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여자아이라서 참 다행이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한 때 나는 내가 여성인 것이 참 미웠다. 내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시골집으로 보내졌다는 것을 어렴풋 알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면 장남인 아버지가 첫째를 딸을 낳아 안타깝고 매우 속상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처럼 행동했고, 자고 일어나면 성별이 바뀌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덕분에 남들 눈에는 천방지축 못 말리는 아이처럼 보였다. 열 살 무렵이었던가 그때 처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기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치 있었던 것이 제거된 것 마냥 정말 슬펐다. 신에게 미리 거세된 것처럼 느껴졌고, 영원히 아버지에게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이 마음에 남았다.

  어른이 됐을 때 아버지는 내게 새어머니와 결혼한 이유에 대해 굳이 말씀해 주셨다. 그녀에겐 이미 아들이(아이가 넷임) 여럿 있었기 때문에 쉽게<?> 자신의 아들도 낳아줄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그게 여자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이미 아들을 여럿 낳았으니 자신의 아들도 낳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노력에도 아버지의 오랜 벗이었던 점쟁이 아저씨는 아버지 팔자에 아들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점쟁이 아저씨 말처럼 아버지는 또 귀한 <?> 딸을 낳았다. 덕분에 아버지는 나를 포함해서 키워야 할 아이가 일곱이나 생겼다. 아들을 낳을 목적으로 재가한 아버지는 막내 아이가 생기기도 훨씬 전에 시골에서 사업하는 동생네에 나를 보냈다. 덕분에 나는 낳아주신 아버지와 함께 산 시간이 거의 없다(다섯살까지 보육시설에서 살았다.). 그리고 키울 아이들이 많아 아버지는 나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아들을 갖지 못했다는 슬픔이 있었고, 나는 나대로,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슬픔이 내면 깊이 남았다. 둘째가 여자아이로 태어났을 때 너무 화가나서 동생을 집어던졌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아버지의 표정과 말투가 지금도 생생하다. 동생은 나보다 더 안타깝고 불쌍한 면이 많다. 그랬던 동생이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것이 참 기특하고, 신기하다.

  내가 살아야했던 가족 체계는 가부장제 문화 속에 푹 담겨 위계질서가 분명한 곳이었다. 그 안에서 여자아이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예를 들면 손톱을 조금이라도 길라치면 여자아이가 벌써부터 발라당 까졌다며 손바닥에 불이 나게 맞았다. 그리고 벌을 받았다(엎드려뻗쳐와 기마자세 등). 상명하복은 기본이고, 여자아이가 갖춰야 할 덕목과 해야 할 것들이 남자아이들에 비해 과하게 넘쳤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중학생일 때 남자아이가 학교에 같이 가겠다고 대문 앞에서 나를 불렀다가 학교와 영원히 작별 <?>할 뻔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남자친구를 사귀면 책을 불태우고,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가족 구성원의 공식 입장을 전달받기도 했다. 이때는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청소년기가(고등학생) 되었을 때도 여전히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이 됐다는 축복이 찾아왔을 때도(매달 여성에게 찾아오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증표) 불편하고, 불쾌하고, 속상했다. 마침 가족 사업의 대실패로 여성용품까지 아껴써야했던 상황도 여자아이인 것에 대한 속상함을 더했다. 고등학생일 때는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여성용품 3개(낱개)로 일주일을 버틸 때도 많았다. 그래선지 성인이 됐을 때 모든 여성용품에 대해 심각한 알레르기가 생겼다. 이 때문에 성인이 된 후 매달 여성병원에 다녔다. 키워주신 아버지 덕분에 의료보호 1종 자녀가 돼서 병원비, 약값이 전액 무료였다. 참 감사하다.

  나는 우연히 심각하게 굶으면 여성에게 찾아오는 축복이 끊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매달 찾아오는 축복이 끊기도록 하기 위해 심각한 절식을 반복했다. 이때 원체 살이 찌지 않던 체질이 쉽게 찌는 체질로 완벽히 바뀌었다. 십대 시절 엉망으로 먹고 굶기를 반복해서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절식 덕분에 6개월(길게는 1년) 넘게 축복이 찾아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여성용품을 구입하는 것이 참 부담스러워서 참 다행이라고, 참 편하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영양 불균형 상태를 만들었다. 그러다 너무 참을 수 없으면 배가 터지도록 먹고 자는 걸 반복했다.

  폭식과 절식은 내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만큼 생생한 따뜻함과 고통을 줬다. 오늘의 내가 십대 시절 나를 바라보니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가끔 가득 터질 만큼 먹고 자는 걸 참 좋아했다. 먹고 바로 누우면 시큰함과 허한 느낌을 줘서 아팠던 심장에 따뜻하고 묵직한 느낌이 났다. 위에 있는 음식이 심장을 눌러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따뜻하고 포근했는데 그 느낌이 누군가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이 먹고 자는 일을 반복했다. 그 이후로 마음이 허하면 가득 먹고 바로 잤고 덕분에 식도염을 잦게 앓았다. 절식을 하면(일주일 이상 물만 먹고 굶거나 건빵 몇 알로 버티기) 매달 여성에게 찾아오는 축복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는 점도 참 편하고 좋았다.

  절식은 내게 생생한 고통을 줘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줬고(배가 고프면 정말 고통스럽다.), 폭식은 묵직한 따뜻함을 심장에 안겨줘서 좋았다. 과거의 나는 이런 행동이 자기 파괴적 행동이라는 것을 몰랐다.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반복했던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폭식과 절식이 심리적으로 아픈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돌아갈 곳이 없었다. 고등학생일 때 재산이라고 할 법한 것은 속옷 몇장과 교복, 입학하면서 구입했던 외출옷 한 벌이 전부였다. 본가라고 불렀던 시골에 가면(키워주신 아버지가 불러서 감) 어머니는 내 물건과 옷을 모두 태워버렸으니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내가 있을 곳도 없다셨다(정말 다 태워 없애셨다.). 그러면서 말과 행동으로 어머니와 나를 완벽히 갈라내셨다(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의 마음이 더 강퍅해졌을 거라 지금은 생각한다.). 그러니 매달 여자아이에게 필요한 용품이 현저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친인척분들 덕분에 아주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아이(알아서 하는 아이)가 될 수 있었던 건 감사한 부분이기도 하다.

  가족 사업의 대 실패는 가족간의 불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었고, 가족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 덩달아 내 마음도 매우 강퍅해져서 내 안에 나를 가둔 십대를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매달 찾아오는 축복이 축복이 될 리 없었다. 그래선지 그날이 찾아오면 심각할 정도로 배앓이를 해서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그 고통이 너무 싫어서 또 절식을 시작하고, 폭식을 하는 일을 반복해서 건강을 완벽히 잃도록 만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콜레스테롤 혈증을 앓았다.

  성인이 됐을 때 여성용품에 대한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병원 내원을 통해 알게 됐다. 선생님은 달에 한번씩 참새가 방앗간 오듯 찾아오는 내게 합성 여성 용품을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강력 권고를 하셨다. 요즘은 천으로 만들어진 제품도 많으니 그 제품을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00% 천으로 된 제품을 사용하게 됐다.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초기 투자 비용이 높은 건 둘째 치고라도(나중엔 전부 상계되고도 남는 장사다.) 세척하고, 말리는 일이 참 불편했다. 그래도 천 용품을 사용하고부터는 알레르기(염증)로부터 해방됐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적어졌다. 친환경적인 건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세탁하면서 쓰는 세탁비누와 물과 합성 용품을 그대로 버렸을 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할 때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어서다. 물론 합성 용품은 몇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후자가 더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그래도 앞으로 150년 뒤면 인간 종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예견하는 학자들도 있던데.. 의미가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이제 천으로 만들어진 용품을 사용한지 꽤 오래됐다. 여전히 매달 잘 사용하고 있고, 잘 세척하고 삶아서 사용하기 때문에 건강까지 더 좋아졌다. 요즘 나오는 100% 세탁해서 사용해야 하는 천 제품들은 기능도 좋고, 예쁘기까지 하다. 정말 오랫동안 유통기한(소비기한) 무시하고 사용할 수 있어 무시무시하게 경제적이다. 이제 사용한 지 족히 15년은 넘는 것 같으니까. 매년 아꼈던 비용을 생각하면 참 뿌듯하다(나는 미용실도 일 년에 한 번 가면 많이 갈 정도로 미용도 스스로 한다.). 어쨌든 알레르기 덕분에 사용하게 된 천 용품 덕분에 건강까지 챙길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여러모로 위기는 선물이 된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참 오랫동안 거부해왔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주입된 사고방식에 의해, 태어나 처음 만난 타인들의(가족) 거부에 의해서, 나는 나를 거부하고, 못 살게 구는 걸 기본 값으로 삼았다. 그러니 그걸 깨닫게 해 주려고 몸은 이곳저곳에 문제를 일으켜 불편함과 고통을 줬다. 어쩔 수 없이 알레르기와 각종 염증 질환들을 고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내가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의 나는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누렸던 많은 선물들이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아이로 태어난 덕분에 오늘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고마운 이유들 중 하나다.

  내가 내가 되어 온전히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해 매달 축복이 찾아오면 생각한다. 아이를 가질 수 있고(어릴 때는 아이를 못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여성인 내가 싫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될 수 있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온전한 아름다움도 누릴 수 있다.

  이제는 여자아이로 태어난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어쩌면 여성용품 알레르기가 생긴 것도 여성으로서 스스로를 사랑하라며 몸이 일깨워주려고 벌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참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게 행복을 내게 주면서 살기로 다짐했다.

  여자아이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는 내가 나인 게 참 다행이고, 고마워. 그러니 이제는 내가 나를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해. 이젠 정말 잘 살아보자. 스스로와 나의 토오루(남편)님과 앞으로 내게 찾아올 아이와 예수님과 정말 행복하게 살다가 내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내가 여자아이라서 참 다행이야!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살아갈 수 있고, 살아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