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무례함을 허락하지 않도록>
무례함에 대해 다룬 강의를 들었다. 무례함이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무례하다를 찾아보면 (무례하다(無禮하다) 태도나 말에 예의가 없다. 라고 알려준다. 무례하다라.. 무례한 인간들이 언제부터 내 삶에 들어오게 됐고, 나는 그 무례함을 언제 처음 인지하게 됐을까.
어린시절 나는 내게 만은 무례함을 무한정 풀어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가족 구성원 안에서 살았다. 문제는 오직 내게만 무례함이 허용됐다는 거다. 무례함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어릴 때 삼촌이라고 불렀던 분은 자주 술을 드셨다. 술을 드시고 온 날이면(술을 드시지 않아도) 어김없이 나를 개 패듯(개야 미안해.) 때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10살 무렵) 삼촌 덕분에 눈탱이 밤탱이가 된 얼굴과 온 몸에 멍이 든 모습으로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주변 가족 구성원들도 내게 무례하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삼촌이 나를 때릴 수 있는 이유를 사촌(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제자매의 자녀)이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촌은 삼촌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삼촌 욕을 했다는 걸 삼촌에게 친절하게 알렸다. 그 날은 사촌이 보는 앞에서 정말 개 패듯 맞았다(과거 사람들은 개를 잡아먹기 전 살을 연하게 한다며 죽을 듯이 몽둥이로 패는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필 근처에 쇠 파이프가 있어서 쇠파이프를 든 삼촌을 피해 도망까지 다녔다. 또래 아이들이 즐거워서 마당을 뛰어다닐 때 나는 살기 위해 뛰어다녔다. 아직도 그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이제는 잘라버려 뿌리도 남지 않은 호두나무가 있는 큰 집 건너에 있는 작은 집 마루에서 삼촌이 허공에 휘두르는 쇠파이프를 피하려고 열심히 뛰어 다녔다. 물론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어린 시절 삼촌 덕분에 순발력이 키워졌다.
나이가 들어 마지막으로 본가라고 말할 만한 곳에 찾아갔을 때(약 2년 전) 고모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고모는 내가 묻지도 않은 삼촌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셨다. 정말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야기였다. 막아볼 새도 없게 줄줄 고모의 입에서 삼촌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그 장소에는 토오루(남편)님도 있었다. 참 부끄러움과 무례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OO가 어릴 때 널 때린 건 니네 아빠가 OO가 어릴 때 죽을 만큼 때려서 그랬대. 그러니까 니가 이해해 줘야 해."
그 말들이 갑작스러워서 황망한 표정으로 고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에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그러면 삼촌이 애를 낳으면 똑같이 때려도 되겠네요?"
내 말에 고모는 동그랗게 된 눈과 닫힌 입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8살부터 12살 무렵까지) 삼촌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를 복수라도 하듯 나만 보면 분노했고 주먹을 휘둘렀다(아버지에 대한 복수였다는 사실을 서른 후반이 되서야 알게 됐고, 억울하지만 드디어 이유를 알게 되서 후련한 감도 있다.). 주변에 쇠 파이프가 있으면 파이프를 들고 때렸고, 도구가 없으면 주먹으로 얼굴과 몸을 가리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심각하게 맞았다는 사실은 동네사람들이 모두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보였다(그래서 어쩌면 초등학교 선생님 중 한분이 분풀이로 나를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나를 본 동네 어른들은 깡 마른 데다 퉁퉁 붓고, 퍼래진 내 모습을 보고 매우 불쌍해 했다. 삼촌이 나를 때리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나도, 삼촌도), 그 행위를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들 역시 당연하게 생각했다(어쩔 수 없다고.).
그랬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불편하게 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무례함을 허용하는 관대함<?>이 성인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굳이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한 건(일어난 일 중 아주 작은 부분이다.) 어린시절 가족 구성원과 맺었던 인간관계가 성인이 되서도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끔 쓰는 글에서 토오루(남편)를 만난 건 로또를 맞은 거다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어린시절 처음 맺었던 가족들과의 인간관계 덕분에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할 확률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기(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나를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만난 건 100억, 아니 1000억대 로또를 맞을 확률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누군가의 무례함을 무례함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린시절 가족들과 맺은 인관관계는 인생 전반에서 이뤄지는 인간관계의 근간(네이버 국어사전: 뿌리와 줄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시절을 그대로 복사하듯 인간관계를 구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쉽게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희소식이 있다. 나처럼 처음 단추가 잘못끼워져 인간관계를 잘못 배운 사람들도 스스로 깨우쳐서 새로운 인간관계 토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무례함을 인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례함이 무엇인지, 타인이 넘지 못하게 해야할 선이 어딘지, 결코 허락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학습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살아오면서 선을 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화 한번 내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그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정리할 때도 최대한 상대가 나를 좋게 생각하도록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주고 마무리했다. 그래야 뒷 탈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안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착한 아이 증후군의 발현이기도 했을 거다.
지금에야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퍽퍽한 고구마를 먹은 듯 목이 메이고, 속이 답답하다. 그리고 화가 난다.
무례함을 인지하는 것, 누군가가 과할 만큼 내 영역을 침범하고 파괴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각성한 그 순간부터 과거부터 이어져온 사고관과 내면의 눈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음의 눈이 심각하게 건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가슴 깊이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또 가졌다. 그 수렁에서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인생 전체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구만리니까.
오늘의 나는 가족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나와 소중한 관계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무례함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 장소에 나를 두지 않는 일부터 하려고 노력해 왔고, 오늘의 나는 나를 최우선으로 지키고 사랑하는 일을 매일 배워간다.
무례함이 무엇인지 삶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어쩌면 감사해야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 나를 먼저 우선해 챙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챙기는 일에 죄책감을 느껴야했던 것도 완전히 바꿨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정리했다. 내게 좋은 일이라며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고,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기를 바랬던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도 완벽히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인간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허용된 작은 에피소드였다고 정리한다.
인생에서 행복도 불행도 각자에 맞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할 것인지 각자에 달렸다. 그래서 나는 과거를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오늘의 나를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타인이 내게 무례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에 좋은 것을 돌려주기위해 노력하기 전에 일단 내 선과 타인의 선을 지켜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피해주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피해 받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건강한 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배운다.
내면의 비판자가 너무 아프게 찔러대서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스스로였던 때가 있었다. 오늘의 나는 함께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버겁지 않다. 내면의 내가 나를 탓하고, 부정해도 그러거나 말거나, 괜찮아 라고 내게서 나를 지켜낸다. 그렇게 매일 연습하다보니 더 이상 내면의 비판자도 더 이상 비판, 비난, 판단하지 않는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충조평판)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내면의 자아가 이제는 내편이 됐다. 그래서 나만의 세계에서 내게 의미를 주는 뿌듯함과 충만함, 행복을 매일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아무 것도 되지 않고(직업이 없고), 아무 것도 보일 것이 없는(재산이 없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순 있지만 불편하지 않다. 뭐, 아직 살아갈 날이 구만리니까 언젠가는 무엇이든 생기겠지 라는 관대한 마음을 내게 선물할 수 있게 됐다.
무례하게 선을 넘던 사람들. 이제 인생에서 과감히 지워내고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드디어 생겼다. 그 사람들이 내 삶에 있든 없든 내 삶에는 영향이 없으니까. 라는 꿋꿋한 마음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좋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삶에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선 넘지 마시오. 거기 당신. 그리고 나도 선 넘지 말자. 그리고 내 인생을 살자라고 다짐하며 오늘의 나를 이곳에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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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그래서 어쩌면 초등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이 분풀이로 나를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이 사건으로 키워주신 아버지는 경찰서와 교육청까지 가셨다. 그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같은 내용의 글을 삼십여번 넘게 원고지에 써야했고(경찰서 등 제출을 위한) 덕분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때 이후로 나는 거의 글을 쓰지 않게 됐다. 글 쓰는 일에 트라우마가 생겨서다. 그때 사건을 원고지에 정리하면서 나는 안에서 얻어 터진 거 밖에서도 터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고 매우 피곤했다. 운 없게 선생님이 같은 반 학생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러셨기 때문에 결국 징계를 받으셨다. 만약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면 나는 영원히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못했을 것이다.
어린시절의 나는 가족 내 폭력에 매우 익숙해져 있던 상태라 그 일 역시 당연하다 생각했다. 얼마 후 사건 내용이 어머니 친구 아들을 통해 전말이 전해져서 정말 불편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같은 내용의 글을 손 글씨로 원고지에 반복해서 써야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키워주신 아버지께서 밖 뿐 아니라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에서 목소리를 내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