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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에 관하여>

아침에 콩나물을 삶고 반찬을 만들면서 갑자기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때는 노년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고(30살이 되면 여성은 완전 폭삭 늙은 여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우정에 관해서도 내가 하고 있는 우정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책장에 꽂혀 먼지를 먹고 있는 책이 떠올라 꺼냈다.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 키케로> 안쪽에 당시 필사했던 글이 꽂혀 있다. 2011년 필사기록. 2008년부터 2011년, 2012년 이 맘 즈음 나는 인문 고전을 읽으면서 필사를 정말 열심히 했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인문고전(동양, 서양)만 읽었다. 어떤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천재의 뇌에 접속해서 그들의 사고를 배우고 싶었다.

읽고, 또 읽고, 필사를 하다 보면 나도 뭔가 깨닫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뭔가에 빠지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라(완벽주의 : 안 될 거 같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못하고, 된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한다.) 그땐 정말 진심을 다해 인문고전 만! 팠다.

오늘의 내가 과거를 돌아봤을 때 그때 이 책을 읽고 필사하던 나는 노년과 우정에 관해 깨달은 게 있었을까. 사람은 딱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그 당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아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많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중 사랑도 그랬고, 우정도 그랬다. 그랬던 나를 오늘의 내가 바라보니 참 안타까운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는 만큼만 보이고, 들리고, 느낀다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그 무게를 이제야 느껴간다. 사람은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것들도 이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전까지 경험해야 진짜 아는 것이 된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아니 어쩌면 나라는 사람이 실전을 경험해야 만 아는 인간이 되는 무리 중 속한다는 걸 이제는 인정한다.

배우지 않고 아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고, 배우고 경험해야 아는 사람이 있다는 데 나는 세 번째 인간 유형이었던 거다. 그러니 처음부터 천재라고 일컬어질 만한 사람들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의 내가 경험했던 우정과 사랑, 노년은 어떤 의미일까. 목숨까지 줘도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우정은 나중에 내 목숨이 아까워졌고, 새벽 기도까지 드려가며 최선을 다했던 사랑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찢어졌다. 물론 대부분 아름답게 <?> 헤어져서  지금도 연락하면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느낌으로 연락이 닿을 테지만 당연히 연락하진 않는다. 그 당시 무지렁했던 나를 느끼고 싶지 않아서다.

서른이 되면 완전 쭈그렁 할머니 <?>가 될 거 같아 서른 무렵에도 20대와 같은 외모와 건강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내가 서른 후반이 되고 보니 참 재밌다. 사실 나는 술, 담배, 유해한 대부분의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어려 보이는 편이다(물론 내 생각일 수도 있다.). 아무튼 기도가 이뤄진 셈이니 감사한데, 그때 기도가 사실 50살과 60살을 놓고 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요즘 오십 대 분들도 엄청난 동안 외모지 않은가.

아무튼 아침 일찍 콩들에게 물을 주고, 다 자란 콩나물을 수확한 후 데치고 나물을 만들면서 지난날들을 되짚어 본다. 인생에서 한 두 번 경험해도 많다고 느낄 만한 일들이 태어나면서 일어났다. 그래서 요즘 몸이 아프면 하나님께 따지듯 이야기한다. 당신이 준 상황과 사람들 때문에 몸이 이렇게 아프니(숱한 자가면역 질환 때문에 너무 힘들다.) 당신이 책임지시라고 악독한 변호사가 되어 변론하듯 따진다. 그러면 신기할 만큼 아픔이 잦아든다.

오늘 아침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우면서 이제는 나도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어쩌면 이럴 때 더 조심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과거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남편이 내 남편이 될 거라고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신기하게 나를 보자마자 나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때도 당시의 사랑에 목메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남편을 보지 못했다. 남편은 그 당시 날마다 헤어지자며 마음을 찢어 놨던 연인과 드디어 헤어진 상태였다. 그 헤어진 연인이 날마다 나를 찾아와 남편과 자기를 다시 이어 달라 이야기했었다. 사실 남편과 나는 당시 별로 친하지 않아서 정말 이야기하기 껄끄러웠다. 그때 내가 그 사람 말을 들어줬던 이유는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친구의 친구라고 해서 우리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때 배웠다.

친구의 친구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분은 내게 숙제를 매일 내줬고(지금 생각하니 열불이 난다.) 남편을 만나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 달라고 이야기할 때(대체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화가 난다.) 남편이 울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유학에서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정말 중간에서 힘들었다. 숱하게 헤어지자는 말로 남편을 흔들고, 아프게 했다가 떠날 것 같으면 달콤한 말과 행동으로 붙잡아 뒀던 그분은 남편의 내면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고 그분은 나중에 나와 남편이 만나게 된 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남편을 뺏었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 이야길 10년이 넘어서도 하고 다녔다(이것도 전해 들은 거라 진짜인 지 알 수 없다.). 그 말을 친구에게 숱하게 들으면서 내 말을 도무지 믿어주지 않는 친구가 너무 밉고 아팠다. 그때서야 나는 친구에게 줄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내 목숨이 아까워졌다. 사랑도, 우정도 일방통행이었던 걸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싸르르 아팠다.

나중에 소유권을 주장하던 그녀가 나를 다시 찾아왔을 때(이때는 남편과 내가 만나기 시작했을 때다.) 그녀는 내가 남편과 만나게 될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네가 00과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았어. 그런 말 있잖아.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네 옆에 있었던 거야. 네가 오빠를 만나는 건 상관없어. 네가 어쨌든 잘못한 거니까 네가 내 엄마 역할을 해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내가 왜 네 엄마 역할을 해?"

"내 엄마가 엄마 역할을 안 해 주니까. 엄마 역할을 해 주던 애도 더 이상 안 해주고. 네가 엄마 역할을 대신해 줘야지."

"그러니까. 왜?"

"네가 00랑 사귀게 됐기도 했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순환적으로 주고받다 그녀와 헤어졌다. 대체 엄마도 없는 내가 왜 엄마도 있는 그녀의 정신적 엄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이 대화를 주고받은 것도 내가 당시 살던 원룸 방에서였다. 그녀와의 만남을 피해 다니자 그녀는 내 집까지 찾아와 저런 개 <?> 소리를 정성껏 늘어놨다. 게다가 얼마나 나를 하찮게 봤던지 내 앞에서 적은 원래 곁에 둬야 안전한 거라는 말을 면전에 대 놓고 하다니.


정말 오래된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이유는 목숨처럼 아꼈던 친구가 내게 남의 남자를 빼앗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기 때문이다. 얼마나 억울하던지 말도 해보고,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고, 별 짓을 다했는데 결론은 친구의 남자(과거 남자 포함)를 뺏는 일을 다시는 하지 말란다. 그러면 친구를 하지 않을 거라고. 6개월 만에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던 길에 그녀는 차갑게 말을 던지고 앞서거니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하고 터질 것 같았다. 대신 친구 남자가 아닌 남자는 뺏어도 된단다. 이 말도 그 친구라는 분이 유부남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나온 말이기도 하다(이것도 남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던 그분이 내게 친절하게 이야기해 줬었다. 왜 유부남만 만나는지 이야기도 자세하게 해 줬다. 그런데 이것도 친구는 모두 알고 있었단다). 친구가 아닌 분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리게 해도 된다니. 참. 내로 남불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나는 15년 간 친구와 친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남의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만난 남자들이 바람을 피워서 내가 피눈물을 흘렸지.

지금도 내 남편을 자기 남자라고(결혼한 남자를 자기 남자라고 이야기하는 건 뭔 뱃장인지. 사실 이것도 전해 들은 말이라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뺏긴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그녀와 그녀의 이야기 만으로 내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던 친구를 떠올린 건 우정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우정도, 사랑도 잘 모르겠다. 친구는 입버릇처럼 '그때는 진심이었겠지, 지금은 진심이었겠지. 나중이야 뭐.' 라는 말을 자주 했다. 친구 말처럼 그때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구석에 틀어 박히고 나서야 과거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내가 알던 세상이 진짜 세상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드디어 했다. 그때는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사실은 내가 아는 만큼, 들리는 만큼만 보였던 거라는 것도 깨닫는다. 나는 역시나 이론 공부만으로 깨닫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이론과 실전, 책을 10년이 넘어서야 다시 펼쳐보면서 그때의 나를 오늘의 내가 바라본다. 그때의 나도 난데, 오늘의 나와 왜 이렇게 다를까. 그때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눈물 흘리고, 작은 것도 소중해서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의 나는 큰 것도 손에서 잘 놓는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면 그냥 놔버리는 게 내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받은 복이 다 있으니, 이게 아니라면 다른 부분에서 반드시 그 이상으로 채워져 있다는 걸 안다. 가령 가족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아 가족이 원수 같았던 내게 세상에 하나뿐일 것 같은 진짜 가족을 만들어준 오늘의 남편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은 각자에게 알맞게 주어진다. 불행도 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준다고(진짜? 진짜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고.

노년을 향해 매일 달려가고 있는 나는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외모를 가꿨던 나는 이제 총체적인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오늘의 나와 남편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어제보다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랑도, 우정도, 결국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지 고르는 것도, 그 말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결국 나니까. 나는 남편에게 하는 말에서도 가장 예쁜 말을 골라하는 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다는 걸 알게 된다.

오늘 아침 콩나물 반찬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 콩나물이 잘 자라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남편이 출근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떤 순간에도 내 편이 되어주고, 나를 안아주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사실 나는 과거의 연인들 덕분에 돈, 명예, 권력을 가진 남자보다 오늘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내가 가장 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사람과 나는 오늘을 산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나라는 사람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나를 나답게 인정해 주는 남편이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제발 쓸데없는 말은 알아서 걸러서 전해주지 않으면 좋겠다. 수동공격인지, 아니면 진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인지 도통 진심을 모르겠다.  

#노년에관하여
#우정에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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