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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관계>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의 친구분 중 신을 받아 무당을 하시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와 엄마의 운명을 점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참으로 관심이 많으신 분이었다.

나는 천명을 받아 태어날 아이로 계모 밥을 먹을 팔자라고 했고, 엄마는 천명을 받아 태어날 아이 대신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했다. 자기가 내려준 이름으로 지으면 엄마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다며 내 이름을 제 맘대로 바꿔댔다.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됐다. 어쩌면 내가 엄마 뱃속에 들어서기 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부모님이 결혼한다고 한 시점부터 그런 말들을 더 많이 뱉었던 것 같다. 그분에 대해 아버지는 자주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전 재산을 갖다 줘도 점을 쳐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오늘까지 나는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도, 사는 곳도 전혀 모른다. 내가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그분의 점치기가 계속돼서 십 년 전 나는 이름을 한글로 바꿨다. 그제야 그분의 이름 점치기도 끝났다.

그분은 엄마가 3 년 내에 죽을 거라고 뱉어댔다. 엄마는 하나님을 믿는 분이셨음에도 그분의 매일 계속되는 말에 정말 3년을 겨우 채우고 돌아가셨다. 그런 나에게 이제 막 태어난 동생 한 명이 남았다. 아버지는 막 시작한 관광버스업을 하시느라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들을 거쳐 키워졌다. 그러다 고아원(보육시설)에 맡겨졌다.


어릴 때부터 매우 고왔던 동생은 많은 분들이 가족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엄마가 남겨준 유일한 혈육이라는 걸 알았는지 3살 아이는 5살까지 동생을 데려가려는 사람들에게 온갖 말썽을 피웠다. 사업 때문에 바빠 자주 오지 못하는 아버지도 동생의 입양을 막아달라고 원장님께 자주 부탁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좋은 집에 갔더라면 동생의 운명이 얼마나 좋아졌을까 라는 생각을 매일 한다.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다. 천사같이 맑고 예쁜 아이었던 동생은 어디 가나 사랑받고 아름답게 자랐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나중에 재혼한 아버지가 동생을 데려가고서부터 새엄마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나는 동생의 인생을 대할 때면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겨우 세 살에 시설로 들어간 나는 모르는 아이들과 한 방에서 매일 잤다. 이층 침대들이 가운데 방을 비어 두고 줄지어 벽에 붙여져 있었다. 나는 1층 침대에서 자주 잤던 것 같다. 어느 날 같이 잠을 자던 친구 중 한 명이 자다가 침대 위에 배변을 봤다. 그날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때부터 시설의 학대가 시작됐던 걸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이 기억을 초등학교 6학년 무렵까지 매일 꿈에서 봤다.


어릴 때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유는 이상하게 반복적으로 같은 장면들을 꿈속에서 매일 봐서다. 온몸이 땀에 절어 깨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깨기도 했다. 어릴 때 꿈속에서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말하곤 했다. 반드시 크면 복수해야 한다고. 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시설에서 나오고 나서도 잠자는 게 무서워 매일 밤을 새웠다. 그때 밤을 세기 위해 포청천이나 엑스파일, 정무문 등 그 시간대에 하는 영화들을 열심히 봤다. 덕분에 눈이 매우 나빠졌고, 학교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저녁에 집에서 잠을 안 자는 거냐고. 나는 학교에 가서 매일 책상에 엎드러져 잤다.


시설의 선생님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있었던 기억들은 여실히 남아있다. 나중에 동생에게 물어보니 동생도 그 일들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때 함께 시설에 있던 전국으로 흩어졌을 아이들 모두 같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거다. 그리고 같은 내면의 고통을 가지고 살고 있겠지.


매일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우리는 모두 뺨을 맞거나 발로 차여 잠에서 깼다. 그리고 줄지어 화장실로 옮겨졌다. 잠에서 덜 깬 아이는 졸며 걷다 바닥에 눕기도 했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발로 차였다. 줄지어 들어선 목욕탕 안에선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목욕탕 물에 머리를 박게 하거나 물에 던져졌다. 그리고
차가운 물이 가득 든 통이 머리 위로 부어졌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까지 냇물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차가운 물이 몸에 닿으면 과호흡이 일어났던 거다. 그 사실을 몰랐던 아버지는 내게 왜 다른 아이들처럼 물에 들어가지 못하냐고 강제로 끌고 들어가곤 하셨다. 물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이다. 뭐, 지금은 물 공포증은 거의 해결됐다. 그러니 이런 말도 하고 있겠지.


머리 위로 물이 부어지면 코 안으로 물이 가득 들어오고, 매캐해진 코가 숨을 쉬지 못한다. 입으로 어푸어푸하며 겨우 숨을 들이쉬고 뱉어낸다. 그래도 그 일들이 단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그 후에 강제로 소변과 대변을 보게 하고, 대충 닦여져 방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고단한 잠에 빠진다.


다음 날이 되면 또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은색으로 된 배식 판 위에 음식들을 가득 올려준다. 선생님들은 각자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음식들을 가장 많이 담아준다. 그때 내 식판 위에 가득 담아졌던 것이 마늘장아찌, 파김치, 양파다. 나는 먹고 토하 고를 반복했다. 그러고서도 음식 학대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어느 날들은 의자들이 전부 식탁 위로 올려져 뒤집어져 있고, 불이 꺼진 식당에 혼자 앉아있던 때도 자주 있었다. 그때 나는 양파를 겨우 삼키고 헛구역질을 하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봤다.


점심 식사 때 들어온 식당에서 혼자 밤 6시 무렵까지 앉아있었다. 밖에서 날아라 슈퍼보드 만화 영화 음악이 들렸다. 그때 그 음악을 들으며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앉아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식판 위 가득 쌓인 양파를 봤다. 후에 시설에서 나와 다른 곳의 삶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양파와 파를 먹지 못했다. 파는 극복했지만 여전히 양파와는 매일 눈싸움을 한다. 여전히 양파가 싫다. 물론 지금은 양파를 씹어도 토하거나 하진 않는다.


어릴 때 시설에서의 삶 덕분에 소화기가 매우 약해졌다. 그래서 버스를 타면 어김없이 토를 했고, 덕분에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중에는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탔다. 언제든지 토해도 괜찮도록 말이다. 토했던 걸 입 안에서 다시 삼키는 일도 자주 반복됐다. 정말 구역질 나는 일이다. 그때는 밖으로 토해 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보다야 나 혼자 고통스러운 게 낫다고 생각했다.


동생 역시 막 태어나 들어간 시설에서 조금 자라자 같은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큼 인지는 모르지만 동생도 여전히 양파를 싫어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집이 정말 센 아이여서 남들 한 대 맞을 거 열대는 더 족히 맞았으니 그래서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나를 키워준 어머니는 반복적으로 내게 나를 원한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러면서 고집이 말로 다 못한다고 혼내셨다. 내가 생각해도 어릴 때 나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왕 고집이었다. 그런 내가 후에 자기 고집 없고, 조용하고, 사람 눈을 전혀 쳐다보지 못하는 성인으로 자랐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물론 이십 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르다.


어릴 때 학대는 모두 신체 반응으로 이어졌다. 나는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했고,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매우 분노했다. 그로 인해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질병들을 앓았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모른다는 만성 질환들을 앓았다. 만성 천식, 기관지염, 반복적인 구토, 두드러기 등 밖으로 보일만한 온갖 질병을 앓았고, 보기에도 매우 심각했다. 매우 말랐고, 부러질 듯 보였으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일들이 결국 나를 아프게 한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면 몸이 자주 아프다. 그래서 더 미워하지도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마음은 내 몸의 모든 기능들을 엉망으로 만들고, 서서히 기능을 멈추게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어린 시절, 그리고 자라오면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 이어져온 다양한 관계들과 삶 속에서 나는 참 많이도 아팠다. 아마, 오늘이 가장 건강한 날일 거다. 그럼에도 오늘도 시름시름 자주 아프지만 말이다.


마음을 잘 관리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고, 미워하는데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사용할 수 있는 오늘의 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오늘을, 내일을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가고 싶다. 과거야 바꿀 수 없으니, 일단 좋을 대로 해석하고 멋지게 장식한 후 오늘과 내일을 맞이하려고 한다.


나와 비슷한 같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그때 그 시절의 친구들 모두 건강히 잘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내가 몸과 마음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내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이 알아가고 싶다. 세상에 대해, 나에 대해. 그리고 나와 잘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와 상황들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을 맞이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평안하고 행복하다. 오늘을 더 오늘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건 전적으로 과거 덕분이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과거 덕분이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행복하게 살 거다. 인생은 정말 살아갈수록 편안해지고 좋아지는 거니까. 나는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살 거다. 뭘 하든, 무엇을 남기든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더 이상 그 누구도 나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도록 두지 않을 거니까. 내겐 그런 힘과 능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나는 내가 꿈꿨던 것들을 이뤄낼 거다. 학대받는 아이들이 없는 시설을 만들고, 총체적으로 건강한 사랑을 주는 엄마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는 매일을 쌓아가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다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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