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과거 잘못된 선택들로 시간들을 채운 덕분에 뼈가 저리도록 후회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연인, 해야 할 것들,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우리는 적절하게 잘 선택해 채워야 한다.
한 인간의 삶에 주어지는 열정, 시간, 재화, 건강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으로 삶을 채우면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굽어지게 된다(어쩌면 예상하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겠지..). 무엇보다 선택들이 미치는 영향의 최종 결과는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
태어나면서 주어진 가족은 신이 주셨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족이 너무 유독해서 삶을 갉아먹을 정도라면 부모, 형제, 친척 상관없이 반드시 삶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살고, 가족도 살 수 있다. 가끔 잘못된 판단으로 가족이 살 수 있다면 내 한 몸 희생하지라고 선택하는 경우도 있는데 결과는 대부분 긍정적이지 않다. 원 가족도 의존형 인간이 되고, 나 역시 의존의 형태인 돌봄 중독자(공동의존자)가 되어 함께 파괴된다. 그리고 그 형태를 영원히(누군가 끊지 않는 한) 반복한다. 부모님의 선택으로 태어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건 신의 은총이지만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이 은총을 온전히 받았을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어려운 일이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사랑을 많이 받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가정에 직접 들어가 보니 엉망인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총체적으로 건강한 내리사랑이 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모 역시 사람이고, 부모라는 역할이 처음인 데다, 자신의 원 가족의 영향을 받아 삶을 답습하기 때문이다(답습 / 출처 - 네이버국어사전/ 예로부터 해 오던 방식이나 수법을 좇아 그대로 행함.). 여러 가정이 잘못된 가정의 형태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학대자와 피해자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은 원래 이런 거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르고,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겪는다는 인지부조화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신념과 내면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잘못된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인지부조화 / 출처 - 위키백과 / 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란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 생각, 가치를 동시에 지닐 때 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불편한 경험 등을 말한다.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 부조화 이론은 사람들의 내적일관성에 초점을 맞췄다. 불일치를 겪고 있는 개인은 심리적으로 불편해질 것이며, 이런 불일치를 줄이고자 하거나, 불일치를 증가시키는 행동을 피할 것이다. 개인이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겪을 때 공격적, 합리화, 퇴행, 고착, 체념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부모님 중에는 낳아줬기 때문에 갚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다. 안타깝게 나도 이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는 부모님을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유독한 것인지 겪어봐서 안다. 한 인간이 태어나기 전 그 인간이 태어나는 건 타인인 부모의 선택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 태어난다. 그러니 낳아준 은혜를 갚으라는 건 어불 성설이다. 그리고 사회 관습, 법적으로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당연히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 자신도 한 인간인 성인으로 자라는데 원 부모들에게 받은 것처럼 당연히 자신이 선택한 자녀를 자신이 최선을 다해(자기 환경 안에서) 키워야 할 책임이 있다.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는 것이다. 대신 선택한 인간을 기르면서 누리는 온전한 기쁨을 선물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부모들은 낳아줬으니까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착취하고 정서적, 신체적으로 파괴한다. 자신들이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마음이 깨진 상태로 성인이 되고, 성장해야 했을 어떤 단계에서 영원히 멈춘 상태에서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된다. 머리만 하얗게 바랜 성인 아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신체 나이와 진짜 나이는 항상 같지 않다.
우리가 돌보기 위해 기르는 개와 고양이를 생각해 보자. 개와 고양이는 주인의 돌봄과 여러 가지 혜택들을 누리지만 딱히 뭔가를 하지 않는다. 주인 역시 뭔가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처리한다. 반려 동물은 주인에 의해 선택되어 집에 오고 그 이후부터 씻기고, 먹이고, 기르면서 들어가는 노력과 재화가 상당하지만 갚으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을 기르면서 누리는 기쁨이 그것들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른 것에 대한 은혜를 갚으라고 이야기하는 건 온전히 먹기 위해(미안해.) 기르는 가축들에게다. 인간은 그들에게 먹이고, 기르면서 들어가는 노력과 재화를 고기와 가죽, 노동력(소의 경우)으로 보상받는다. 그러니 낳아준 은혜를 갚으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님을 만난 아이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먹기 위해 기르는 소와 돼지, 닭과 같은 느낌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을 만났을 때 참 당황스럽다.
법률 스님의 한 강연에서 스님이 말씀하셨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부모로서 당연히 낳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라고. 다만 스무 살이 넘으면 인간대 인간이기 때문에 받은 만큼 주고, 주는 만큼 받는 일대일 관계가 된다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듣다 보면 오히려 명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기독교인인 내가 법륜 스님의 강의를 기독교 방송보다 많이 들을 수밖에. 갚지 못할 은혜를 갚으려면 얼마만큼 해야 끝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인간으로 온전한 역할을 하기 전까진 길러줄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은 뒤로하고 낳아준 은혜를 갚으라니. 그리고 성인이 되면 낳아줬던 은혜를 갚으라며 한 없이 뜯어내는 테이커 부모님들도 있다. 또 어떤 자녀들은 자기가 선택해 낳아놓고 부모, 형제에게 아이를 떠넘기는 경우도 있다. 낳는 선택을 스스로 해 놓고, 자기가 덜 힘들기 위해 원 가족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돈까지 교묘하게, 대놓고 뜯어내는 경우도 있다. 참, 상전이 아닐 수 없다.
낳아서 길러주기까지 했는데 이제 자기 자녀까지 떠맡으라고 책임을 넘기는 인간들이 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자녀는 성인이 되면 부모님에게 대들게 된단다. 항렬이 같으니까. 받아야 했을 사랑을 부모에게 받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 과보(과거의 인과응보)를 모두 사춘기 때 받는 거라고 법륜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도, 자식도 서로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돌아가서 아이들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갚으려고 노력하다 지치고, 파괴된다. 도대체 낳아준 은혜의 크기는 얼마나 되며, 얼마만큼 해야 다 갚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부모 본인도 원 가족인 부모에게 모두 갚았을까?라는 물음이 든다. 아이는 깨진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받지 못한 사랑과 떠넘겨 받은 부모의 책임에 허덕이다 성인아이가 된다. 그래서 어쩌면 요즘 성인 자녀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와 똑같이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길러준 은혜를 갚아야 하니까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돌봄 노동과 농업과 축산업에 동원되는 강요를 받았다. 그리고 역시 보상이 없었다. 보상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은혜를 갚는 노동을 할 때마다 주변에 있는 여자 어른들의 온갖 욕을 듣고, 내면이 파괴될 만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됐을 때 사람들의 눈이 무서웠다.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 이대로는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아서, 버림받을 것 같아서 마음이 매일 힘들었다. 그러니 과거의 나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 맞고, 사람들을 사귀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키워준 사람들이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준 것이 있다면 먹고, 자고, 학교를 다니게 해 준 것들이다. 그리고 정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대한민국이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법으로 만들어 놨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다(대한민국 만세.).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를 키워주신 분들은 나를 직접 낳으신 분들이 아니니, 들인 노력과 재화를 갚아야 하는 가축 <?>처럼 생각하셨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 중에 무식한 사람들은 저~어~기 먼 나라의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이없는 사실은 그들은 자라면서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 겪을 일도 없는 데다, 전혀 겪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설사 겪었다고 해도 겪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그냥 성인 아이로 자라나 신체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멀리하면 된다.
그리고 제3세계 아이들은 그곳에 사는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이니 나와 비교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굳이 비교하면서 비교 우위에 서고 싶은 생각도 없다. 또한 나는 운을 타고나 대한민국 남쪽 나라에 태어났으니 쓸데없는 비교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 아이들 입장에서 내 환경은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 환경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가난하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쪽이 낫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 내용을 담은 인터뷰도 유튜브에 자주 등장한다. 지금 성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의 환경을 답습하고 싶지 않아 대부분 아이를 낳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래서 출생률이 0.7이 됐겠지. 비교라는 건 상대적이기 때문에 비교 대상에 따라 완전히 다른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니 비교는 의미 없는 일이다.
가정 주부가 되고 매일 같은 일상을 마주하고 반복적인 집안일을 하면서 어린 시절 여자 어른들을 가끔 생각한다. 그들이 꼭 나빠서라기보다 어쩌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과 일상들이 너무 힘들어서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드디어 하게 된 것이다. 과거엔 막연히 그들이 너무 독하고, 나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집안일을 전적으로 도맡아 하는 주부가 되고 보니 나 역시 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자주 남편에게 남편과 내 자식 하나 먹이고, 입히는 건 문제없이 할 수 있는데 그 이상은 무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내가 겪었던 여성 어른들도 나처럼 자기 남편과 자신의 자녀들만 건사했다면 그렇게 파괴적인 사람들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선택으로 성인아이인 남편을 선택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들의 형제과 그 식구들까지 먹이고 입히고, 온갖 노동까지 해야 했던 그들에게 나는 스케이프 고트가 되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러니 같은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겐 천사, 나에겐 악마가 될 수 있는 이중적인 사람이 된다. 실제로 친척 분 중 한 분은 내게 원수보다 더 원수인 분인데, 내 동생에겐 세상이 담을 수 없는 천사였다고 하니 참 기분이 묘했다.
(스케이프고트 /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 욕구불만이나 분노 등의 해소 및 발산을 위해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전가시킬 대상 또는 수단을 일컫는다. 정치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가 가상의 적을 설정하여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여론을 결집시키기 위한 정책을 일컫는 용어다. 정치적 불만에서 생기는 공격성을 직접 그 원인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다른 대상으로 전가시켜 증오나 반감 등을 해소시키는 해소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국내의 이민족이나 이단분자, 국외의 약소 민 등을 대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이 용어는 고대 유대시대 때 속죄일에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황야로 내쫓기던 양을 지칭하는 속죄양에서 비롯되었으며, 현대에서는 비유적으로 희생양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아는 건 정말 중요하다. 그러니 소크라테스도 그 옛날부터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자신을 아는 것이 나도 살리고, 타인도 살리는 일이 된다. 타인을 위해 무조건적 희생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오직 선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라는 말처럼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존재고, 완전히 선한 존재로만 살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선함을 계속 유지하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 삶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선택해 삶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나도, 내 인생에 들인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만 보면 뭔가를 해달라고 했던 사람들,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고 말했던 숱한 인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정말 화가 났던 건 스스로 내가 해야 한다며 담당했고, 그 모든 인간관계와 일들을 선택했다는 거다.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그들보다 나를 더 많이 미워하고 원망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됐잖아.라는 것이 원망의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노예처럼 양육되었는데 대체 그런 환경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겠는가. 끌려다니고 끌려다니다 나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 정신이 확 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오늘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의 나를 오늘의 내가 바라보면 반드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내게 말을 건넨다. 다른 사람이 어찌 살든, 나는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오늘을 걷는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의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는 나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족이든, 물건이든, 관계든 전부 인생에서 제거할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하려다 내가 하고 싶었던 직업을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이젠 정말 늦어서 노산까지 걱정하고 있다.
한 번은 동생이 시험에 떨어져 울고 있는 내게 '할 일이 없으니 이모 아이를 봐주면 되겠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카카오톡, 지금도 가지고 있음). 그 말을 보고 정말 화가 났다. 이모 아이를 봐주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겠냐만은 항상 그랬듯 자기가 선심 쓰듯 내 인생을 남에게 갖다 주려는 동생을 보고 화를 넘어 분노가 생겼다. 그땐 정말 어이가 없어서 '니 아이 봐주면서 같이 봐주면 되겠네.' 라며 돌려줬는데 오늘의 내가 봐도 정말 화가 난다. 여전히 나는 타인들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는 좀 스스로 키우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스스로 선택해서 열 달을 품어 낳은 소중한 아이를 공짜로 나든 타인에게든 떠넘기려고 하지 말고. 제발 스스로 훌륭하고 건강하게 키워주길 오늘도 기도한다. 나도 지금 애를 낳고 싶어도 키울 자신이 없어서, 키울 돈이 부족할 것 같아서 못 낳고 있는데. 니 아이는 네가 키워라 좀. 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냥 여기에 둔다.
나는 오늘을 내 것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제 나는 과거의 나처럼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을 쏟아붓느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보다 오늘의 나와 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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