐다. 그리고 새벽 예배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님, 솔직히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도 모르겠고, 하나님이 살아계셔도 절 도와줄 거라는 생각 안 해요. 뭐, 지금까지 그랬으니까요. 근데요. 자영이는 하나님을 정말 열심히 믿어요. 좋은 일도 많이 하고요. 그 아이는 정말 우리나라를 바꿀 아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그 아이의 앞길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생각나시면 저도 좀 도와주시고요.’

혜령은 조금씩 기도를 늘려갔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날마다 일어나 하루 세장씩 말씀을 읽고, 학교에 나갔다. 하루라도 빠지면 자영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어느 날 자영은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령아, 나는 너가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 학교에 근로 장학생 자리가 났다니까.
거기 들어가서 일하면서 공부 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아르바이트 하고 돈을
벌려고 해도 우리는 부자가 될 수 없어. 공부를 해서 자리를 잡아야 해. 난 너가 공부를 해서 더울 땐 시원한 데서 일하고 추울 땐 따뜻한 곳에서 일하게 되면 좋겠어. 어떤 공부를 할지도 생각해봐."

자영의 말에 혜령은 학교로 돌아왔다. 자영과 대화한 다음부터 혜령의 기도 제목도 늘었다.

‘하나님, 당신이 날 도와주지 않으신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그래도요. 당신이 살아계신다면 당신이 느껴지도록 제 삶에 표지들을 주세요. 그리고 제가 무엇을 해야할지도 알려주세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고 초월하시는 분이 잖아요.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제가 가장 기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그리고 사람도 붙여주시고, 정확한 표지를 주세요.’

혜령은 날마다 새벽예배에 나가 기도했다. 그리고 자영을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으니까.’


자유 - 13. 응답

13. 응답
 
혜령은 그동안 했던 아르바이트를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 근로장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교 근로 장학생 자리는 자영과 친분이 있는 조교님이 계신 곳이었다. 근로 장학생이 하는 일은 간단한 문서 작업과 정리, 청소였다. 조교님은 혜령이 공부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도움을 주셨다. 덕분에 혜령은 드디어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학교 성적이 조금씩 안정 되어가자, 공부에 자신감이 생겼다. 시간이 생기면 혜령은 근로 사무실에 앉아 공부를 했다.
 
근로 사무실 안에는 다양한 고시 정보들이 담긴 종이 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정리가 되지 않아 쌓여있는 종이들이 사무실을 지저분하게 보이게 했다. 혜령은 조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종이더미들을 정리했다. 족히 10년은 넘었을 것 같은 책, 문서들과 최근 문서들이 마구 뒤 섞여 있었다. 하나씩 순서대로 나열해 책장에 넣었다.
 
한참 정리를 하던 혜령의 눈에 아동법률 판사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아동법률지원 판사가 된 이유와 하는 일을 담은 글이 눈앞에 펼쳐졌다. 혜령은 종이를 펼쳐들고 한참 바라봤다. 아동폭행, 아동성추행, 아동 보육 문제 등 아동들을 위해 이뤄지는 법률서비스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글을 쓴 저자가 아동법률 전문가가 된 이유도 담겨 있었다. 눈에 담긴 글들을 한참 바라보던 혜령의 얼굴이 붉어졌고,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그날부터 혜령은 성공한 사람들의 수기가 담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다독가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 이 사람들처럼 나도 뭔가 해 보자.’
 
혜령은 도서관에 들러 성공학 책들을 모조리 빌려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아동 법률가라는 단어를 발견하자 혜령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동 폭력, 아동 성폭력, 버려진 아이들. 그 아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장치. 혜령의 눈과 마음에 아동 법률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왔다.
 
‘법학. 내가 할 수 있을까. 돈도 많이 든다던데. 이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나는 안 될 거야.’ 혜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새벽 4시 교회 안,

예배를 기다리며 혜령이 성경을 읽고 있다. 혜령은 우연히 기드온이라는 인물이 적힌 사시기서를 펼쳤다.
 
<사사기 6장 33 – 40>
 
33 그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하나님의 명령에 기드온은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안 된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할 수 있음을 표지로 보여 주셨다. 혜령은 성경을 읽고 기드온처럼 하나님이라는 신께 부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혜령은 하나님께 기드온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그래, 기드온도 하나님께 표지를 요구했지. 확실한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하자.. 하나님, 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법률가가 맞다면 제게 표지를 주세요. 그리고 이게 아니라면 다른 길로 이끌어주세요. 제 앞길을 열어주세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혜령은 어쩌면 성경 밖에도 있을지 모를 신에게 기도 하고 또 기도했다.

‘일단 저는 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학교에 아는 교수님도 없고,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알려줄 사람도 없어요. 주님께서 등불 같은 교수님을 보내주세요. 그리고 자영이 합격하게 해주세요. 솔직히 자영처럼 주님 사랑하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그 친구가 시험에서 떨어지면 제가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일단 자영을 합격시켜주신다면 그것도 주님의 표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혜령은 마음먹은 김에 온갖 이유들을 붙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들어줄리 없어. 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도 어쩌면 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차피 혜령은 잃을 것이 없었다.

그 무렵, 혜령과 경희는 드디어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덕분에 혜령의 학교생활이 더 편해졌다. 집에 도착한 혜령을 경희가 불렀고, 혜령에게 말씀을 배워보자고 말을 꺼낸다.

“말씀을 배우고 나서 갈 수 있는 곳이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말씀을 제대로 배운 후에 교회에 오면 언니도 좋잖아. 우리 전도사님 훌륭하신 분이야. 제대로 가르쳐 주신대. 알고 배운 후에 교회 다니면 더 은혜도 되고.”

“근데 나, 교회 다니고 있어. 거기 안 다녀도 돼. 요즘 성경도 많이 읽고, 공부도 해. 요즘 시간도 없고 너무 바빠. 나 말고 다른 사람 가르쳐 줘도 된다고 말씀드려줘.”

“이미 전도사님한테 다 말해놨어. 언니가 안 된다고 하면 내 얼굴이 뭐가 되겠어. 어떻게 그래. 언니가 만나기라도 해. 내가 어렵게 말해 놓은 거니까. 만나기만 하면 안 될까?”

경희의 부탁에 혜령은 그러마 하고 약속한다. 경희는 진리가 있는 곳이라며 한참 떠든다.
 
‘진리가 있는 곳이 따로 있나?’
 
혜령은 신이 나서 떠드는 경희의 얼굴이 꽃처럼 가득 피어나는 게 신기해 한참 바라본다. 풀벌레들이 깊은 저녁을 알리며 울음을 토해낸다.

혜령과 경희는 자주 다퉜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주는 법을 몰라서였을까. 경희의 성경 이야기를 들을 때 외엔 둘은 항상 날이 서 있었다.

“야, 뻔히 내가 입으려고 걸어놓은 걸. 왜 니가 입고 나가는 거야. 니 것도 아니잖아. 너 일부로 그러는 거지?”

“치사하게 언니가 뭐 그래. 그리고 난 몰랐지. 언니가 입을 라고 하는지. 말하지
그랬어? 입을 거라고.“

“빨리 들어오라고. 대체 이게 몇 번째야. 한 두 번이면 이해라도 하지. 이게 열 번도 넘어. 너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언니는 교회도 다닌다면서 더럽고 치사하네. 동생이 그럴 수도 있지.”

혜령과 경희는 매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싸움이 끝날 생각 없이 계속 이어지자 혜령은 경희에게 나가버리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들은 경희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갑자기 눈알만큼 굵은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혜령은 가슴이 철렁했다.
 
「마태복음 5장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하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갑자기 성경 구절이 떠오를 건 뭐람.’
 
혜령은 벌을 받은 것 같아서 기도 하고 또 기도한다.
 
‘혹시 경희가 다치진 않았겠지? 경희한테 괜히 소리 지르고 화내서 그런가. 하나님 죄송해요. 이젠 동생한테 안 그럴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경희와 혜령은 자주 싸웠고, 그러면서 조금씩 정이 들어갔다. 어릴 때 건너 뛴 기간을 이제야 겪는 것처럼 치열하게 다투고, 산뜻하게 화해했다.

‘그래, 같이 자라지 못했으니 싸우는 게 당연하지. 내가 조금 더 아량이 넓으면 좋을텐데.’

혜령은 화를 내고 나면 미안함을 더 많이 느꼈다. 혜령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내가 언니니까. 성숙하게 행동해야 해.’

자영의 합격 발표 하루 전 날이었다. 자영은 갑자기 서울에서 내려왔다며 전화를 해 왔다. 전화기 너머 자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있다.

"우리 집은 화장실도 밖에 있고, 씻는 것도 불편할 건디.. 괜찮겠어?."

"불안해서 그래. 내일 1차 발푠데.. 만약에 떨어지면 니가 나 다 받아줘야 해. 마음이 좀 그렇다. 집에 가기도 좀 그렇고.. 시험은 봤는데.. 준비도 계속 안 됐고.. 오늘은 네 집에서 자고 갈게.“
 
“응, 언른 와. 내가 다 받아줄게. 괜찮을 거야.”
 
자영과 혜령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밀린 이야기를 나눈다. 그날 밤 혜령은 자영이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될 거라고 혜령은 간절히 신에게 마음을 올려드렸다.
 
다음 날, 집에 돌아간 자영이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령아, 나 됐어. 됐어. 1차 됐어. 그래서 지금 서울 다시 올라가.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어. 마지막에 시간이 부족해서.. 열 문제를 찍었는데 그게 전부 정답이 돼서 합격했어. 신기하지. 너무 신기하고 너무 감사해. 나 지금 올라가. 기도해 줘서 고마워.”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잘 됐어.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요. 하나님..’
 
그 이후 혜령의 학교 생활이 계속 됐고, 혜령은 기존에 일하던 고시원 근로 장학생에서 일반 대학 근로 장학생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고시원에서 모시던 조교님이 일반 대학 조교자리로 옮기시며 혜령을 데려갔다. 고시원에 있는 신문들을 읽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볼 때마다 혜령은 부러움과 선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단한 사람들이겠지. 집 안도 좀 살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 일거야.’

사법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혜령이 법과 대학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 이수해야할 법학 학점이 있었고, 영어 공부도 해야 했다. 혜령은 법학 수업을 이수하면서 교수님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적으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본 교수님이 혜령을 교수실로 부르셨다. 혜령은 교수님이 몇 번 불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수업이 끝나자 교탁에서 서 있던 교수님께서 혜령의 이름을 불렀다.

“학생, 자네 공책을 내 책을 쓰는데 참고하고, 싶은데 볼 수 있을까?”

“네, 좋아요. 별거 없긴 한데요. 여기요.”

“학생은 뭘 하고 싶은 건가? 남은 얘기는 교수실에서 마저 하지.”
 
교수님의 부름에 바로 혜령이 교수님을 따라 교수실로 들어간다.

“잘 모르겠어요. 고시 공부를 하고 싶은데.. 집도 어렵고.. 아직 생각 중이예요.”

“여기 일본에서 로스쿨 나온 여자 이야기가 있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결국 변호사가 된 사람이거든. 한번 읽어보면 좋을 거 같네. 다음에 공책을 돌려받을 때 책을 천천히 돌려주면 되네.”

“고맙습니다. 교수님.”

교수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혜령은 교수님이 주신 책을 들고 교회로 간다. 교회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교회에서 책을 보면 잘 외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혜령은 교수님이 빌려주신 책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창문에 걸려있던 해가 어느새 사라지자 혜령은 책을 덮고 집으로 향했다.

‘그래. 나도 혹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혜령은 교수님께 책을 돌려드렸고, 짧은 편지를 드렸다.
 
교수님 덕분에 좋은 사람 이야기를 봤고, 덕분에 마음을 먹었다고 적었다. 고시 공부를 시작할 거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가겠다고. 은혜 잊지 않겠다고. 교수님은 편지를 읽은 후 다시 혜령을 불렀다.

“자네가 준 편지를 잘 봤네. 자네가 의사가 된다고 하면 나는 그 분야는 모르네. 그래서 도와줄 수 없어. 그런데 자네가 법학을 공부한다면 내가 자네의 앞길에 방향을 제시해주는 등불이 되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괜찮은가?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공부해야할지 내가 알려주고 싶네. 잘 생각해 보게.”

혜령은 놀랐다. 기도내용을 교수님께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교수님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돼서.. 다시 말씀 드려도 될까요?”

교수님은 책상 위에 쌓아둔 책 몇 권을 집어 혜령에게 건넸다. 그리고 앞으로 이수해야할 과목들을 알려줬다. 교수님은 대학 3학년이기 때문에 고시를 위한 학점 이수는 본교에서는 불가능하다 말했다. 그는 타 대학에서 계절학기로 이수 과목들을 이수할 수 있다고 듣고 오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혜령은 기도 후 타 대학에 가서 학점을 채우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혜령은 타 대학에 가야할 차비와 기숙사 비를 달라고 기도했다. 어차피 주님께서 가라는 길이시면 열어달라고 말이다. 계절학기 준비를 위해 혜령은 정지했던 핸드폰을 살렸다. 그리고 이수해야 할 과목들과 준비할 것들을 알아봤다.

몇일 후, 산돌이 혜령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너 통장으로 50만원 넣었다. 그걸로 너 필요한데 써라."

"아. 아빠 안 그래도 대학교 계절학기 수강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너무 감사해요. 고마워요. 아빠."
 
생각하지 못한 돈이 산돌에게서 혜령에게 전해져 왔다. 혜령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혜령이 계절학기를 이수하기 위해 다른 대학교로 출발했다. 계절학기를 이수하던 중 교수님으로부터 책이 도착했다.

“이 책이 필요할 거네. 우편으로 보내니. 잘 보고 나중에 학교에 다시 반납하면 되네.”

짧은 편지와 책이 도착했다. 혜령은 편지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자유 - 14. 너는 몰랐지?

14. 숨겨진 이야기

첫째 산돌이 출소한 후, 그의 사업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산돌과 일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았고, 사업이 번창하는 동안 돈을 빌려갔던 친구들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예전을 생각하니 들어오는 돈이 적게 느껴져 초라했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밤이면 한잔 두잔 술을 마시게 됐다. 술은 산돌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줬다.

산돌은 거나하게 술에 취하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전화를 걸어댔다. 범수도, 한길 엄마도, 관수도 예외는 없었다. 취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낼 상대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혜령이냐. 너 잘 사냐. 니 엄마가 너 때문에 죽은 건 아냐. 결혼하기 전에 점쟁이
놈이 니 엄마한테 나랑 결혼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니가 딱 그 사주팔자여. 계모 밥 먹고 돌아다닐 팔자. 니 엄마 안 죽을라믄 받은 이름으로 올렸어야 했는데.. 범수가 아무거나 올려 가지고.. 니가 하필 하늘이 내린 명이라, 엄마가 대신 죽은 거다. 너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야. 알고는 있냐..”

“.......”

혜령은 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혜령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니, 혜령은 너무 놀라 가슴이 답답했다.

“대답을 해야지. 대답을.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네. 라고 이야기 하는 게 어른에 대한 예의야. 니 엄마가 나랑 결혼하기 전에 죽을 걸 먼저 알아 가꼬. 나랑 혼인신고도 안하고.. 나중에 죽고 나서 정리 할라고 봉께.. 농에 혼인신고서가 있더라. 그래서 내가 여직 총각잉께. 너를 범수한테 보낸 건디.. 잘 한 건지 모르것다.”

산돌은 매일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혜령은 산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유일하게 딸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야. 너랑 나랑 참 안 닮았어. 니 엄마가 결혼 전에 엄청 이뻤는데. 따라다니는 놈이 많았거든. 그 놈들 중 하나인지 모르지. 아무래도 이상해. 너 유전자 검사 해 봐야 것어. 알았냐? 몰랐냐? 나랑 니 할아버지도 같은 핏줄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랑 나랑도 같을 리가 없지. 니 할아버지가 내 아빠가 아니라고. 이 말은 처음하지? 내 엄마가 그래가지고 나를 어릴 때 안 키워주고 외가 집에 보냈어. 갑자기... 그리고 거기서 사는데.. 나는 맨날 밥상을 따로 주는 거야. 아무도 나랑 이야기도 안 하고. 그래서 내가 밥상을 엎어 불었지. 그 담부터 외할아버지가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하더라.... 흐흐흑. 그 날은 할매랑 엄마가 아침부터 씨암 닭도 잡아주고 엄청 잘 해주는 거야. 그걸 양껏 먹고 기분이 좋았지.. 제삿 밥인 줄도 모르고. 듣고 있냐? 그래 가지고 개울가로 가자고 항께. 내가 따라갔지. 그때가 세살 쯤 됐을라나. 글더만 할매랑 엄마가 나를 양 쪽에서 잡더니 물에 얼굴을 처박는 거여. 죽어라고 발버둥 치고 하는데 안 놔주는 거지. 그때 물을 많이 먹었어. 엄마가 나를 죽일 라고 한 거제. 내가 아버지 친 아들이 아닝께. 적당히 아파서 죽었다 할라고 했던 거지. 그러니까 그날따라 닭도 잡아주고.. 잘해주고. 그게 내 제사 밥이었던 거제.. 근데 내가 죽을 리가 있냐.. 그 날부터 산 사람처럼 보지도 않고, 엄마가 돌아봐주지도 않고.. 이 말은 내가 또 처음하지? 내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거든. 얼마 전부터 갑자기 3살 때 기억이 너무 선명 해 지는 거야. 그러니까..너무 억울한 거지..”

산돌은 밤마다 같은 이야기를 혜령에게 하고 또 했다. 그럼에도 산돌의 응어리는 풀어지지 않았다. 산돌은 날이 갈수록 술 양이 늘었고, 일을 자주 나가지 않았다.

“너는 교회 안 다니지? 니 엄마 살아있을 때 내가 그렇게 교회 가지 말라고 때리고 했는데 그래도 니 배에 담고 교회 다니고. 니 나와서는 손 잡고 교회 다니고. 긍께 내가 안 때릴 수가 있어야제. 그 놈의 신이 어딨다고. 신이 있으면 니 엄마 그렇게 허망하게 갔것냐? 교회 다니지 마라. 내가 성경 그거 다 읽어봤는데 거짓말이여.”

산돌과 혜령의 대화가 계속되자 혜령의 마음이 점 점 어두워졌다.

‘나도 신 따윈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혼자 살아가도 힘등께. 없는 거 보다야. 신이라고 생긴 거라도 믿고 같이 가는 게 낫지.. 내가 뭐 붙잡을 게 있다고.’

혜령은 신이 있건 없건, 일단 신이라는 존재에 기대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산돌은 마음의 병이 점 점 깊어졌고, 일하러 나가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러자 성철 엄마가 매일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국 혜령은 핸드폰 요금을 내는 것이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핸드폰을 정지했다. 그리고 가끔 공중전화로 산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잘 지내시죠? 이번 어버이날에 갈게요.”

“이번 어버이 날에는 집에 오지 말고.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거든. 거기가 니 엄마 될 겅게. 거기 가서 인사하고 와라. 그게 니가 효도하는 거다. 갈거지? 꼭 가야한다. 약속해. 선물도 꼭 들고 가고.”

혜령은 계절학기 수업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학기를 준비했다. 조금씩 꿈과 가까워지자,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솜털처럼 가벼운 몸에 기운이 났다. 가진 것은 적었지만, 꿈 하나 붙들고 사는 삶은 매우 넉넉한 마음을 줬다. 혜령이 일하는 곳의 조교가 혜령의 꿈 이야기를 듣고 법학실의 조교님을 소개 해 줬다. 그리고 법학 조교에게 혜령을 잘 부탁한다고 부탁까지 드렸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은 혜령은 신의 존재가 성큼 성큼 믿어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대가없이 받았던 사랑이, 은혜가 있었던가.

마지막 필요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 혜령은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들었다. 채권법 총론, 멋쟁이 교수님이라고 소문난 분의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남들이 잘 입지 않는 와인색 바지도 소화해 내는 멋쟁이 신사였다. 채권법 수업의 시험을 보기 위해 혜령은 집에서 책을 펴들고 앉았다. 열번 읽고 다시 생각해보자.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혜령아, 언니야. 언니.”

“누구세요?”

“언니 몰라? 나 은성이. 관수 아빠 딸 !”

‘아 은성 언니구나.’

"응, 언니 무슨 일이야?"

"너가 생각나서. 너 만나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은성언니였다. 은성언니는 둘째 관수와 달리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언니는 고등학생 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아이를 임신했다. 혜령은 언니가 임신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집을 나갔다는 소식만 들었었다. 아이를 낳은 언니는 결혼식 없이 남편과 살림을 시작했고, 그 사이 아이를 한 명 더 낳았다. 그 언니가 혜령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언니, 우리집 좁아서 불편할 텐데. 괜찮을까. 내가 지금 시험기간이라 공부도 하고 있고..”

"응, 잠깐 있다가 갈 거니까. 괜찮아. 너 방해 안 하구 얼굴만 보고 갈게."

두 아이를 데리고 은성언니가 도착했다. 방문을 열자 큰 아이가 뛰어 들어온다. 활짝 웃는 은성언니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아이들은 침대 위에 올라가 방방 뛰었고, 은성언니가 있는 책상 혜령의 근처로 다가왔다.

“잘 지냈지? 안 그래도 너 소식 궁금하기도 하고. 잘 지내나 싶고.. 알다시피 우리 아빠가 너 참 못 살게 굴었잖아.. 그래서 내가 마음이 쓰였어.”

은성언니는 둘째 관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언니는 팔을 들어 혜령의 손위로 손을 겹쳐 올렸다. 어릴 때 봤던 은성 언니는 참 많이 말라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이 말라 있었다.

“내가 너 주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언니는 자신이 골랐다며 꽃이 가득 들어간 블라우스를 내민다.

“예쁘지. 내가 기다리는 걸 못해서. 비싼 데도 매장서 샀어. 요즘은 인터넷 구매도 많이 한다는데 나는 그 하루를 기다리기 힘들더라.”

은성언니는 한참 블라우스를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혜령에게 밖에 나가자고 이야기 한다.

“맛있는 거 먹자.”

“언니, 내가 내일 정말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밖에 못 나가. 먹는 건 다음에 하자.”

“응 그래. 지난주에 시골에 가족들이 모여서 내가 거길 갔거든. 다들 있더라고. 할아버지, 셋째 아빠랑, 넷째 아빠랑, 삼촌도 있었어. 엄마들도 있고. 오랜 만에 아이들 데리고 인사라도 할까 싶어 갔지. 근데, 우리 아빠가..정말 .. 나쁘다는 걸.. 알았어. 령이 네가 다섯 살에 시골에 왔을 때, 아빠가 너 죽일라고 뒷 산 개집에 넣어 놓고, 물도 밥도 안 주고 일주일 가둬놨었대. 그리곤 한다는 말이 다시 돌아가도 반드시 널 죽일 거라는 거야. 그 말을 사람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하는데 너무 화가 나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근데 아무도 암 말도 안 하고.. 일주일 지나고 나서도 살아있어서 꺼내왔대. 근데 그 말을 너무 태연하게 하는 거야. 대체 너가 뭘 잘못했다고. 난 아빠가 도대체 이해 안 돼.”

혜령은 때때로 꿈 속에서 어딘가에 갇혀있는 꿈을 꿨다. 그리고 밤이면 누군가 와서 불빛을 비춰 혜령을 확인했다. 그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또 꿨다. 작은 개집. 어두운 밤, 누군가가 비추는 불빛. 그것이 실제였다는 걸 알게 된 혜령이 복 박쳐 울기 시작했다.
 
‘지웠던 기억을 꿈은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던 게구나... 아니 사람들이.. 어떻게 그래.’

작은 방. 가운데 미닫이 나무문을 닫은 혜령이 둘째 관수의 딸 은성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 나 공부 좀 할게. 아이들이랑 좀 놀아.”

미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혜령이 꺼이 꺼이 눈물을 쏟어냈다. 목이 메여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래. 내가 반드시 공부해서 성공할테야. 원래 최고의 복수는 행복해지는 거라잖아.’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다. 혜령의 눈과 코가 벌겋게 부어있다.

“집에 어머니랑 언니가 계셔서 가봐야 해. 내일 시험 잘 봐. 우리 다시 또 보자.
언니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아빠 생각하면 내가 항상 미안해..”

언니를 보내고, 혜령은 마저 책을 읽었다. 글자들이 흐려서 눈에 담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혜령은 시골 가족이라고 불렀던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혜령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간절히 가족이 되어 달라 기도했다.
 


자유 - 15. 선택

 
15. 선택
 
새벽 예배가 끝난 후, 혜령이 한참 앉아 십자가를 바라본다. 혜령의 곁으로 짧은 머리에 고운 파마를 한 목사님이 다가온다. 목사는 혜령의 곁에 앉아 혜령의 손을 감싸 쥔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제가 같이 기도할게요. 예쁜 자매님이 새벽마다 우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아프네.”
 
“별일은요. 목사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름이.. 혜령이라고 했던가. 혜령이는 참 곱고 이뻐.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하나님께 전부 올려드리면,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께서 전부 책임지실거야. 같이 기도할게.”
 
“네, 감사해요.”
 
여자 목사는 혜령에게 자주 연락을 했고, 안부를 물었다. 혜령이 편안하게 마음을 내어 놓을 때까지 천천히 혜령에게 다가갔다. 혜령에게 반찬을 만들어주고, 고민을 들어줬다. 혜령은 목사를 엄마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혜령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가족이야. 나는 혜령에게 엄마고, 가족이고, 친구야. 그러니까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엄마, 저 이제 외롭지 않아요. 하나님도 제 기도 잘 들어 주시고, 성경 읽는 것도 재밌어요.”
 
“그래, 하나님께 그 분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같이 기도하자. 사랑하는 마음도, 믿음도 그 분이 주시는 거란다.”
 
“엄마, 저 열심히 살고 싶어요. 열심히 할게요. 기도도, 공부도, 성경 읽는 것도요.”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뜨겁다. 엄마 목사님은 한참 소리 내어 선포 기도를 한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딸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이 딸을 세우시고, 위로하시고...”
 
혜령과 엄마 목사님의 눈물이 새벽을 뜨겁게 채웠다.
 
 
범수는 더 이상 혜령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혜령과 범수가 연락을 하지 않자, 옥석의 시골 집은 범수 외에 아무도 찾지 않았다. 옥석은 다시 혼자가 됐고, 산돌을 대신한 혜령이 새벽부터 준비해야했던 제사도 사라졌다. 혜령은 비어 있던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과 엄마 목사님으로 가득 채웠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시간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혜령은 그 무렵 보육원에 혼자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만 있는 보육 시설로 혜령에게 법학공부를 알려준 조교가 소개한 곳이었다. 부모님이 없거나, 있어도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혜령은 어린 시절 머물렀던 고아원에 봉사를 가고 싶었지만, 그곳은 AI병원균 유행으로 봉사활동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봉사활동을 시작한 후 혜령에게 주말은 기다려지는 시간되었다. 저 마다 사연이 달랐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예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혜령의 마음이 밝아져갔다. 혜령은 엄마 목사님처럼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자 마음먹었다.

아이들은 혜령을 잘 따랐고, 혜령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주 주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설에 머물렀다. 청소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공부와 독서를 하며 함께 즐거운 하루들을 보냈다.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행동이 오히려 혜령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시간이 됐다.
 
"선생님은 좋겠다. 얼굴도 이쁘고, 집도 있고. 나는 버려졌는데. 엄마는 온다고 해놓고 오지도 않아요. 선생님이랑 같이 살면 좋겠어요. 어차피 선생님은 내 마음 모르지.."

올망졸망한 눈을 한 작은 여자아이가 혜령에게 다가와 한참 푸념을 한다.
 
"선생님도 어릴 때 시설에 있었어. 네가 크면 선생님보다 백배는 더 예뻐지고, 더 행복하게 살 거야.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자. 넌 정말 잘 될거야."
 
혜령은 아이를 꼭 껴안는다. 작은 아이에게서 비누향이 난다.
 
‘넌 정말 잘 될거야.’
 
몸은 피곤했지만, 혜령의 마음은 풍요로움으로 넘쳤다.

혜령의 집 방안, 경희는 혜령에게 이제 준비가 다 됐다며, 전도사님과 만날 약속을 잡자고 했다.

“이번 주는 내가 좀 바빠서 안 되고, 다음 주 안 될까? 근데 꼭 만나야해? 나 교회도 다니고 있어. 거기 목사님 정말 설교 잘 하시거든. 정말 좋아.”

“언니 교회가 좋아도, 말씀이 먼저잖아. 전도사님이 심리상담도 해 주시고 말씀도
알려주시고 할 텐데 얼마나 좋아. 부담 갖지 말고 밥이나 한끼 먹으러 나가봐.”

혜령은 그러마 하고 약속했다. 바쁜 나날들이 지나갔고, 약속한 날이 왔다. 경희의 전도사님을 경희가 말한 카페 안에서 만났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깨끗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앉아 있다. 혜령이 다가가 인사를 한다.
 
“말씀 공부를 제대로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일주일에 세 네 번 만나서 말씀 공부하고 그러면 자매님 삶도 더 많이 하나님께서 도우실거에요.”

“세 네 번이나요? 일주일에 한번은 안 되나요? 제가 아르바이트도 있고, 근로 장학생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해서 일주일에 그렇게 많이 만나는 건 어려워요.”

“자매님, 말씀을 제대로 아셔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많이 받을 수 있어요.”

“그건 안 되는데. 그냥 나중에 시간이 생겨서 기회가 되면 배울게요.”
 
혜령의 말에 남자 전도사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리고 굳은 표정을 급하게 푼 남자 전도사는 입 꼬리를 양쪽으로 가득 올리며 말을 건넨다.
 
“일단은 그럼 일주일에 한번 보고, 나중에 계획을 다시 만들어보게요.”

혜령은 일주일에 한 번도 부담이 됐다. 그만 두겠다는 말을 건네자, 전도사는 혜령에게 좋은 밭이기 때문에 씨를 뿌리면 좋은 나무가, 열매가 맺힐 거라 했다.
 
“혜령씨가 가시밭이고, 메마른 땅이면 저도 시간 내서 이렇게 알려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좋은 밭이라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큰 나무가 될 게 보이니까 이렇게 시간 내서 저도 혜령씨에게 진리를 알려 드리는 거예요.”
 
혜령은 전도사님이 말한 좋은 밭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이후 여러 번 혜령은 경희의 전도사님을 만났다. 남자 전도사는 공부방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혜령을 데려갔다. 혜령이 대문으로 들어가자 방에서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여러 명의 비슷한 나이 대 친구들이 각 방에 모여 말씀을 듣고, 열심히 적고 있었다. 혜령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전도사가 말한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아, 오늘은...”

“오늘은 여기부터 공부하기 시작할 겁니다. 성경 공부를 제대로 해야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어요.”

남자 전도사의 성경 공부는 논리적이고, 체계성을 갖췄다. 성경 지식을 이것저것 대가없이 알려주는 전도사에게 혜령은 고마움을 느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열심히 사랑을 전하는 구나.’
 
공부 모임 어느 날 남자전도사가 말한다.

“혜령씨, 그동안 혜령씨가 믿고 있었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닐 수 있어요.
우리는 성경 속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게 사탄의 하수이거나 악마였을 수도 있거든요. 성경 속에서 바로 앎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분을 삶에 초청할 수 있어요.”

사탄이라는 말에 혜령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붉어진 혜령이 물끄러미 남자전도사를 바라본다. 어린 시절 만났던 하나님, 그리고 잠시 하나님을 떠났던 시절, 다시 만났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다니. 혜령은 혼란스러웠다. 눈꺼풀 한쪽이 파르르 떨렸다. 다음 약속을 정하고 혜령은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왔다.
 
문자메세지.

「전도사님, 제가 아직 말씀 배울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요. 너무 혼란스럽고 힘들어요. 말씀하신 대로 사람마다 하나님이 계획과 시간표가 있는 건데.. 제 시간이 아직 아닌 가 봐요. 좋은 기회가 생기면 나중에 다시 말씀 배울 게요. 죄송합니다. "

「혜령씨가 좋은 밭이라 제가 대가 없이 말씀을 가르쳐드린 거지요. 만약 가시밭이면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을 알려드리겠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말씀을 제대로 아셔야합니다.」

「제가 그곳에 가는 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기분이 들어 못 가겠어요. 제가 믿었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도 마음이 너무 힘들구요. 죄송합니다.」

혜령은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다시 정지했다. 그날 밤, 경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울부짖기 시작했다. 경희의 표정은 세상을 잃은 표정이었다.

“언니 한다고 해 놓고 안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얼굴이 뭐가 되라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부탁한 건데. 그리고 교회 사람들도 언니 다 안단 말이야. 내가 뭐가 돼.
언니 다시 해. 내가 얼마나 좋으면 내가 언니 얼마나 사랑하면 이렇게까지 하겠어.
언니 나 믿고 한번만 더 생각해 주면 안돼?”

“나 너무 바쁘고 요즘 너무 피곤해. 성경 배우는 것도 힘들고. 거기 가는 게 너무 힘들어. 나중에 다시 할게. 나 교회 다니는 곳 거기 말씀 좋아. 거기서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성경 매일 읽고 있으니까 나중에 할게..”

“언니 나 못 믿어? 가족은 나 하난데 가족이 이렇게 부탁하는 데.. 언니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언니 제발. 응?”

경희와 혜령은 그 이후 매일 밤 다투고, 울고, 어르고를 반복했다. 혜령은 너무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경희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내가 사탄이 씌었나보다. 말씀 배우는 게 이렇게 싫다니.’
 
혜령과 경희는 말씀 배우는 문제로 다투다 결국 따로 살기로 했다. 경희는 짐을 꾸려 친구 집으로 간다며 나갔다. 혜령은 경희를 잡지 않았다.
 
육 개월 후, 혜령이 살고 있는 집이 계약 기간이 끝나 나가야할 때가 되었다. 혜령은 경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가운 목소리의 경희가 전화기 너머로 왜? 라고 말을 던진다.

“여기 계약 기간이 끝나면 너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면 안 될까? 아니면 짐이라도
좀 맡아줘도 좋고. 너 지금 혼자 산다며. 내가 공부 중이라 집을 알아보고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시험도 봐야하고, 돈 들어갈 것도 많고.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로는 집세도 못 낼 거 같고 해서.. 같이 반씩 내면 안 될까?”

“나도 사정이 있어서 안돼. 언니가 알아서 알아봐.”

“그럼 옷이랑 책 같은 거라도 맡아주라. 주인 어르신이 집을 이제 나가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몰라. 언니가 알아서해. 우리 집에도 짐이 많아서 언니 짐 놓을 데 없어. 다 버리던가.”

“옷이랑 책이랑 다 버렸는데, 책 백권 정도만 가지고 있어주라. 부탁할게. 이건 정말 버릴 수 없어서 그래..”

“우리 집 복잡해져서 안돼. 이런 부탁 하지마.”
 
뚝.

경희의 전화가 끊겼다. 혜령은 경희의 강경함에 서운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혜령도 경희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 게 생각나서였다. 혜령은 짐을 싸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이사를 준비하던 사이 등불 교수님께서 혜령을 부르셨다. 등불 교수님은 혜령이 오는 날이면 종이 한 장을 준비해 혜령 앞에 놓으셨다.

“여기에 어떤 계획을 하고, 이뤄갈 건지 적어보게. 눈으로 볼 수 있게 적으면 그 계획이 이루어질 걸세. 자네는 열정이 가득한 학생이니 반드시 될 거라 믿네.”

“고맙습니다. 교수님. 항상 이렇게 신경 써 주시고..”

“참.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도 로스쿨이라는 제도가 이번 해부터 들어온다네. 빌려줬던 책에서 변호사가 됐던 그 여성도 일본 로스쿨을 나왔는데 기억할지 모르겠네만. 학생의 여건이나 상황을 보면 고시공부도 좋지만, 로스쿨에 진학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고 하면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해 보게나.”

등불 교수님은 혜령에게 로스쿨 입시 전형에 대해 알려주시며, 입시전형 책자를
주셨다.

“이번 해부터 시험을 보는 걸로 시작해서 로스쿨에 진학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네가 공부하는 걸 보고 답안지를 채점 메보고 해보니 법학 공부에 적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 여건보다 안정적으로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면 학생이 하고 싶어하는 그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거네.”

혜령은 교수님의 진심어린 조언을 듣고 기도를 먼저 하기로 했다.
 
‘뭔가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여쭤봐야 한다고 했어.’
 
설교 말씀이 갑자기 생각난 혜령은 특별 새벽 예배를 드리기로 마음먹는다.
 
몇 달간의 새벽 예배 후, 혜령은 로스쿨에 진학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다. 로스쿨에 가기 위한 준비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한다는 걸 의미했다. 리트 공부와 영어공부, 봉사활동, 새벽 예배, 책 읽기로 혜령의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혜령은 수험 준비를 위해 주말에는 박람회에서 과일 등을 팔고,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혜령의 꿈을 위한 새로운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유 - 16. 언니가 우리 교회 안 다녀서 그래.

 
 
16. 언니가 우리 교회 안 다녀서 그래.
 
로스쿨 입시를 위한 첫 시험을 봤던 해, 혜령이 스물네 살이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시험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격증을 위한 시험료와 입학시험을 위한 시험료를 벌어야했다. 고됐지만 혜령은 매일 매일 가슴이 부풀어 아픈 줄도 몰랐다.
 
‘그래, 언젠가 내 인생도 달라지는 날이 올 거야.’
 
혜령은 몸이 힘들어도, 꿈을 위해 견뎠다. 혜령이 이사를 하는 사이, 엄마 목사님은 서울에서 목회를 하게 되셨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혜령은 엄마 목사님과 떨어지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짐들을 채 풀지 못한 새로운 방에서 혜령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대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죽더라도 아마 먼저 발견하는 사람은 집 주인일거야.. 죽지 말자. 살아남아야 해.’

짐을 모두 정리한 후, 혜령은 아침 스터디를 위해 도서관에 나가고, 주말에는 일을 했다. 가끔, 산돌이 선물 같이 혜령의 통장으로 돈을 넣어줬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무슨 일이든 벌어졌다. 성철엄마의 전화를 시작으로 주변은 소음으로 정신없어졌다.

“그 미친놈이 집 앞 마트에 파는 수박을 전부 깨버렸어. 이거 어떡할거야. 경찰서
가야하는데 니가 갔다 와. 그리고 니 아빠니까. 니가 다 물어주라고.”

산돌은 매일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신 날이면 사람을 치든, 물건을 치든 어김없이 일을 치러냈다. 혜령은 산돌이 입힌 피해를 위해 사과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술기운이 빠진 다음 날이면 산돌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새색시처럼 수줍게 혜령을 보며 웃어 보였다. 혜령의 주변 상황이 정리되어 갈 즈음, 경희가 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밥 한번 먹자. 동생이 살게.”

“나 일이 있어서.. 괜찮아.. 니가 돈이 어딨다고. 너 맛있는 거 사먹어. 나중에 내가 자리 잡으면 같이 밥 먹게.”

“아니야, 하나뿐인 가족인데, 우리 둘이 잘 지내야지. 밥 한번 먹게. 민토 알지?
거기로 와.”
 
경희를 만나러 가는 날, 왠 행운일까 혜령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약속 장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작은 방으로 칸이 나누어진 카페 같은 밥집이었다. 문을 열자 말씀을 가르쳐줬던 남자 전도사님과 눈이 마주친다. 그 옆으로 경희가 앉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언니 여기야 여기. 여기 앉아.”
 
“안녕하세요. 자매님. 잘 지내셨죠? 두 분이 만난다기에 오랜만에 인사도 할 겸
나왔습니다. 너무 반갑네요.”

“네 안녕하세요.”

경희의 양쪽 입 꼬리가 한껏 끌어올려져있다. 혜령은 경희를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언니, 이 스파게티 좋아하잖아. 전도사님이 사주신대. 맛있는 거 먹어.”

그 이후에도 경희는 둘이 만나자 하고선 누군가를 동행 해 혜령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나 뿐인 가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혜령은 실감해 갔다.

혜령이 25살이 되던 해, 경희는 갈 곳이 없다며 혜령의 집에 들어왔다. 혜령은 경희를 막지 못했다. 혜령이 받아주지 않으면 밖에서 자야한다는 경희의 말에 혜령은 경희를 들였다. 간단한 짐과 옷들을 챙겨들고 경희가 들어왔다.
 
“몇 달만 있을게. 잠깐만 받아주라. 계약이 끝나서 갈 데가 없어. 짐은 몇 개 안 돼. 다른 사람 줬거든. 언니가 안 받아주면 나 밖에서 자야해.”

‘그래, 살면 얼마나 같이 살겠어. 같이 살면서 좋은 기억 많이 가지면 좋지.’
 
혜령과 경희는 함께 살기 시작했다. 경희는 매일 새벽 일어나 교회에 나갔다. 경희의 열심을 보면서 혜령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루 종일 무얼 하는지 경희는 새벽이 되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새벽 5시가 되면 밖으로 나갔다. 경희가 피곤해 나가지 못하는 날은 교회 친구들이 찾아와 경희를 깨웠다. 경희의 알람은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5분마다 울렸음에도, 지친 경희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덕분에 경희를 교회에 데리고 가기 위해 친구들이 옆집과 아랫집으로 이사를 왔다. 매일 알람이 울리고, 친구들이 문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경희는 이불로 파고들었다.

피곤한 얼굴과 목소리로 귀가한 경희는 자주 늦은 새벽까지 텔레비전을 봤다. 덕분에 경희의 아침은 전쟁과 같았다. 나가지 않으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으로 벌벌 떠는 날이 많았고, 피곤에 절어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질렀다. 경희는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이 얼굴에서 확연히 보였고, 몸은 점점 더 말라갔다.
 
“좀 일어나던가, 아니면 교회 일을 좀 줄이던가 해. 나도 너무 피곤해. 공부도 해야 하고, 너무 힘들어.”

“언니만 생활하는 거 아니야. 언니만 생각하지 말라고.”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진짜. 신경질 나게. 이게 아침이랑 밤마다 뭐야.”

경희는 자주 같이 사는 집에 교회 형제, 자매들을 불렀다. 그리고 혜령에게 같이 간식을 먹자며 통닭과 피자를 샀다. 혜령이 늦은 밤 귀가하자, 방에 열명은 되보이는 또래 아이들이 앉아있다.

“언니, 경희 언니는 언니 정말 많이 좋아해요. 언니가 경희 언니 봐서 한번만 훈련 받으면 안되요? 가족이잖아요."

"맞아요. 이거 정말 좋아요. 우리들을 보세요."

경희의 교회 형제들은 가족이라는 말로 혜령을 설득했다. 혜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혜령은 결국 귀에 문제가 생겼다. 가만히 있어도 알람소리가 들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병원에 갔다.
 
“선생님 자고 있는데 새가 막 지져 귀고, 초인종 소리가 계속 들려요. 가끔은 사람
목소리도 들리고요.”

“이명 증상입니다.”

“나을 수 있나요?”

“이게 뇌에서 그렇게 인식하는 거라, 낫는 경우는 거의 드물어요. 약을 먹으면서 증상을 낮출 수는 있어요. 스트레스와 과로를 조심하세요.”

혜령은 약을 받아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었다. 그러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산돌에게 전화를 건다. 혜령과 경희가 같이 산다고 하자 가장 좋아했던 산돌이었다.
 
‘매일 매일 싸우느니 따로 사는 게 좋겠어.’
 
잠시 후 산돌이 전화를 받았다.

“아빠, 경희와 더 이상 같이 못 살겠어요. 성격도 안 맞고. 아빠는 세상에 우리
둘 뿐이라 같이 살길 바라셨지만, 저는 더 이상 해낼 자신이 없어요.”
 
“대체 왜? 둘이 사는 게 뭐가 힘들어? 같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아무튼 이유는 없고요. 그냥 따로 살기로 했어요. 아빠도 그렇게 아셔요.”

혜령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냥 따로 살기로 했다고 이야기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산돌은 혜령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렀다.

“경희가 그러는데, 니 년이 매일 밤 남자를 끌어 들이고, 경희를 집에 못 들어오게 하고 그랬대매. 니가 난잡해서 경희랑 같이 못 사는 거라더만.”

“경희가 그래요? 삼자대면해서 이야기 하자고 해 볼까요? 어이가 없네. 걘 또 시작이네요. 아무튼 경희랑 이야기 하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저도 할 말 많아요.”

그 날 밤 혜령은 경희에게 아빠와의 통화 내용을 묻는다.
 
“대체 왜 그런 이야길 하는데?”

“그럼 뭐라고 해? 이유가 없잖아.”

“이유 많잖아. 그리고 남자를 집에 끌어들이는 건 너 아니냐? 어이가 없네.
미친 소리 좀 하지 말어. 아무튼 너랑 나랑 이렇게 살다간 원수 밖에 더 되겠냐?
그만 하게. 너도 짐 챙겨서 갈 집 알아봐. 나도 이사 갈 집 알아볼게.”

며칠 후, 경희는 짐들을 싸서 친구 집으로 갔다. 경희가 나가자 혜령의 귀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 이후 혜령은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됐다.
 
한달 후 경희는 병원에 입원했고, 혜령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비를 전도사님이 내주셨다며 병원에 한번 들르라 말하는 경희의 목소리가 약하게 흔들렸다.

“언니 내가 급성폐렴이라 1인실에 있어. 엄청 심해서 한 달은 입원해야 한대. 신장에도 문제가 생겼대. 돈이 없었는데 전도사님이 병원비도 내주고.. 정말 나한테 잘 해주셔.”

“병원 어딘데. 내가 갈게.”

병원 이름과 호실을 듣고, 밤에 혜령은 경희에게 가겠다고 약속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혜령은 밤 9시 반 즈음 경희의 병원 방향으로 걸었다.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병원이었다.
 
‘경희 병원 들렀다 조금 후에 새벽 예배 가야겠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하얀 옷을 입은 경희가 누워있다. 많이 아파보이는 경희는 그동안의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터졌다고 했다.

“언른 나아야 교회에 다시 가는데.”

“그 교회는 일할 사람이 대체 너 밖에 없대?”

“언니, 다들 나처럼 이렇게 해. 정말 다들 열심히 신앙 생활해.”

“돈도 안 주고, 넌 거기서 전도산가 뭐라매. 월급도 없고. 게다가 일도 못하게 하고 그것 때문에 너 알바 하고. 알바 한 돈 전부 가져다 내고.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다들 이렇게 살아.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에서 전부 먹여줘? 얼마나 신실한데. 이게 진리니까 다들 이렇게 하지. 언니는 진짜가 뭔지 모르잖아.”

경희와 혜령은 대화를 나눴지만 대화는 묘하게 어긋나고 또 어긋났다. 11시를 넘겨가자 경희는 혜령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너무 늦어서 여기 좀 있다가 갈게. 집에 가긴 너무 늦었고. 조금 있으면 새벽 예배도 있고. 저기 앉아 있다가 갈게. 그 김에 너도 좀 보고.”

“집에 가. 가라고. 나 혼자 있을 거니까. 좀 가.”

“여기 그냥 있으면 안돼?”

“좀 가라고. 꺼지라고.”

“이렇게 가라할 거면 왜 불렀어?”

“이렇게 늦게 올지 몰랐지.”

“신경 안 쓰이게 저기 멀리 앉아있다 갈게.”

“가. 좀 가라고.”

경희는 돌아누워 혜령에게 차갑게 말한다.

“가 좀. 나 쉬어야 하니까.”

혜령은 눈이 퉁퉁 부어 나온다.

‘저게 동생이면서 맨날 말도 함부로 하고. 지가 불러놓고 가라하고.’

혜령이 천천히 걸어 나와 주변을 살핀다. 택시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늦은 밤의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혜령은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덕분에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을 듣지 못한다. 집으로 가는 길 중간 정도 거리에서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급하게 달려온다.

퍽.퍽.
 
둔탁한 소리가 머리 위로, 귀로 들려온다. 머리 위로 무엇인가 내려앉는다. 그 순간 혜령은 움직일 수 없다. 뭐지? 움직임이 멈추고 누군가의 손동작이 계속된다.

‘이대로 서 있으면 계속 내려칠 거 같은데..그래 케이스 중에서 이런 게 있었지. 움직일 수 없으면 일단 눕기라도 하자. 가방만 가져가겠지.’

혜령은 가방을 옆에 떨어뜨리고 바닥에 눕는다. 도망가기엔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바닥에 눕자 남자인 듯한 등치를 가진 사람이 혜령의 얼굴을 무엇인가로 가격한다.
퍽퍽.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까. 말씀 좀 해 주세요.”
 
아무 말 없이 무거운 무언가로 얼굴을 가격한다. 안경이 깨지고, 이가 나간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엇? 이 사람 나를 죽일 생각인가?’
 
혜령은 그 순간 하나님을 생각했다.
 
‘하나님 저 오늘 죽나요?’

그 순간 눈앞에 하애지며 혜령이 바닥에서 튕겨지듯 일으켜진다. 순간적인 반동에 혜령도 놀란다. 일으켜진 혜령이 도로로 뛰어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는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뛰기 전 옆에 가방과 울리는 핸드폰이 보였지만 일단 살고 봐야했다. 발 한쪽에만 신발을 신고, 뒤뚱거리며 뛰는 혜령의 옷이 붉은 피로 젖어있다.

‘이럴 때 가방을 잡다가 머리채를 붙들린다 했어. 뛰자.’
 
근처 도로에서 차 한대가 멈춘다. 남자 분이 내려 혜령을 살핀다.

“무슨 일이예요?”

“강도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절 죽이려고 해요. 경찰이랑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경찰에 일단 신고부터하죠.”

“네. 사고 장소에 같이 가주셔요. 거기에 제 부러진 이가 있어요. 안경도 있고요. 핸드폰도..”

사고 장소에 갔지만 혜령의 한쪽 신발과 가방이 사라졌다. 핸드폰만 그 자리에 남아 빛을 내고 있었다. 부러진 이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잠시 후 구급차가 왔고 혜령이 올라탔다.

“어느 병원으로 가죠?”

“근처에 동생이 있어요. 그 병원에 가요. 동생에게 전화를 할게요.”

뚜 뚜. 통화 연결음.
 
 
“경희야, 나 사고 났어.”

“뭔 일이야? 내려갈게. 어딘데?”

“너 입원한 병원 응급실인데 여긴 수술을 못 한다고 큰 병원으로 다시 옮긴대.”

경희가 구급차에 올라탔고, 구급차는 큰 병원으로 이동한다.
 
“언니가 우리 교회 안 다녀서 그래.”

“이제 얼굴 어떡하지. 얼굴 안 돌아오겠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그니까, 언니가 우리 교회 다녔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병원으로 이동해 내린 카운터에서 의사들이 혜령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먼저 절개된 머리와 이마부터 꿰매야 할 거 같고.. 눈이 터졌는지 볼게요.”

혜령의 얼굴 위로 차가운 식염수 한통이 부어진다. 얼굴에 붉은 피가 같이 흘러내린다.

“머리 씨티랑 엑스레이부터 찍죠.”

“다행히 뇌출혈은 없네요. 피가 모두 밖으로 쏟아져 나와 다행입니다. 눈알도 안 터졌고.. 엑스레이 상 척추가 머리부터 허리까지 일자로 섰는데.. 이게 왜 이런지 모르겠네. 나중에 이게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잘 치료받으세요. 머리는 일단 다 꿰맸으니까 얼굴 부위는 성형외과로 입 안 쪽 터진 부분은 구강외과에서 해야겠네요.”

혜령은 다음 과로 이동한다. 이동 중 경희는 따라다니며 같은 이야길 반복한다.

“언니가 우리 교회 안 다녀서 그래. 그 사람 아니야? 최근에 언니 근처에 나타났다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그 있잖아. 언니가 말한.”

입 안 절개 부위를 꿰매기 위해 구강 외과에 갔고, 얼굴 전면부를 긁어냈다. 그리고 성형외과 수술 방이 나오길 기다리기 위해 응급실 맨 끝 침대에 누웠다. 다른 응급 환자들과 달리 꿰매는 정도의 환자는 경증 환자에 속하기 때문에 최소 24시간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12시간 이내에만 하시면 흉은 많이 생기지 않을 거예요."

의사는 피부가 최대한 공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얼굴 곳곳에 밴드를 붙여줬다. 혜령이 대기 침대에서 기다리는 동안 최근에 다니기 시작한 교회의 목사님이 오셨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친해진 언니도 함께 왔다. 그 사이 경희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자매님. 어쩌다가.. 하나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제가 기도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의 수소문에 교회의 외과 의사 선생님께서 수술 방 하나를 열어주셨다.

"자매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작은 돈이지만, 수술비에 사용하시면 해요."

목사님은 혜령에게 하얀 봉투를 들려주신다. 혜령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괜찮을 겁니다. 하나님이 모두 도우실 거예요.”
 
‘언니가 우리 교회 안 다녀서 그래.’ 그 말이 혜령의 귓가에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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