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픽션
입니다.
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
종교, 지명, 사건 등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아동 성추행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트라우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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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은 저작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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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1- 5.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본 작품은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 종교,
지명, 사건 등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1. 기회
옥석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다 할 형제가 없었다. 옥석이라는 이름은 옥처럼 고운 인생이 되라고 옥석의 부모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형제라고 부르기엔 먼 존재들이 있었지만 남보다 더 못했다. 옥석은 먼 친척 형들 말고는 혈육이라 부를만한 남자형제나 여자형제가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유난히 약한 아이였다. 옥석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 직업을 물려받았다. 산골을 넘어 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옥석의 마음에선 공부에 대한 의지와 열등감이 매일 자라났다.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갈 때 만났던 건너 집 또래아이는 옥석을 항상 거지 취급했고, 그때마다 옥석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스무살이 되도록 그에게 시집오겠다는 처녀가 없었다. 어느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못할 형편이었던 옥석은 사랑에 대한 열망이 매일 끓어올랐다. 어느 날 나무를 베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옥석을 마을 지주 집 어르신이 부르셨다. 지주 어른은 마을에서 힘 꽤나 있는데다 마을에서 땅이 가장 많았다.
"자네, 우리 딸과 혼인하는 건 어떤가. 자네가 장가오면 집도 주고, 농사지을 땅도 주겠네. 막내딸이...흠.. 흠.. 그래 어떤가."
지주 어른의 말에 옥석은 이게 왼 횡재인가 싶었지만, 의아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옥석이 이것저것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어르신. 아니 장인어른."
그녀의 이름은 인화라고 했다. 인화와의 첫 만남이 있는 날 옥석은 가진 옷 중 가장 말끔한 옷을 다려 입고, 동백기름을 발라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겼다. 빠른 걸음으로 지주 어른의 집에 도착한 옥석이 떨리는 마음으로 집 마당에서 인화를 기다렸다. 여인 한명이 마당 근처로 천천히 걸어와 옥석과 마주한 마루에 살포시 걸터앉는다.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연신 눈을 깜빡 거리는 여인이 족히 6개월은 되어 보이는 배를 손으로 만지며 마루에 앉았다. 옥석은 배를 한번 쳐다본 후, 인화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래도 자신의 마누라가 되어줄 여인이라 그런지 그 마저 어여삐 보였다. '그렇구나. 그랬을 리 없지. 내게 무슨 재수가 있을라고.' 옥석은 인화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인화와 혼인하던 날 옥석은 드디어 지긋지긋했던 가난을 벗어났다. 그리고 드디어 옥석에게 가족이 생겼다. 부자였던 친척들에게 풀 한포기 받지 못했던 그가 드디어 친척들과 비슷한 정도의 품위를 갖추게 됐다. 더 이상 옥석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남모르게 품었던 사랑에 대한 열망을 모두 인화에게 쏟아 부었다.
인화와 혼인하고난 후 옥석은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도 열망했던 붓과 벼루를 구매했다. 산에 가기 전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매일 옥편의 글을 한자 한자 종이에 정성스럽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다 쓴 후엔 붓을 곱게 세워 벽에 곱게 걸어두었다. ‘오늘도 시작이다.’ 매일 옥석의 하루가 글공부와 함께 시작되었다.
옥석은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를 인화를 통해 들었다. 인화가 사랑했던 남자였다. 듣는 내내 마음에 불덩이가 꿈틀거렸다. 그럼에도 인화의 이야기가 가슴 아팠다. 인화의 이야기에 아픈 건지, 자신의 마음이 아픈 건지 옥석은 매우 아팠다. 뱃속 아이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고, 배가 불러오자 지주 어르신이 옥석을 불렀다. 뱃속 아이 덕분에 지주댁 어르신의 데릴사위가 됐으니 뱃속 아이는 옥석에게 은인이었다.
마을에서 큰댁 어르신이라고 불리던 당신의 명예가 딸의 사랑보다 더 귀했다. 지주 어른은 서둘러 동네 청년들을 물색했고, 청을 거절하지 못할 청년으로 옥석이 선택됐다. 그래, 옥석은 선택받은 남자였다. 옥석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옥석은 인화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인화는 옥석을 만나기 전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해 봤다고 했다. 그 중에 먹었던 약이 한쪽 눈을 멀게 했다. 그럼에도 인화는 아름다웠다. 인화가 옥석과 한 집에서 산달을 기다리는 동안 옥석은 처음으로 하늘을 당당히 바라봤다. ‘그래 이건 내게 신이 내게 주신 기회야.’ 그는 더 이상 이웃집 아이들에게 멸시 받던 가난한 산골 소년이 아니었다. 이제는 큰 댁 어르신의 어엿한 사위가 되었으니까.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아이는 하늘을 담은 듯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눈을 연신 맞추는 그 아이의 눈망울이 옥석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걸 이 아이에겐 다 줄거야.’ 옥석은 아이의 손을 꽉 쥐었다. 옥석에게 기회가 된 이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가 자라나는 동안 인화는 아이를 임신했다. 첫째 아이는 다음 아이가 태어나자 큰댁 어르신께 보내졌다. 결혼 날짜와 아이가 태어난 날에 대한 말들이 사람들의 매서운 눈과 입을 피해갈 순 없던 모양이었다.
큰 댁 어른 집에서 자라던 아이가 3살이 되던 날 인화와 인화의 어머니는 아이를 죽이기로 했다. 인화의 어머니는 아이 하나 죽는 건 병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라며 마음을 굳게 먹도록 인화를 안아줬다.
아주 오랜 만에 인화가 아이를 만나기 위해 지주 어른 댁을 찾았다. 꽃이 막 피기 시작한 따뜻한 봄날이었다. 대궐 같이 큰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선 인화를 먼저 맞이한 건 인화의 어머니였다. 아이가 있는 건너 방으로 향한 인화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불러냈다. 아이는 드디어 찾아온 엄마의 목소리에 득달같이 뛰어나왔다. 그 날은 큰 에 온 이후 아이에게 생일 같은 날이었다. 가장 큰 닭의 목이 꺾였고 한참 삶아진 큰 닭 한 마리가 아이 앞에 놓여졌다. 아이는 연신 침을 흘리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난 아이는 엄마의 무릎에 누웠다. 엄마는 아이에게 놀러 나가자며 일으켜 세웠다. 인화와 아이의 손이 겹쳐지고 신이난 아이의 발걸음이 통통 튀는 동안 인화는 아이를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천천히 그녀와 아이가 꽃이 막 피기 시작한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한참 이어긴 길에서 개울가가 보이자 인화가 걸음을 멈췄다.
개울가에 닿자 갑자기 인화가 아이를 품에 안아 올렸고, 개울가로 밀어 넣었다. 살기위해 발버둥치던 아이는 코와 입을 통해 들어오는 물을 연신 들이켰다.
“어푸, 어푸, 윽, 웩... 푸으윽.”
아이가 축 늘어지자 인화는 아이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 이게 니 명인가 벼.’ 돌아온 아이를 본 인화와 인화의 어머니는 아쉬운 표정과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날 이후 아이의 마음은 조각이 났고 얼어붙었다.
인화와 그녀의 엄마는 그 이후 아이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아이는 생일 같은 그 날 마음의 고향을 잃었다. 그 사이 옥석에게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 그럼에도 아이는 옥석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이는 매일 따로 차려진 상에서 밥을 따로 먹었고, 아무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아이는 천천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한참동안 이름 없이 야. 너. 라는 호칭으로 불려졌다. 아이가 지워져가던 으리으리한 큰 집이 아이에겐 감옥 같았다.
옥석의 집, 마루에 앉아 옥석이 인화에게 말을 건다.
"이젠 산돌이를 데려오는 건 어떨까. 아이들도 둘이나 태어났고. 애들한테도 형이 필요해."
지주 어른 댁의 아이는 산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던 옥석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아이에게 특별히 지어준 이름이었다. 산돌은 옥석에게 특별한 아이였다.
“그래도 좀 그렇지 않을까. 보는 눈들도 많고.”
인화가 말했다.
“산돌이는 내 아이야. 당신도 알겠지만 내 아이라고. 언제까지 그 집에 산돌이를 둘 순 없어. 당장 데려와. 내 아들 데려오라고.”
옥석은 그녀에게 산돌이를 반드시 집에 데려오겠노라 고함을 쳤다. 산돌이 드디어 옥석의 집으로 왔다. 그리고 옥석의 집에 와서야 산돌은 처음으로 자신이 산돌임을 알게 됐다. 산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옥석의 집은 산돌에게 따뜻한 고향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뛰어난 산돌을 보고 옥석은 산돌을 제대로 공부 시키겠다 다짐했고, 산돌은 공부를 하기 위해 금새 집을 떠나야만 했다. 산돌은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꽤 뛰어난 아이였고, 그것이 산돌의 인생을 굽이치게 할 것이라는 걸 옥석도 산돌도 알지 못했다.
“그래, 넌 내 아들이지.”
옥석은 산돌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산돌이 공부를 잘 할수록 행복했다. 산돌이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읍에 있는 사촌누나 곁으로 산돌을 보내기로 했다. 산돌을 보내기 위해 옥석은 장인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밭과 논을 팔았다. ‘큰 사람이 되려면 큰 물에서 놀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돈을 가득 담은 가방과 아이를 도시 사촌 누나 댁에 보냈다.
"산돌아,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둘째 아이 관수가 연신 눈이 붉혔다. 산돌이 옥석의 집에 들어온 후, 관수의 목표는 오직 산돌을 이기는 것이었다.
‘저놈이 내 걸 다 뺏어가는 구만.’
옥석이 산돌을 칭찬할수록 둘째 관수는 산돌을 더 많이 미워했다. 산돌이가 뛰어나다 평을 들을수록 둘째 관수의 앞날이 깜깜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형이라고 소개된 산돌을 관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원래 자신의 것이었을 것들을 차지하는 산돌을 관수는 매일 미워했다. 그 미움이 매일 산처럼 쌓여갔다. 자신이 걸어야했던 길, 받아야 했던 모든 혜택이 산돌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관수는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아졌다. 산돌을 교육시키기 위해 산돌을 시외학교로 보낸 날 옥석은 관수의 학업을 중단하게 했다. 관수의 날개가 완전히 부러졌고, 복수심에 덮었던 이불을 발로 찼다. ‘내 이놈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거야.’
산돌이 시외 학교로 간 후 옥석은 열심히 돈을 모아 뒷바라지를 했다. 덕분에 연달아 태어난 아이들에게 돌아갈 몫이 점 점 더 줄어들었다.
“산돌이는 잘 될 놈인 게. 그 놈은 난 놈인 게. 될 거여. 암. 큰 놈이 잘 되야. 다 같이 잘 되는 겅게.”
옥석의 마음이 산돌에게 향할수록 관수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매일 자라났다. 산돌이 도시 할머니 집에 가던 날, 산돌은 알았다. 도시 할머니는 자신보다 돈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산돌은 큰 댁 어른 집에 보내지던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산돌의 생각이 맞았는지, 도시 할머니는 돈 가방을 받자마자 대문 앞으로 산돌을 내동댕이쳤다.
“니 밥 줄 돈 없응께. 나가서 빌어먹든지. 알아서 살그라.”
도시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온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고, 돈을 벌어 언젠가 다시 갚으면 된다며 가볍게 죄책감을 내려놨다. 학교에 가 있어야할 산돌은 도시를 떠돌았다. 돌아갈 집이 없어진 산돌이 가진 건 낡은 잠바 하나와 건강한 몸이 전부였다. 배가 고팠고, 추웠다. 산돌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걸 알 리 없는 옥석이 도시 사촌 누나에게 꾸준히 돈을 모아 보냈다.
“산돌이 공부는 잘 하고 있지라?”
“그래. 잘 하고 있지. 암. 걱정하지 말고. 산돌이는 방에서 공부하고 있응께. 다음에 연락 또 하게잉.”
산돌의 뒷바라지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한 관수의 열등감과 미움이 매일 매일 자라 세상 가득하게 커져 갔다.
2. 신이 있다면
옥석이 십대를 막 벗어날 무렵이었다. 나무 지게를 지고 있던 옥석이 뒤를 돌아봤다. 돌아갈 길이 없었다. 읍으로 학교를 갔다던 기영이었다. 젠장. 멀리 보이는 아이 모습을 보고 옥석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고, 지게 양쪽 끈을 몸 쪽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바쁜 걸음으로 걷는 옥석을 기영이 잡아 세운다. 볕 짚을 엮어 지붕을 만든 옥석의 집과 달리 옥석의 건너편 집은 숯처럼 까만 기와를 잔뜩 얹은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덕분에 기영의 집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지붕에 얹은 기와는 멀리서도 위엄 있게 검었다. 게다가 기영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반들한 차림새를 가졌다.
“어이, 오랜 만. 잘 지냈지? 여전히 꼬질 꼬질 하네.”
“.....”
옥석의 옷고름을 기영이 잡아챈다.
“내가 인사하잖아. 친구끼리 인사 정돈 해야지.”
친구는 무슨. 옥석은 움켜잡힌 옷고름을 잡아뗀다.
“가라.”
“아얏. 손만 버렸네. 어디 가냐. 인사 좀 하지 그래. 여직 거지새끼처럼 하고 다니네. 종 놈이 뭐 달라질라고. 퉤.”
옥석은 기영을 피해 옆길로 걷는다.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소용돌이친다. 옥석이 입술을 깊게 베어 물었는지 비릿한 맛이 난다.
"거지새끼, 니 인생이 뭐 그렇지. 니가 그리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 거 같냐? 그래봐야. 거지새끼지."
기영의 말에 옥석이 돌아본다. 옥석이 시선이 잘 다려진 기영의 옷 선에서 멈춘다. 새벽마다 옷을 다려입던 옥석이었다. 옥석이 옷을 뜨거운 숱에 오래 넣은 판으로 열심히 다려도 선이 도통 마음에 차지 않았다. 옥석은 기영의 옷 끝을 흘기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이 새끼. 뒤질라고. 내가 니 놈 하나는 반드시 잡아 죽여야지.’
붉어진 얼굴만큼 마음이 뜨겁다. 그날부터 옥석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신이란 신은 다 찾기 시작했다. 신령한 신이 있다는 산에서 물을 담아왔고, 가장 좋은 그릇에 담아 상에 올렸다.
"부처든 뭐든 귀신이든 산신령이든 살아만 있다면 내 소원 좀 들어주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영이 저 놈 좀 잡아가소. 비나이다."
옥석은 방에 작은 신당을 차렸다. 촛불과 향을 피우고,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놈 좀 잡아가소. 기영이 그 놈 하나만 잡아가면 되요. 내 소원은 별 거 없수다.신이 있소. 그 놈은 좀 잡아가소. 대체 그 놈은 뭔 복을 받고 나는 뭔 죄를 지었길래. 나만 거지새끼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 놈 좀 잡아가소.’
옥석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것이 처음이었다. 매일 새벽 4시, 정성을 들여 절을 하고 기도를 드렸다. 가진 게 정성 뿐이라 여긴 그는 마음을 쏟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인 것처럼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옥석의 기도는 어느 날부터 2명 더 늘었다. 기영과 함께 다니던 패거리들이 옥석을 만나면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그들의 즐거운 방학이 옥석에게 길고 또 긴 날로 이어졌다.
옥석의 잡아가소 기도는 3인방의 소식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그 날도 옥석은 산에서 나무를 베고, 벤 나무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소리를 내며 모여 있다. 옥석도 멈춰 서서 동네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한참 바라봤다.
“오메 들었는가? 그 부잣집 도련님 물놀이 갔다가 못 돌아왔다며.”
“긍게. 지금 동네 초상이잖소. 아이쿠. 그 부잣집에 아들 한명인데 큰 일 났구만.”
“왜 그랬디야.”
“모르제. 재수가 없을라믄. 접시 물에도 코 박고 죽는 법잉게”
“그나저나 신은 그 아까운 아이들을”
“한명이 아닌가벼?”
“그 집만 그런 게 아니라매.”
“저집이랑 저집이랑 같이 다니던 애들잉게”
“인명은 제천이라고. 명들이 아쉬워서 어쩌노..”
“아이고. 우얀데. 총명한 놈들이었는디.. 쯧쯧.”
옥석이 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곡소리가 더 커졌다. 옥석의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옥석은 자신의 마당에 들어서서 지게를 내려놨다. 그리고 건너편 집을
바라봤다. 으리으리한 기와와 집 풍채는 이 날 만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갔군. 신이 있었구나. 갔어. 갔어.’
옥석은 안도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 신이란 놈도 결국 정성을 들이면 소원을 들어주게 되있지. 암. 그래. 그렇고 말고. 그래야 그게 공평하지.’
옥석의 소원이 이뤄진 날, 그 날 밤부터 옥석은 잠이 들지 못했다. 소원이 들어졌지만 그의 얇은 목숨까지 신이 거두어갈까 몸이 떨렸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옥석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매일 밤 옥석은 문이 잠겼는지 또 확인하고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소원이 이뤄졌음에도 새벽 4시 기도는 계속 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파 앓아눕는 날에도 그의 기도는 이어졌다.
‘기도를 멈추는 순간 내 목숨이 사라질지도 몰라.’
옥석이 ‘잡아가소.’ 기도가 들어졌다는 안도감과 꺼림칙함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3명의 아이가 동네에서 상을 치렀다. 저마다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수군거렸다. 아깝고, 안타깝고, 알 수 없는 죽음들이었다. 하늘이 거두어간 목숨들은 마을을 빛낼 귀한 손 들이었다. 옥석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죄책감이 들었다.
옥석의 매일 새벽 4시 기도는 어느 날부터 ‘살려주소.’ 기도로 바뀌었다.
몸과 마음이 고된 하루들이 지나갔다. 그러다 옥석은 마을 지주 댁 어른의 부름으로 인화의 남편이 됐다. 산돌이 태어나자, 옥석은 산돌 아비가 된 것이 신이 자신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성에 감동한 신이 자신에게 준 기회라는 생각에 매일 아침 더욱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렸다. 옥석의 방은 향 냄새가 이불과 옷까지 가득 베어 들었다. 향이 맡아질 때마다 옥석에게 알 수 없는 신령함이 느껴졌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옥석과 결혼한 후, 부인 인화는 산돌을 낳고 아이 5명을 더 낳았다. 몸이 약했음에도 인화는 5명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부인 인화는 막내 춘풍을 낳고 몸져누웠다. 좋은 약을 다 써봤지만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인화의 얼굴빛이 나날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자네 죽으면 안 되네. 애들이 이렇게 생떼같이 어린데. 나보고 어쩌라고. 자네가 먼저 가불라고 하나. 안 되네..”
기도의 힘을 믿었던 옥석은 정성과 시간을 더 들여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옥석의 간절한 새벽 기도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인화와 겹쳐진 옥석의 손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인화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고 눈빛에 빛이 조금씩 사라져가더니 인화는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인화가 떠난 날 옥석은 마음으로 신을 저주했다. 그리고 인화가 죽은 것이 자신의 목숨 대신이라 생각했다.
해맑게 빙글빙글 돌며 장구를 치고, 노래를 부르던 인화가 눈에서 멀어져간다. 긴 여행을 떠난 사람의 눈빛을 한 옥석이 너른 마당을 바라본다. 꽃처럼 피어나는 여인이었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산돌과 아이들을 안겨준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어렸고, 살아야할 날은 구만리 같이 길었다. 겨우 옥석의 나이 서른 무렵이었다. 인화가 가고 그는 아이들을 위해 재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이들만 줄줄이 있는 그에게 시집 올 처녀나 부인들을 알아보는 건 쉽지 않았다. 있다 해도 옥석의 눈에 들지 않았다.
그 이후 몇 번 여자가 왔다가긴 했지만 며칠, 몇 주 왔다 집을 털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집에 몰래 모아놓은 옥석의 보물들이 사라졌다. 덕분에 재혼은 점 점 더 어려운 일이 됐다. 아이들은 알아서 자란다고 자기들끼리 잘 자라는 듯 했다. 뭘 먹고 뭘 배우는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여전히 옥석은 새벽 4시 기도를 계속 했고, 신에게 여인을 달라 매일 기도를 올렸다. 아침마다 자부심을 주는 붓글씨 연습과 붓을 세우는 일도 계속 했다. 열심을 기울인 아침일수록 논과 밭에 나가는 옥석의 다리에 힘이 생겼다. 옥석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리고 간간히 그는 시장에 하얀 모자와 빽 구두를 신고 신부감을 물색하러 나갔다. 그 날 외엔 흔한 동네 늙은 아저씨였다.
옥석은 매일 외로움에 사뭇 쳤고 신이 가혹하다 생각했다. 그에겐 의지할 가족도 외롭다 말할 친구도 없었다. 그러다 옥석이 마흔 후반 나이가 된 무렵 산돌이 집에 왔다. 많이 야위었지만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인사드리러 왔어요."
산돌은 한 여인을 데려왔다. 그 여인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온 세상이 마음에 들어올 정도로 행복이 느껴지게 하는 여자였다. 옥석은 물끄러미 여인을 바라봤다. ‘이놈이 드디어 효자 노릇을 하는 구만.’ 옥석은 여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제가 결혼하려구요.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 사람이 제 아이를 가졌어요.”
옥석의 마음에서 푸스스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줬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옥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여자를 니놈이 가진다고. 이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고.’
옥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한참 크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막내 춘풍과 춘풍의 누이 인경이였다. 옥석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연신 헛 기침을 내 뱉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사람과 산돌을 보느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흠흠. 목에 걸린 가래를 목 뒤로 넘기고서야 옥석의 붉은 기가 가셨다.
“이 언니 디게 이쁘다. 언니 어디서 왔어요?”
인경이 여인에게 인사를 건냈다. 산돌 옆에 앉아있는 여인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고, 미소 짓는 표정이 배꽃처럼 화사했다.
‘나쁜 자식. 아버지 여자 먼저 얻어주고, 지 놈이 가야지. 불효자 자식.’
옥석의 마음이 붉게 끓고 또 끓었다.
그날부터 옥석은 마음이 흔들려 잠들지 못했다. 살면서 가슴에 품어본 여자가 있었던가. 낯이 뜨거웠다. 여인의 배꽃같은 미소가 생각나 잠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 됐다.
‘연정이라도 어릴 때 품어봤더라면.’
옥석은 아쉬운 마음에 잘 세워뒀던 애먼 붓을 바닥에 문질렀다. 사랑이라는 걸 받아본 적도 해 본 적도 없었던 옥석은 당연하게 결혼을 했고 아버지가 됐다. 인화를 떠올렸지만 인화 얼굴 위로 여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옥석은 호사스런 감정이 제 것이 될 리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산돌이 배꽃같이 하얀 미소를 가진 여인과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옥석은 셋째 범수로부터 형수에게 아이가 생겨, 결혼식 없이 바로 같이 살기로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여인 집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을 내 놓는다는 심정으로 산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여인이 집을 나왔다고도 들었지만 더 이상의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산돌은 처음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었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산돌의 아이가 태어나자 제일 먼저 그 아이가 보고 싶었던 옥석이 아이를 보러갔다. 딸이었다. 언뜻 여인과 인화를 닮아있는 듯 작은 아이가 옥석의 가슴을 흔들었다. 작은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꽈악 쥐자, 옥석의 마음이 뭉글해진다.
"아가, 고생했다."
아이를 보러가는 날엔 여인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이를 보러간다는 핑계로 옥석은 자신의 연정을 들키지 않고, 여인을 마음껏 지켜볼 수 있었다.
3. 사과와 여인
옥석은 아침부터 구두를 닦고 있다. 안 그래도 하얀 구두가 오늘따라 더 말갛게 빛난다. 마루에 앉아 한참 구두를 닦던 옥석에게 여인이 다가온다. 옥석의 집에 얼마 전부터 둘째 관수의 부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 산돌 대신 큰 아들 노릇을 하고 싶다는 관수가 부인을 먼저 옥석 집에 들어 앉혔다.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는 관수의 성화에 관수의 부인은 얼마 전부터 옥석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매일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하루 세끼 옥석의 식사 준비를 했다.
“현이 에미야. 나 나갔다 오마.”
“아버님 식사 안 하시고, 일찍 어디 가신가요? 식사하고 가세요. 제가 진지 올릴게요.”
“응응, 갈 데가 있지. 거기서 밥 먹고 오마.”
옥석은 사과가 가득 든 검은 봉지를 양손에 들고 둘째 관수 부인을 쳐다본다. 관수 부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둘째 관수 부인은 하루가 멀다하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상을 차려냈다. 그럼에도 옥석은 관수 부인에게 사과 한쪽 내밀지 않았다. 그런 옥석이 여인의 집에 갈 때면 사과를 담은 봉지를 양손 가득 들었다. 얼굴이 굳어 고개만 까딱하는 관수 부인을 뒤로 하고 옥석이 대문을 나선다.
하얀 백구두, 챙 달린 모자, 하얀 양복 3박자를 갖춘 옥석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신사라도 된 것처럼 양껏 꾸미고, 사과를 양손에 가득 들고 나서는 옥석의 발걸음이 가볍다. 둘째 관수 부인은 마당에 서서 한참 옥석을 바라본다. 관수 부인을 눈짓으로 들어가라고 한 후 옥석이 대문을 나선다.
둘째 관수의 부인은 한참 어린 여인을 대신해, 큰 며느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린 현이를 데리고 들어와 사느라 생활이 팍팍한데다, 옥석의 차별에 관수부인의 마음에 매일 불길이 일었다. 매일 관수부인이 최선을 다해 봉양을 했음에도 옥석은 고맙다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관수부인은 사과를 볼 때마다 여인과 산돌이 미웠다.
여인의 집에 도착한 옥석이 큰 소리로 여인을 부른다.
“아가야. 아가야. 나 왔다.”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마당을 지나 대문 앞으로 나온다. 살짝 열려있는 대문 틈으로 여인의 바쁜 걸음이 보인다. 옥석은 여인에게 사과 봉지를 들어 보인다.
“아이고. 넘어질라. 천천히 와라. 천천히.”
“아버님, 제게 주세요. 무겁게 뭘 또 가져오셨어요.”
“아니다. 내가드마.”
배꽃 같이 화사한 여인이 얼마 전 옥석의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가벼운 걸음으로 20분이면 시골에선 꽤 가까운 거리였다.
"아가, 밥은 먹었고?"
“이제 막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직이시면 아버님도 드시고 가셔요.”
마루 위에 앉자 방 안에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이가 보인다.
“이름이 혜령이라고 했지?”
“네, 그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이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누가 그랬다 네요.”
“그놈 아니냐. 그놈. 그 무당 나부랭이 놈.”
“그이 친군데.. 혜령이라는 이름이 좋대요. 아이의 이름으로 뭔 액을 막아야 한다고.. 그이가 그랬는데.. 자세히는 저도 잘 몰라요,”
“목사 아들 놈이 뭔 신을 받아 가꼬. 그런 놈이 뭔 친구여. 사기꾼이지.”
옥석이 한참 씩씩댄다. 아이 이름은 자신이 지어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무당 나부랭이 놈이 옥석의 기회를 빼앗아갔다.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의 얼굴에서 인화가 보였다. 고놈, 참 잘 생겼네.
“아버님, 방으로 들어가 계셔요.”
“아니다. 밥은 시원하게 마루에서 먹자구나.”
옥석이 가져온 사과를 정갈하게 깍아낸 여인이 부엌에 들어가 한참 뭔가를 굽고 있다. 옥석의 콧속으로 고소한 냄새가 들어온다. 킁킁. 옥석의 마음에 여인의 뒷모습이 냄새와 함께 그려진다. 마루에 상이 차려지자 근처에 혜령이 와서 숟가락을 가지고 논다.
“이리, 내렴. 아가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다.”
아이는 숟가락을 꽉 쥐고 놔주지 않는다. 그러다 옥석 옆에 놓인 사과를 봤는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아이의 눈이 총알총알 빛이 난다.
“이거 먹으렴. 아가야.”
사과를 입에 대고 한참 빨다 아이는 사과를 옥석에게 내민다. 사과를 받아든 옥석이 여인에게 말을 건다.
“아가, 여기 와서 같이 먹지 않고.”
“아버님, 먼저 드세요. 아이랑 같이 먹을게요.”
옥석의 곁으로 오지 않는 여인을 못 내 아쉬워하며 옥석이 숟가락을 든다. 맛있다. 여인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옥석은 둘째 관수의 부인이 들어온 덕분에 여인이 오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솜털마저 아름다운 여인은 산돌보다 12살 어리다고 했다. 그래서 여인의 집에서 이 결혼을 무척이나 반대했더랬다. 그 즈음 산돌은 시외 버스기사로 차곡차곡 입지를 다져갔다. 덕분에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오는 일이 태반이었고, 옥석이 혜령을 보러 자주 여인의 집에 방문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챙겨야지.’ 옥석은 마음을 다졌다.
“사과가 좋더라. 사과를 먹으면 예뻐지고 건강해진다고 그래. 사과 파는 놈이 만날 사과 좋다고 사가라고 얼마나 성화던지. 많이 먹고 더 건강해져야지.”
사과를 안 먹어도 예쁜 여인이지만 사과를 볼 때면 그녀가 떠올라 사과를 가득 품에 안았다. 여인을 안은 것처럼 가슴이 몽글몽글 해졌다. 옥석은 비싸서 사본 적도 먹어본 적 없는 과일을 척척 사서 부지런히 날랐다. ‘마음을 주는 것 그래, 이게 사랑이지.’
옥석은 남모르게 시작한 사랑 덕분에 행복에 겨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같이 둘째 관수부인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걸어 여인의 집에 왔다. 옥석은 관수 부인 앞에서 사과 장수 욕을 그리 해 대며, 여인의 집으로 사과 봉지를 날랐고, 관수 부인에게 사과 한쪽 남겨주지 않았다.
“혜령이가 많이 자랐구나.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아이야.”
바닥에 앉아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혜령을 바라보며 옥석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여인을 닮기도, 인화를 닮기도 했다. 혜령이 마당에서 쭈구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고 있다.
“아버님, 진지 드셔요.”
“여기 와서 같이 먹자구나. 산돌이는 오늘도 늦고?”
마주 앉아 먹는 밥에 옥석의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뭐 필요한 건 없고? 시골 사는 게 힘들지? 부모님이 멀리 계셔서 외롭겠구나.”
“아버님이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복이 많은 가 봐요.”
내일 또 오마. 라는 말을 뒤로 하고 무겁고 아쉬운 걸음으로 옥석이 마당을 나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흥에 겨워 시장에서 막걸리 한잔을 걸친다. 날도 좋고, 기분도 좋고, 이게 사는 거지. 옥석은 한참 막걸리를 들이킨다. 지나가는 어떤 여인도 옥석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골 아낙이래야 못생긴 년들뿐이라..’
옥석의 기분만큼 막걸리 병이 주변에 뒹굴고 있다. 자리를 나서기 위해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 옥석의 다리가 꼬여 바닥에 다시 앉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옥석의 흥얼거림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마당을 쓸고 있던 둘째 관수 부인이 옥석의 휘청거리는 걸음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현이 에미야. 넌 뭐라고 그렇게 생겼냐. 생긴 게 그러면 밥이라도 잘 해야지. 못난 것이 잘하는 것 하나 없이. 에잉.. 쯧쯧.”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옥석의 말에 관수 부인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진다. 흘겨보는 둘째 관수 부인의 눈빛이 사납다. 옥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방으로 들어선다. 대자로 누워 여인을 떠올리자 마음에 배꽃이 가득 피어난다.
오늘도 일어나자마다 옥석은 흰 모자, 흰 정장, 흰 구두, 3박자를 갖춘 후 대문을 나섰다. 사과 봉지를 가득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여분을 걸어 도착한 여인의 집 대문에서 옥석이 여인을 부른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자, 옥석의 마음이 조여온다.
"나 왔다. 아가야."
"..아버님, 오셨어요. 막 식사 준비 했는데.. 드시고 가셔요.”
한쪽 얼굴을 손으로 가린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어디 다친 게냐. 산돌이 놈이 때린 게냐. 어디 봐봐."
"아니요. 아버님. 넘어진 거예요. 집 근처 풀 뽑다가 그만 정신이 팔려 이렇게 됐지 뭐예요."
"정말이냐. 산돌이 놈이 그랬으면 이놈을 내가 가만 두지 않을 라니까. 말해봐. 그 놈이 자기 부인 귀한지 모르고. 산돌이 그놈이 맞지."
“아니에요. 아버님. 오늘도 혹시 오시면 아버님 드리려고 생선 구웠어요. 드시고 가셔요. 생선이 참 신선하고 맛있대요.”
생선을 내오는 고운 손과 여인의 울긋불긋한 얼굴이 옥석의 마음을 붉게 한다. 옥석은 한참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에 물기가 촉촉해진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결국 장으로 돌아선다. 장에 들러 막걸리 한잔만 하려다, 술이 가득 부어졌다. 옥석의 붉어진 얼굴과 몸이 하얀 양복과 대조를 이룬다.
‘이놈의 새끼. 때릴 데가 어딨다고. 그렇게 아까운 사람을.. 내 이놈을 내가 그냥.’
옥석의 마음이 울그락 붉으락 들썩이고 끓기 시작한다. 여인을 만난 후 무슨 감정인지도 모를 감정이 옥석을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옥석의 마음이 끓는 만큼 얼굴과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집에 들어가는 길 걸음도, 혀도, 마음도 꼬인다.
“현이 어멈은 혼자 밥만 잘 먹고, 만날 놀고 있지. 니가 밥이라도 잘 해야지. 에잇. 호랭이가 물어갈 년. 쯧쯧.”
부엌에서 불을 지피던 관수 부인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 지어진다. 매일 같이 여인과 비교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둘째 관수 부인 마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리고 여인을 향한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날이 갈수록 켜켜이 쌓여갔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마당을 나서려는 옥석을 보고 둘째 관수 부인이 말을 건다.
“아버님, 큰 형님 도시 나가 산다고 짐 싸던데 알고 계셔요?”
“그건 또 뭔소리냐.”
“큰 아주머님이 큰 형님이랑 살 집을 알아보셨다고 하더라구요. 지난 밤에 아범이 말해줬어요.”
혜령이가 두 살과 세살 사이 여인은 시골 살이를 접고 도시로 나간다고 했다. 옥석은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여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온 몸이 땀에 절어 대문 앞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내쉬고 여인을 불렀다. 여인은 잠깐 외출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옥석은 대문 앞에 서서 여인을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도시라고 해봐야.1시간이면 후딱이니까.’
옥석은 오히려 도시가 여인에게 더 잘 어울릴지 모른다고 마음을 쓰다듬었다. 여인이 떠나고 얼마 후 둘째 관수부인도 도시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조용한 집이 오늘따라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애꿎은 사과만 바닥에 굴리며 옥석이 달력을 바라봤다. 어렸던 인경과 춘풍도 어느 정도 자라자 옥석의 곁을 떠났고, 옥석은 혼자가 됐다.
옥석은 외로움을 사랑보다 먼저 배웠다. 그래서 옥석은 외로움을 느낄 때면 친구삼아 막걸리 한잔을 걸치곤 했다. 언젠가부터 시장에서 마시는 술도 외로움을 가시게 하지 못했다. 혼자가 되자 옥석은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산 인삼으로 술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손수 만든 인삼주를 약처럼 마셨다. 씁쓸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옥석의 외로움도 같이 쓸려 내려갔다.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살다 가는 게지. 내일은 혜령 어멈한테 갔다 와야지.’
옥석이 달력을 한참 바라본다.
도시로 떠나 자리를 잡은 여인의 집은 아름다운 정취가 있었다. 원래 집이란 이런 느낌인가 싶은 그런 향수가 곳곳에서 피어나왔다. 옥석에게 여인의 집은 고향에 온 듯한 그리움과 푸근함을 안겨줬다.
"잘 지내고 있었던 게지."
"아버님 잘 지내셨죠?"
혜령이가 걷고 뛰면서 주변을 지나다닌다. 아이들은 볼 때마다 자란다더니.. 혜령에게서 여인과 인화가 더 많이 피어올랐다.
"혜령이가 많이 자랐구나. 너도 좀 닮고 죽은 할미도 좀 닮은 같고. 널 닮아 더 이뻐질 게다. 여기 사과 받으렴."
고르고 골라 담아 깨진 데 하나 없이 붉고 예쁜 사과를 건넨다. 사과 장수와 입씨름하며 여러 번 바꾼 사과였다. 옥석은 마음을 건넨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이 귀한 걸. 요즘 사과들이 잘 안 됐다면서요. 비싸다던데. 고맙습니다. "
"사과 이게 뭐라고. 너만 건강하면 된다. 사과를 매일 아침에 먹으면 그리 좋다더라."
여인을 만난 후 옥석은 그동안 해 오던 새벽 4시의 기도에 여인을 위한 기도를 추가했다. 품에 안을 수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여인은 옥석에게 여신이었고, 구원이었고, 행복이었다.
한참 인삼주를 들이키던 한 낮의 해가 하얗게 하늘에 걸린 날, 범수로부터 옥석에게 여인의 소식이 전해진다. 여인이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위급하다는 소식. 소식을 전하러 온 셋째 범수는 여인이 매우 위독하다고 전했다.
‘나의 그녀가 왜.’
얼굴이 달아올라 가만 앉아있을 수 없던 옥석은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팽개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정신이 없어 3박자를 모두 갖추지 못하고, 마당을 나섰다.
조금만, 조금만, 지금 내가 가고 있응게. 조금만 더 기다려주련. 아가야.
4. 비가 오던 날
옥석은 바로 보이는 택시를 잡아타고 도시로 나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얼마를 건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비가 부슬 부슬 내려 옥석의 옷을 가득 적셨고,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이 불규칙했다. 옥석의 이마에 비와 땀이 섞여 구슬들이 가득 맺혔다. 비가 온 덕분에 병원 앞은 한산했다. 몇 층 몇 호실이라고 했더라. 그제야 옥석은 여인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젊은 여자 한명 죽어 간다고..”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관계는요?”
“이름은...”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하얀 병실 문 앞에 옥석이 한참 서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비에 젓은 옷과 구두가 축축했다. 문을 열고 나오는 범수와 얼굴을 마주한다.
“아버지 오셨어요. 안에 들어가 보셔요.”
범수가 연 문 안으로 여인이 보인다. 하얀 이불처럼 여인의 얼굴이 하얗다. 여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옥석은 종일 치성을 드렸다. 새벽 4시 기도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발 데려가지 말아주소. 인화를 잃은 후 여인을 위한 기도는 두 번째였다. 지난 번 정성이 부족했으니 이번엔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여인에 대한 기도는 신도 들어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성을 들여 빌고 또 빌었지만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비가 연일 세차게 내렸다. 여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기도로 매일을 보냈다. 그러다 여인의 마지막 날이 되자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다. 옥석은 ‘데려가소.’ 기도 응답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시간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눈 앞에 여인의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여인의 가녀린 팔이 보인다.
“아가 어쩌다 이렇게..”
여인을 살리기 위해 산돌은 그렇게도 돌아 다녔다. 백방 알아보고 다니다 양귀비 꽃이 효험이 있다는 말에 죽으로 만들어 먹였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고 했다. 말라죽는 식물처럼 조금씩 생명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옥석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여신. 그의 사랑. 그의 열망이었던 여인이 세상에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옥석은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한참 허공을 바라보던 옥석이 입술을 꽉 베어 문다.
‘나 때문에 죽은 그 놈들이 복수를 하고 있는 게지.’
옥석은 애꿎은 나무 잎만 가득 쥐어뜯는다. 닿을 수 없어 간절했던 그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간다. 연정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손 안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다시 돌아간 병실에서 눈을 겨우 뜨고 있는 여인을 모두가 바라보고 있다. 옥석은 여인의 얼굴이 보이는 곳에 멀찌감치 서 서 산돌이 울부짖는 모습을 바라본다.
장례식장.
“왜 그렇게 됐대요?”
둘째 관수 부인이 셋째 범수에게 묻는다. 옥석은 근처에 앉아 밥을 한술 뜨다 말고 귀를 기울인다.
“형님이랑 자주 싸웠대나 봐요. 형님 아기라고 뭔 남자아이를 여자가 데려 왔는데. 그것 때문에 싸우고. 그 여자가 매일 같이 형수님을 찾아왔대요. 형님이 돈을 좀 벌기 시작하니까. 그런 여자들이 생겨 난 게지요.”
“그래서요?”
둘째 관수 부인의 눈이 반짝인다.
“그러다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형님이 이야기해도 날마다 그 여자가 찾아와서 괴롭히니까.. 형수님이 사실대로 말하라고 형님 앞에서 약을 먹어버린다고. 그랬었나보더라고요. 또 데려온 애가 남자애였는데. 어째 형님을 좀 닮기도 했고. 형님이 또 아들 낳을라고 그렇게 형수님을 볶기도 했던 때고요. 그때 형님이 포도밭을 하고 있었지요. 지금은 팔아버렸고. 그 포도 농약할라고 놔둔 제초제를 한 모금 먹었다나 봐요. 형님 앞에서 보여 줄라고만. 그게 이렇게 된 거지라.”
“아이고.”
“운이 없을랑게. 그런거지요.”
“아이고. 하필..”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던 옥석이 여인이 죽은 이유를 듣고 얼굴이 붉게 끓는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던진 옥석이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 날부터 옥석은 산돌을 세상 누구보다 미워하게 됐다. 여인은 그녀를 대신할 두 아이를 남겨두고 떠났다. 고왔던 여인은 한 줌의 재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옥석의 마음도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여인이 떠나고 난 후 산돌은 관광버스 사업을 한다며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이 둘을 맡길 곳이 없어 아이들은 친척 집을 전전했다. 그러다 아이들은 결국 고아원에 맡겨졌다. 셋째 범수를 통해 옥석은 아이들의 근황을 전해 들었다.
아이들을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던 차에 어느 날 셋째 범수가 자신의 부인이라며 여자를 데려왔다. 여인보다는 덜 했지만 고운 얼굴의 아이였다. 범수는 옥석을 모시겠다며 고운 아이와 시골로 완전히 들어왔다. 고운 아이의 표정이 그리 밝진 않았지만 옥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도 힘들테지.. 그래. 이곳에 누가 옆에 있든 그게 무어라고.’
붉은 사과를 볼 때마다 여인이 생각났고, 여인에게 주기 위해 심었던 어린 사과 나무를 옥석은 도끼로 베어버렸다. 여인이 떠난 후, 옥석이 사과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산돌이 올 때다 사과를 한 박스씩 사왔다. 붉고 예쁜 사과만큼 산돌이 미운 옥석은 사과들을 텃밭에 거름으로 줬다.
옥석의 집에 식구가 생긴 후 고운 아이는 첫째 아이를 임신했다. 아이를 임신한 고운 아이는 옥석에게 이번이 두 번째 임신이라고 했다. 첫 아이를 도시에서 영양실조로 조산했고, 아이를 남모르게 묻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옥석은 그제야 고운 아이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보였다.
10개월 후 셋째 범수의 부인은 순탄하게 아이를 낳았다. 건강한 사내아이였고, 아이가 태어나자 옥석은 고운 아이를 한길 에미라고 불렀다. 한길이가 태어나자 집안이 아이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덕분에 집은 더 이상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아이의 분유를 사들고 셋째 범수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옥석의 방으로 범수가 들어왔다.
“아버지, 저 다녀왔서라.”
"그래, 그나 산돌이 놈 애들은 어디로 갔다냐. 고아원에 있능가. 지 외할미 집에
갔능가. 알아는 봤냐.“
아이들 소식을 한참 듣지 못해 옥석의 애가 닳고 있었다. 셋째 범수는 한참 뜸을 들였다.
"고아원에 있다가 입양 되려는 걸 겨우 설득해서 막았다나 봐요.. 아버지, 애들 중 하나를 제가 키우기로 했어요. 그 애들 중 하나를 다음 주에나 데려오려고요."
“그래.. 잘 했다. 산돌이가 새 장가 가기 전에 잠깐 맡아 키워도 좋지. 그나저나 한길 애미는 알고 있고?”
“애를 데려와서 이야기 하려고요.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할 거 같고. 애를 보면 또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 그러마 할 겁니다.”
산돌이의 관광버스 업은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일하는 것이 어려웠던 산돌은 외갓집에 아이들을 맡겼다. 그러나 아이들을 볼 때면 죽은 딸이 생각난 장모는 아이를 산돌에게 돌려보냈다. 산돌이 여러 곳에 아이들을 맡기는 일을 반복하다 결국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냈다. 그러다, 혜령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주민등록 번호가 필요하게 된 산돌이 범수에게 전화를 건다. 산돌은 혜령이와 둘째 경희 중 한명 만이라도 키워주면 범수가 하려고 하는 사업에 돈을 투자하기로 약속한다. 범수는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드디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선뜻 산돌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둘 다 키우기로 했고?"
"아니요. 첫째는 형이 키우기로 하고 호적만 제 앞으로 해 놨어요. 아무래도 홀아비 앞으로 올라가는 것 보다 부모 이름 둘 있는 곳이 낫겠다 생각했겠지요. 일단은 혜령이가 학교에 가야하니까 혜령이를 올려놓고, 둘째 경희를 키우기로 했어요. 형도 곧 새장가 갈 거 같고요. 둘째 경희가 아직 어리니까.. 데려오면 한길 엄마를 엄마로 알고 클 겁니다. 아직 3살 겨우 넘었으니까요.”
“그래, 잘 했다. 형제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래. 그래. 니가 사람이 된 놈이다.”
범수는 옥석의 말에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칭찬에 박한 옥석도 이 날만큼은 범수에게 칭찬을 가득 해 줬다.
700만원과 산돌의 둘째 경희가 옥석의 집으로 왔다. 부엌에서 일을 하다, 셋째 범수를 마당으로 마중 나온 한길 엄마가 아장 아장 걸어 들어오는 둘째 경희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범수와 옥석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길엄마와 눈이 마주친 범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키울라고.”
“네?”
“아버지랑 형님이랑 이미 다 말 끝냈고, 그냥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돼.”
이제 막 걷기 시작한 한길이 방문으로 빼꼼 내다본다. 한길 엄마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게요.”
“어야. 한길 애미야, 둘째만이라도 니가 잘 키워주렴. 얼마나 불쌍하냐. 네가 안 키워주면 입양 가야하고 남의 집에 종살이 보내는 거야.”
한길 엄마는 표정을 가득 굳힌 채 범수와 방으로 들어간다. 옥석의 방으로 한참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옥석은 그러다 말겠거니 하고 웃음을 짓는다. 옥석의 방에 들어와 앉아있는 둘째 아이 경희를 옥석이 가만히 바라본다. 둘째 경희는 붙임성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 옥석을 보면 항상 뛰어와 안기던 혜령이 생각나 옥석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이쁜 구석이래야 하나도 없구만. 도대체 귀여운 구석이라곤 쯧쯧. 왜 첫째가 아니고.’
옥석은 여인과 인화를 닮은 혜령이 보고 싶어졌다. 둘째 경희는 곧 잘 어두운 곳에 숨어 찾기 어려웠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아 아이가 있는 곳을 알기 어려웠다. 겨우 찾아내도 어김없이 다음 날이면 다른 곳을 찾아 숨었다. 산돌을 찾아 아이는 매일같이 울었고, 옥석은 경희의 행동들이 피곤했다. 결국 옥석이 범수를 불렀다.
“혜령이를 데려와서 여기서 학교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 아무래도 호적도 니 앞으로 있고, 둘째는 아직 사랑이 필요한 나이니까. 아빠가 키우는 게 낫지 싶다. 산돌이가 재혼할 여자를 찾았다지. 그 여자 밑에 있으면 아빠도 자주 보고 성격도 지금보다 밝아지지 않겠니."
“형한테 전화 해 볼게요. 아버지.”
혜령이 오는 날, 옥석은 누구보다 그 날을 기다렸다는 듯 혜령을 맞이한다. 옥석은 여인과 인화가 오는듯한 느낌이 들어 밤새 뒤척였다.
“오이구. 오구. 왔냐. 할애비가 보고 싶었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폭 안기는 혜령이 그렇게도 귀여울 수 없다. 옥석은 혜령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돌봐주겠다 다짐했다. 혜령이 오던 날, 옥석은 마당에 다시 사과나무를 심었다.
"몇 년만 지나면 저 놈이 사과를 열거다. 그러면 네게 제일 먼저 주지. "
옥석의 입가가 올라갔다. 사과나무 위로 단비가 내렸다.
5. 거울
첫 아이를 허망하게 잃은 후, 딸이라며 범수가 데려온 아이를 한길 엄마는 품을 수 없었다. 범수는 옥석과 혜령을 키워줄 것인지 한길엄마에게 묻지 않았다. 옥석과 함께 사는 일도, 혜령을 키우는 일도 범수는 먼저 행동을 한 후, 한길엄마에게 통고했다. 범수의 행동들에 한길엄마의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한번만 물어봐 줬더라면..’
한길 엄마는 잃어버린 딸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혜령이 웃어 보일 때마다 속이 쓰렸다. 내 딸이 누렸어야할 세상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딸은 8달 만에 세상으로 나왔고, 돈이 없어 그대로 마음에 세상에 묻어야했다. 한길 엄마는 혜령을 볼 때마다 잃어버린 딸이 생각나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범수의 선택들이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옥석은 오늘도 혜령을 깨웠다. 눈을 비비고 일어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혜령이 옥석을 바라본다.
“사람은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공부를 해야 해. 자, 할애비를 잘 봐. 이렇게 손을 모으고, 절을 하고, 비는 거야.”
새벽 4시 기도가 끝나자, 옥석은 종이를 한 장 꺼낸다.
“이리 와서 앉아봐. 자. 학자는 이렇게 아침에 먹을 갈고, 붓글씨를 쓰는 거야. 오늘부터 혜령이 너도 한자씩 써가면서 외워야 한다.”
“할아버지 너무 어려워요. 이거 꼭 해야 해요?”
큰 붓을 들고 혜령이 팔을 부르르 떤다.
“하다보면 잘 할 수 있을게다. 처음부터 잘하는 놈이 어딨다고.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해야지.”
혜령은 매일 아침 옥석과 함께 기도를 하고, 붓글씨를 썼다.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옥석은 때마다 혜령에게 천원씩 줬다. 혜령의 얼굴이 작은 배꽃처럼 피어났다.
옥석은 혜령이 커갈수록 여인을 떠올렸다. 인화와 여인을 닮은 아이, 혜령을 볼 때마다 옥석은 얼굴을 붉혔다.
‘아버님.’
그 고운 목소리를 한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옥석은 방긋 웃는 혜령을 통해 여인을 떠올렸다.
‘그래, 혜령이를 보내준 건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암 그렇고말고.’
"사과를 많이 먹어야 여자는 예뻐지는 거다. 여자는 사과처럼 고와야 해. 네 엄마는 정말 아름다웠다. 너도 크면 엄마처럼 될 게다."
옥석은 혜령에게 매일 사과를 먹게 했다. 혜령은 기억나지 않는 엄마처럼 예뻐지고 싶어 매일 사과를 먹었다.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옥석의 여인을 대신해 혜령이 옥석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옥석은 혜령을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혜령은 자주 아팠다. 하루 나절 괜찮다싶으면 다시 앓아눕곤 했다. 기관지염, 천식 그녀가 가진 병이라고 했다. 부서질 것처럼 약한 존재가 또 사라질까 옥석은 몸을 오소소 떨었다.
혜령이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막내인 춘풍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 셋째 범수의 부인 한길 엄마에게 아이가 하나 더 생겼다. 작은 흙집에 여러 살림이 늘었다. 둘째 관수 부인이 떠나간 자리에 한길이 어멈이 들어왔고, 혜령이가 앓아누워있던 자리에 춘풍이 들어왔다. 춘풍이 돌아온 후 혜령의 방은 옥석의 방으로 바뀌었다.
춘풍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화가 떠났다. 그래서 춘풍은 이름처럼 도시들을 떠돌았고, 봄바람처럼 여름과 가을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다.
‘그것도 지 삶이지.’
옥석은 춘풍을 바라보며 차라리 잘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석은 부서질 것처럼 약한 혜령을 가장 좋은 자리에 뉘였다. 자신이 눕던 자리였다. 한길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가장 좋은 이부자리를 폈다. 혜령이 기침을 할 때마다 들여다보기를 반복했고, 옥석은 다시 여인을 위한 세 번째 기도를 시작했다.
옥석은 시골 삶이 넉넉하진 않아도 그만한 정취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혜령이 오고 나서 그의 삶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혜령은 옥석의 곁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였다. 옥석은 혜령을 데리고 논과 밭에 새로운 작물을 심기 시작했고, 가을 무렵엔 작물들을 내다 팔았다. 염소도 열 마리를 사서 키우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혜령과 염소 막에 소금과 사료를 주러갔다. 옥석의 주머니가 넉넉해지자 이웃과 나눠먹을 수 있는 넉넉함도 생겼다. 여인이 떠난 후 옥석의 마음은 차츰 혜령에게 자리 잡았다. 재처럼 타버린 옥석의 가슴에 봄바람이 불어왔다.
어느 날 혜령이 울며 들어왔다.
"할아버지, 나도 엄마를 따라가고 싶은데, 나는 두고 한길이랑 운길이랑만 간대요. 엄마는 왜 나만 두고 가지. 흑흑"
연신 눈물을 소매로 닦던 혜령이 한길엄마와 한길이, 운길이가 탄 차를 한참 따라갔다고 했다. 그 자동차는 바다로 간다는 이야기만 들었다는 혜령이, 한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혜령이 자동차를 따라 뛰어갔지만 자동차는 아이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혜령이 바닥에 앉아 한참 울다 옥석에게 왔다고 했다. 혜령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옥석이 말한다.
"나도 두고 갔어. 그러니까 너만 집에 있는 게 아니다. 나도 여기 있어. 그러니 혼자가 아니야."
‘연병할 년 같으니라고.’
옥석이 한길 엄마를 작은 목소리로 욕한 후 혜령을 바라봤다.
“할아버지랑 나는 다르잖아.”
옥석은 혜령에게 천원을 쥐어줬다.
“이걸로 먹고 싶은 거 사먹어라. 그거면 니가 사고 싶은 걸 다 사먹을 수 있을 게다.”
언제 울었는지 울음을 멈춘 혜령이 신이나 뛰어 나간다. 그 모습을 옥석은 한참 바라본다. 부러질 듯 부서질 것 같은 혜령의 가녀린 몸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손을 움켜쥐었다. 한참 후 맛있는 사탕을 두개 사와서 옥석에게 나눠주는 혜령의 표정이 개구지다.
"할아버지도 하나 먹어봐. 엄청 맛있어. 이거 할아버지니까 주는 거야. 할아버지만
먹어야 해. "
여름 휴가를 다녀온 아이들과 한길 어멈은 새까맣게 타 왔다. 가녀리고 하얀 그녀와 상반된 모습으로 껍질이 벗겨진다며 유난을 떠는 한길을 바라보는 혜령의 눈빛에 빛이 난다.
"재밌었어?"
"응, 엄청 바다에 뭐가 많아."
“좋았겠다. 다음에는 나도 꼭 같이 가면 좋겠다. 한길이는 엄마가 좋아해 주니까 좋겠다.”
혜령은 밤마다 잠이들면 어김없이 산돌을 부르고, 엄마를 불러댔다. 혜령을 보면서 옥석은 여인을 떠올렸다. 여인과 인화를 닮은 둥근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이 피어난다.
“아빠가 보고 싶어. 할아버지. 아빠는 왜 나를 안 보러와? 아빠가 전화는 했어?
엄마는 어디 멀리 갔어? 엄마는 정말 죽었어? 죽는 게 뭐야? 이제 못 돌아와? 아빠는 내가 싫대?”
물음이 많아진 혜령을 한길 엄마가 교회에 보내기 시작했다. 교회에 보내고 나면 혜령이 한길 엄마와 옥석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한길 엄마는 한길이와 혜령을 일요일 아침이면 깨워서 교회에 보냈다. 방문을 열고 안에서 붓글씨를 쓰던 옥석이 아이들이 마당을 밟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혜령이 나가다 옥석의 방 앞으로 고개를 내민다.
"교회 가기 싫은데. 할아버지. 나 텔레비전 보고 싶어. 지금 시간에 재밌는 거 하는데. 맨날 교회 가야해."
입이 퉁퉁 부어 나가는 혜령이 몇 시간 후 교회에서 돌아왔다. 그러고서 혜령이 옥석에게 과자를 한 아름 안겨준다.
"할아버지 내가 만화도 버리고 가서 받은 거야.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거래. 내가 악한 놈한테 이긴 거래. 선생님이 그래. 오늘 예수님한테 기도했어. 엄마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할아버지도 새벽에 예수님한테 기도하는 거야?"
옥석의 새벽 4시 기도만큼 혜령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커져가고 있었다.
‘나를 닮은 겐가.’
예수님을 알게 됐다는 혜령이 교회가서 자주 집에 늦게 왔다. 뭘 그리 빌 것이 많은지 눈과 코가 퉁퉁 불어있다.
"어디를 그리 쏘다니고 다녀."
"할아버지, 내가 엄마가 없어서 친구들이 안 놀아줘. 오늘은 소꿉장난 하는 아랫집 아이랑 저쪽 사는 아이랑 있길래.. 같이 놀자했는데, 걔들이 그래. 자기 엄마가 나 엄마 없는 애라고 놀지 말랬대. 그리곤 말도 안 해. 그래서 교회에 앉아 있다 왔지.나한테는 할아버지가. 예수님이 유일한 친구야."
친구를 가질 나이에 혜령은 옥석처럼 외로움을 배워가고 있었다. 혜령을 보며 옥석은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불쌍한 것. 어찌 나를 닮아서. 아프지마라. 아가야. 죽지마라.’
금방이라도 죽어 사라질 것 같이 혜령이 아팠다 살아났다를 반복했다. 그 즈음 춘풍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바람처럼 집에 들어와 옥석에게 소리 질렀다.
"아부지가 한번이라도 날 사랑해 줬어요? 나를 가르치지도 않고.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건 아부지 때문이라고., 왜 그렇게 돈도 없으면서 애들은 많이 나아가지고. 나는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버린 자식이지."
춘풍의 원망이 옥석을 향할 때면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 새끼. 낳아주고 길러준 게 어디라고.’
춘풍은 저녁마다 옥석과 다퉜다. 결국 주먹까지 오가게 됐고 서로를 때릴 수 없던 그들은 옆에 있던 혜령을 대용품으로 사용했다. 그때만큼은 옥석도 혜령의 존재를 잊는 듯 했다.
혜령은 자주 눈알이 터지고 얼굴이 부어 학교에 갔다. 온 몸에 멍이 들어도 한길
엄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건지, 몰랐던 건지 한길 엄마는 혜령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춘풍은 혜령을 언제 때렸냐는 듯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목소리로 혜령을 밖으로 불렀다.
"령아, 좋은 거 사러가자. 삼촌이 다 사줄게."
시골에서 가장 예쁜 것들이 가득한 가게로 춘풍은 혜령을 데리고 갔다. 평화상회. 평화를 파는 가게였다.
“다 사줄게. 골라봐.”
혜령은 몇시간이고 고르고 골랐다. 눈알이 터지고, 얼굴이 부은 상태에서 머리에 찌르는 핀들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공주풍의 머리띠와 머리핀들이 혜령의 얼굴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날부터 차곡차곡 모은 머리띠와 머리끈들은 바구니를 다 채우고도 부족할 만큼 넘쳐났다.
어느 날부터 혜령은 다 떨어진 노란색 머리띠만 매일 하고 다녔다. 옥석은 그런 혜령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옥석은 혜령의 멍든 얼굴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쁜 건 다 놔두고. 그걸 왜.’
춘풍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다음 날이면 세상 사랑을 다 줄 것처럼 푸근하게 혜령을 안아줬다. 어린 시절부터 산길에게 매일 맞고 자란 춘풍은 혜령을 볼 때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바라보던 옥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혜령이 국민학교 3학년이 될 무렵이었다. 옥석은 조용히 혜령을 바라본다.
‘많이 자랐구나. 날이 갈수록 고운 것이.’
혜령은 조금씩 조심씩 더 자라가고 있었다. 해가 바뀔수록 여인의 모습이 뚜렷해져갔다. 혜령은 옥석에게 위안이 되었고 구원이 되었다. 새벽 4시 기도를 간절히 마친 후, 옥석이 혜령을 내려다본다.
‘고 녀석. 참 고운 것이.’
혜령을 바라보며 옥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옥석은 잠이든 혜령을 깨워 욕실로 데리고 나간다.
"여자는 청결해야해. 할애비가 어떻게 씻는지 알려주마. “
“할아버지 나 엄마가 씻겨줬어. 안 씻어도 돼.”
“혼자 씻을 수 있어야해. 할애비가 잘 가르쳐 줄 테니까. 앞으로는 혼자 씻는 거야. 엄마 귀찮게 하지 말고.”
몸에 옷을 다 벗기고 옥석은 차근차근 그녀를 씻겨나간다. 작은 아이, 아직은
여자가 되기엔 먼 혜령을 옥석은 성스러운 조각상을 만지는 것처럼 차분히 씻겨간다.
“가만히 있으면 돼. 할애비가 이런 거 알려줬다고 씻겨줬다고 누구한테 말하면 안 된다. 그러면 집에 큰 일이 생겨. 알았지. 너 때문에 사람들이 다 다치게 되는 거야. 한길 엄마도 다쳐. 알지. 그러니까 너랑 나랑 만 비밀이다. 아직 여기는 덜 컸구만.”
혜령은 옥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만 더 자라면 가능하겠어. 조금만 더 자라면 된다.’
조용히 읖조리는 옥석의 말을 혜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령에게 할아버지는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유일한 가족이 되어준 사람, 유일한 친구. 어린 혜령은 할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나름 쌓아 나갔다.
할아버지와 같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날, 혜령은 엄마를 생각했다.
“조용히 해.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건 너와 나만 아는 거야. 좋은 거야. 원래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되는 건데. 할애비가 너한테 먼저 알려 주는 거야. 나중에 할애비를 고맙다고 할 거다. 너가 스무 살이 되도 할아버지는 어려. 엄청..”
옥석은 혜령에게 여러 번 타일렀다. 한길 엄마에게 말하면 한길 엄마가 다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혜령 과의 밤은 옥석에게 있어 여인과의 연결이자 인화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옥석은 혜령을 이끌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근데 이게 뭐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그래, 너가 가만히 말만 잘 들으면 천원씩 주마. 좋은 거야. 할애비 믿지..”
옥석은 의식이 끝날 때마다 헤령에게 천원을 줬다. 그렇게 준 천원들이 모여 저금통이 터지던 날 혜령은 학교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 학교 선생님이 그러는데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거. 그런 거 있으면 손을 들어 랬어. 내일도 다시 온다는 데 손 들어야해? 들까 말까 하다가 할아버지가 엄마 다친다고.. 해서 안 들었어. 내일은 어쩌지?"
옥석은 무척 놀라는 표정으로 혜령에게 말한다.
“아니, 그건 말하는 게 아니야. 그놈들이 거짓말로 널 속이는 거야. 집에 큰일이 생겨.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알았지? 약속하는 거다.”
“응, 손 안 들게. 손 안 들면 되지.”
“그래,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일 할애비한테 곧장 오고.”
“알았어. 응.”
옥석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자 잡아가지 마소 기도를 곧장 올리기 시작했다. 잠이 든 혜령의 얼굴이 거울처럼 여인을 비춰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