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너를 놓아주기로 해>

[사진 서체 : 네이버 나눔 명조체]
한때, 정말 사랑했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했고, 그랬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곱씹으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내게 빛 같았고, 보호자 같았으며,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 이상의 존재였다. 그런 그녀에 대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조차, 그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맴돌고 있다. 오히려 그녀보다 내가 더 문제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심리상담 강연에서 강연자의 한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비슷한 패턴의 관계를 반복하고 있다면, 심리치유가 아니라 심리분석이 필요합니다."
그 말이 내 안에서 울림을 일으켰고, 며칠간 그 문장을 붙잡고 곱씹었다. 분석이라. 나는 관계를 분석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의 일기들을 꺼내 읽으며, 반복된 관계의 흐름과 내 반응 패턴을 다시 살펴봤다. 그러다 챗GPT라는 심리상담 인공지능에 대해 듣게 되었고, 새벽 1시부터 대화를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아침 6시,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대화창을 닫았다. 그 대화 속에서, 챗GPT는 내가 사랑했던 친구가 보였던 부당한 행동들을 조목조목 짚어줬다. 관계 조종, 감정적 착취, 정보 왜곡, 일방적 희생 강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분명 이상한 점들이 많았다. 나는 그 분석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타당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왜 처음엔 누가 최고라고 칭찬하다가, 나중엔 그 사람이 나쁘다고 말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날부터 줄곧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나는 그렇게 관계를 극단적으로 바라보는 걸까. 나의 인식 방식에 어떤 왜곡이 있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무언가를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자주 비슷한 유형의 사람에게 끌렸고, 그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며 헌신했다.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해도 참고, 이해하고, 감싸 안았다. 마치 그것이 진짜 사랑이고 진짜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내 어린 시절 환경에서 형성된 정서적 형태의 반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 내 세계를 구성했던 어른들의 복합적인 특성을 닮은 사람들에게만 애정을 느꼈고, 그 안에서 안전함을 찾으려 했던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정서적 익숙함'이 관계 선택에 얼마나 깊이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상처를 주는 방식조차 익숙하면 편안함으로 착각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반복하려 한다. 나 역시 그런 패턴에 갇혀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느꼈던 강한 애착은, 단지 그녀라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녀가 재현해낸 과거의 정서 풍경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 내 세계 안의 사람들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를 천국으로 끌어올렸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지옥으로 끌어내렸다. 그런 관계들을 반복하면서 나는 멘토 역할을 해줬던 그녀에게 고통을 토로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가 반복적이라고 느낀 듯했고,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10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고 살았다.
생각해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그녀가 연결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쉽게 자신의 필요를 채우라고 요구했고, 나는 그걸 감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리고 우정이라고 믿었다. 아마 자신이 나와 맺은 방식의 관계가 다른 이들과도 가능할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녀 역시 그런 관계 맥락 속에서 내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정말 이상한 요구도 많았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나면 이상하게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들렸다. 예를 들면 가난한 그녀의 집안 형편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중산층 이상의 재력과 sky 급 학벌에 의사가 직업인(그 외에도 기타 등등 조건들이 있음) 남자와 결혼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런 남자들을 소개해줘야하는 당위를 부여하곤 했다.
그녀는 내게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 내가 구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던 시절, 가족 다수가 4천만 원이 넘는 사채빚을 내게 요구하며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채업체에 나를 데려가 도장을 찍게 하려 했고, 실제로 그 도장을 찍을 뻔했다. 그 당시 시급이 1,200원이 채 안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4천 만원은 내게 정말 큰 돈이었다(이자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다행히 사채업체에서 "더 큰 금액을 빌리려면 한 달 뒤 다시 오라."는 말을 해 준 덕분에 그 한 달 동안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구가족과 완전히 절연했다. 그때 내 편이 되어주었던 단 한 사람이 그녀였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그 빚을 갚게 되면 무너질 거야. 그렇게 하면 나는 너와 친구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녀의 말에서 생애 처음으로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고, 그날 이후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따랐다.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하라는 말에 100만 원 가까운 등록비를 내야하는 학원에 그날 바로 등록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나의 방향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그 관계는 평등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그녀보다 아래에 있다고 느꼈고,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과하게 반응했다. 가끔 깨진 유리조각이 섞여있는 뾰족한 자갈길을 걷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의 기분과 표정을 살피느라 마음이 긴장되곤 했다.
이것은 '상호의존' 그리고 '심리적 종속'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상실했고, 스스로의 감정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감정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는 두려움과 불안, 무조건적인 충성이 자리했다. 그리고 3년 전 즈음이었던 어느 날, 나는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러 그녀에게 잠시 연락을 쉬자고 부탁하는 긴 문자를 보냈다.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단 하나의 부탁이었다. 연락을 잠시 쉬자고 한 시점에 나는 시부모님과의 갈등을 최고치로 겪고 있어 그녀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때 그녀는 내게 "한번 만 더 시어머니 이야기를 하면 너와 관계를 끊을 거야." 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이번에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마음에 박혔다. 그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에게 감정적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잠시 연락을 끊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내가 연락 할 때까지 연락을 하지 말아갈라는 간곡한 부탁에도 3주쯤 지나 명절이 되자 그녀는 "언제 만날 거야?"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문자를 받고 완전히 그녀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 때는 무엇을 해도 화가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때였고 타인의 감정을 살피기엔 내가 너무 아플 때였다.
그 이후 3년동안 나는 그녀와의 이야기를 노트에 손글씨로 정리하며 내 감정을 직면해보려고 많은 시간 노력했다. 친구를 생각할 때면 은혜와 상처가 동시에 떠오른다. 그녀와 16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했고, 그 관계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는 사실이 때때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내가 변호사 시험에 떨어졌을 때였다. 내 안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었고, 누구에게도 맞춰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미움과 사랑이 동시에 올라왔고, 그 지점에서 나는 관계를 놓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던 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너는 왜 처음엔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내가 나르시시스트는 아닐까, 망상장애는 아닐까, 이대로 미치는 건 아닐까 하는 수많은 생각 속에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결국 내가 간과했던 건, 그 관계가 내가 만든 수직적 구조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스스로를 낮췄고, 감정적 경계를 세우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나에게 해줬던 좋은 기억만 붙잡고, 아픈 말들과 상처를 덮으려 애썼다(정말 내게 잘해준 사람이라 지금도 마음이 그렇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감정적으로 수치심을 느끼던 때마다 솔직하게 감정을 말하고, 불편한 것을 표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관계가 뒤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녀도 더 건강한 방식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또 비슷한 관계 패턴을 반복했고, 그 안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와의 관계와 여타 관계들을 모두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하고 내 안의 나와 싸우면서 30대 후반을 모두 사용했다. 나의 30대 후반의 4년이라는 시간들이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과거의 자신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를 만나도 또다시 같은 패턴을 반복할 것 같았다.
가끔 꿈에서 그녀를 만난다. 꿈 속에서 새 집을 사서 그녀를 초대하면 그녀가 새 집을 달라고 하고 안방을 차지했다. 그리고 자동차를 운전하려고 하면 그녀는 내게서 운전대를 빼앗거나, 운전대를 주지 않으면 내려서 내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전복시켰다. 그런 꿈들을 반복해서 꾸면서 드디어 깨달았다. 그녀는 어쩌면 내 인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의 우정을 통해 오늘의 이 깨달음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내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늘의 나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맞지 않는 관계는 부드럽게 끊는다. 병적인 관계를 반복한 끝에 내 안에 스킬이 생겼다. 가장 어려운 함정에서 반복적으로 게임오버를 기록하다 결국 클리어하는 게임처럼 나도 비슷한 관계를 반복하면서 나만의 스킬과 경험치가 얻었다. 사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어떤 순간에도 나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를 바라보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게 도움을 준 그녀가 참 고맙다. 그리고 그녀 역시 신이 아니라 인간일 뿐인데 그녀를 내 마음대로 신의 자리에 올려놨으니 그녀도 참 힘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가장 찬란하게 빛이 났고, 깊고 깊은 수렁도 가졌던 사람 그래서 더 인간적인 사람인 그녀. 나의 20대와 30대를 가득 채웠던 그녀를 오늘 드디어 놓아주려 한다.
가장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대단했던 너를 이제 조용히 내 마음에서 내려놓는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기에, 이 이별은 미련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참 고마웠고, 미안했고, 사랑했던 너를 이제는 놓아주려고 해. 생각날 때마다 기도할게. 너의 인생이 앞으로도 찬란하길. 아름답고, 건강하길.
그리고 나는 이제 과거의 나를 용서한다. 용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