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신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살다 보면 삶을 견디기 위해 무엇인가에 의존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있다. 아이는 부모에게, 부모는 아이에게 혹은 자신의 부모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등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 신도 인간이 사람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의존성을 심어 놓으셨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테니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존성은 건강한 의존성을 말한다. 한쪽으로 치우쳐 병에 가까울 만큼 문제 있는 의존성은 제외한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불현듯
"나는 한번 아니면 영원히 아니야. "
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도 최근에 했던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을 얼마나 미워했는데 내가 하다니. 놀라웠다. 물론 내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이 말을 하게 한 대상은 최소 10년을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었다. 이제야 겨우 뱉은 말이기 때문에 사실 과한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 이유는 이 말이 나를 키운 어머니께서(나는 5살 무렵 친척 집에 입양됐다.) 어린 시절 내내 내게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팍팍한 시골 삶과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화가 가득 나 계셨다. 그래선지 그녀는 고운 말보다 독한 말들을 내게 자주 내어 놓으셨다. 어쩌면 그녀는 그렇게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선지 나는 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 오늘도 그녀를 떠올리면 얼굴에 어떤 표정을 그려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밭에서 풀을 메면서, 음식을 하면서, 청소를 하면서, 그녀는 내게 이런 말들을 뱉어 냈다. 어른이 된 내가 과거의 그녀를 생각하니 살아야 했기 때문에 미움을 실어야 할 대상이 필요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대상이 내가 됐을 뿐이고. 어머니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내게 의존하셨고, 나는 정서적 폭행의 피해자가 됐다. 어머니의 잘못된 방식의 의존성 덕분에 어린 나의 마음에 숱한 못이 박혔다. 그래서 나는 오늘까지 그 말을 참 미워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한 심리학 책에서 극복하기 위해 넘어설 때까지 계속 같은 상황과 대상을 선택해 반복한다고 했다. 덕분인지 나는 웬만해선 독하고 나쁜 말들을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어머니와 비슷해 보이거나 느낌이 나면 멀리서부터 도망간다. 드디어 이 나이가 돼서야 겨우 넘어선 건가 싶다. 이젠 그런 비슷한 분들을 봐도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고, 애착도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머릿속에 빨간 등이 켜진다.
한번 말로 박힌 못은 마음에서 제거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말을 하기 전 말을 고르고 또 고른다. 이런 내가 독한 말을 뱉었다면 내 세상에서 상대를 제거하겠다는 나만의 선언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어머니께서 그 말을 내게 한 계기는 머리를 길겠다고 선언하고부터였다.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머리를 길러 예쁘게 묶거나, 정갈하게 내려 참 예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달에 한번 어머니 손에 붙들려 미용실에 가서 귀 밑으로 단정하게 잘라야 했고, 내가 보기에도 참 예쁘지 않았다. 머리를 볼 때마다 참 부끄러웠고, 오랫동안 길고 찰랑이는 머리는 꿈에서나 해 볼 수 있는 머리 스타일이었다. 중학생이 될 무렵부터 사춘기를 핑계로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어머니는 그때부터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셨다. 머리를 긴 대신 그때부터(사실 오래전부터였지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잃었다.
"나는 한번 아니면 아니야. 너는 고집도 세고, 말도 안 듣고, 내가 왜 너 같은 걸.. 너 같은 건 쳐다보기도 싫어. 말도 섞기 싫고."
어머니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 나를 볼 때마다 고개를 돌리곤 이런 말들을 내게 가득 안겨 주셨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나는 그녀의 정면 얼굴보다 뒷모습을 주로 보게 됐다. 그녀는 정말 나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나를 마주할 때면 항상 등을 돌렸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오랫동안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들을 참 미워했다. 그랬던 내가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는 걸 인지하고 놀랐다. 나도 모르게 아뿔싸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번 아니면 영원히 아니라니. 신도 아니면서 무슨 근거로 인간을 판단하고, 무슨 자신감으로 인간을 재단한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을 상처받았든, 상대가 내게 어떻게 했든 그 상대를 한번 아니면 영원히 아닌 상대로 낙인찍어도 될까. 내게 별로인 사람도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일 수 있는데 내 마음대로 인간은 고쳐쓸 수 없는 존재라고 박재해도 될까.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복잡한 생각들이 뒤엉켰다. 지난 과거들 속에서 분명 내게 상처 입혔던 사람, 그 사람 덕분에 인생이 얼마나 지난해 질 수 있는지, 마음이 얼마나 깨져버릴 수 있는지 경험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영원히 고쳐 쓸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이름을 달아도 될까.
가끔 내가 미워했고, 싫어했던 말이나 행동들을 내가 불쑥할 때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곤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내가 비슷한 행동과 말을 하고서야 깜짝 놀라 불쑥 튀어나온 감정의 꼬리를 감춘다. 그리고 과거에 경험했던 사람들이 보여준 말이나 행동과 비슷한 것들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면 어김없이 그 타인을 미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미운 감정, 미운 말, 복잡해진 마음속에서 한참 헤매다 나를 다시 다독인다. 미워하는 미운 마음을 고치려다 내가 미워진다. 그러다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도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미워해도 괜찮아. 뭐 어때. 이 감정도 지나가겠지. 라며 나를 탓하지 않는다. 나를 부드럽게 대하고부터 타인에게서 발견한 구 가족의 모습들에도 많이 관대해졌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나도 신이 아니고, 타인도 신이 아니니까. 그땐 상황이 어쩔 수 없었으니까. 라며 흘려보낸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아픈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마음을 톡톡 두드린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막 수확한 버섯으로 요리를 만들어 접시에 가득 담고 오늘 사랑하는 남편과 맛있게 나눠 먹었다. 그래, 오늘 행복하니까. 그래서 나는 감사하다. 과거는 오늘의 나다움을 갖게 해 준 경험이니까 감사하면서 오늘을 산다.
나도, 상대도 자연스럽게 놓아두자.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주 아주 긴 머리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긴 머리를 대가로 어머니의 얼굴을 잃었으니 긴 머리까지 잃을 순 없지. 하하.
나는 이제야 건강한 의존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의존성은 나와 상대 모두를 존중하는 걸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