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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심과 그림자에 대하여>

  채워도 채을 수 없는 타인의 욕심을 보면(가정 내에서든, 매체에서든) 나도 모르는 분노가 치솟는다. 분노를 하고 있는 나를 깨닫자,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혹시 상대에게서 내 그림자가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동안 나는 왜 상대의 끝없는 욕심 상자를 채우려고 했고,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 욕심 상자를 스스로 채워놓고 왜 분노하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지난달에 들었던 법륜 스님의 영상이 떠올랐다.

  어떤 여성이(화면에 나오지 않고 목소리만 나옴) 스님께 질문을 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자꾸만 요구한다고 말이다. 다른 가족들 역시 그 여성이 불편한 일들을 떠맡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여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떠맡게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스님은 아주 간단하게 '안 하면 되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여성은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너무 불편하고 힘든 걸요.'라는 투의 말을 이어갔고, 스님은 '그러니까 안 하면 되는데, 본인이 편하려고 해 놓고 왜 남 탓을 하고 그래.'라는 대답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듯 깨달음이 왔다.

  누군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반복하는 일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나는 그 순간 영상 속 목소리 주인공이 됐다. 그래서 스님의 말이 한참 동안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편하려고 상대의 욕심 상자를 채웠으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되는 것일까. 분명 상대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를 당했는데도 말이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를 다녀야 해서 매일 피곤했다. 그때는 한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면 1,200원에서 1,600원을 주던 때였다. 그때도 새우탕 라면이 1천 원 정도 했고(그때는 새우탕 라면을 좋아했고,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새우 알레르기가 생겨서 새우가 들어간 건 과자도 못 먹는다.), 김밥 한 줄이 1,000원이었고, 피자 한판이 15,000원 정도 했다. 지금 물가보다야 싸겠지만 그때는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이 한 달 내내 일해도 40-60만 원 정도였다. 그래서 사치를 한다는 건 꿈도 못 꿨다.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피곤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20대 초반에는 사촌 언니가 살던 자취방 얹혀살았는데, 화장실이 밖에 있고, 샤워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5만 원짜리 월세 방이었다. 그곳에서 3명이 살았다.  

  그렇게 힘든 하루들을 보냈는데도 주말이 다가오면 전화가 왔고, 다가오는 제사에 내가 새벽부터 들어와서 청소를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으셨다(가족 중 여러 명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한 명을 내세워 말을 전달함). 제사 외에도 주말에는 시골에 혼자 계신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밥을 챙겨드리고 혼자 자고 오라는 요구도 강요당했다. 잘못된 기독교 관에 빠져있던(원수를 용서하라, 효도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한다 등.) 나는 주말에 들어가서 할아버지 밥을 챙겨 드리고, 시골집에서 자고 다음 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고, 어이없다. 도대체 며느리가 4명이나 되는데 그 일을 내가 왜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때 나는 나를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슬픔과 무력감과 고통을 느꼈다.

  당연하게 여러 일들을 내가 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분은 내가 들어가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매일 전화를 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 달 동안 같은 내용을 듣다 지쳐서 원하는 걸 해주고 오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했다(자의든 타의든). 그리고 결국 새벽 6시부터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제사 준비를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서도 칭찬은커녕 오히려 욕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은 제사를 지내야 하는 아버지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니 그 역할을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그때는 참 억울했고,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올바른 선택과 생각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신만 편안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자 결국 병이 들었다. 정신적으로 병이 든 건 둘째 치고, 몸에 병이 들어서 병원의 여러 과를 들락날락하며 약을 먹었다. 고칠 수 없는 만성 질환들로 참 힘든 날들을 보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타인의 욕심 구덩이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볼 때 상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역겨움을 느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법륜 스님과 여성의 대화를 들으면서 갑작스럽게 깨달음이 왔다. 누군가가 반복해서 요구하고, 강요해서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이 사실 내가 원해서, 선택해서 했던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나는 불편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잠깐의 평안을 얻기 위해 내가 가진 재정과 물질, 에너지를 사용했던 것이다. 결국 내가 편하려고 했으니 나를 위해 행동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안 하면 되는데, 내가 편하려고 했으니, 편함을 얻기 위해 한 대가 행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순간 몰려드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던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 가벼웠다. 나는 나의 죄책감과 죄의식, 수치심을 덜기 위해, 그리고 순간의 불편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상대들의 욕심 상자를 채웠던 것이다. 그 영상을 보고 난 후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할 때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 이후로 누군가 내게 뭐든 해달라고 강요하고, 해야 할 것들을 몰아줘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지 않는 것과 뭔가를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평안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욕심 상자를 발견하고, 그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할 때 내가 그것을 채움으로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사랑, 평안, 불편함 해소, 인정.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이지만, 상대가 내게 줄 거라고 생각했던 가짜 허울들이 진짜 받고 싶은 것들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면서 상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돈을 쓰고, 물질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제는 상대에게 무엇인가 해 주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내게 다시 묻는다. 오늘의 글도 물질을 타인에게 제공하고서 내 뜻 대로 되지 않아 무척 화가 났기 때문에 적기 시작한 글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 다시 마음을 정리했다. 타인에게 무엇을 줬든. 그 타인이 그것을 버리든, 누군가에게 줘 버리든 그건 타인이 원해서 하는 일인데 그것마저 내가 통제하고 조종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분노하는 것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고, 오히려 버려야 할 감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 안 하면 되고, 안 주면 되는데. 내가 굳이 해 놓고 왜 쓸데없이 후회하고, 화를 냈던 것일까. 내 손을 떠났으면 그대로 떠나보내면 될 것을. 오랜 시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분노의 근원을 캘 것까지야.

  뭐. 과거에는 그렇게 하도록 조종되고, 통제받으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이제 내가 내 인생을 손에 쥐고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타인이 아무리 원하고, 강요해도 하지 않을 수 있고,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오늘의 분노도 그대로 떠나보내자고 다짐한다.

  안 하면 되고, 안 주면 된다. 불편할 것 같으면 초장부터 안 하면 된다. 미리 상대가 기뻐할 걸 생각해 아주 많은 선물들을 준비했었던(과거에서 최근까지) 내가 새삼스레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난다. 상대는 내가 뭘 준비했는지 모를 텐데. 나는 왜 나를 또 상자에 가뒀던 것일까. 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밤을 보내고 있다.

  자유하게 살자. 그게 어떤 방식이든, 무엇이든. 그리고 타인도 자유롭도록 나도 타인도 풀어주자. 타인의 감정과 선택은 타인의 것이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을 다독이고, 건강하도록 신경 쓰며 살아가면 충분하니까.

  후련한 마음을 안고, 이제 잠을 잘 준비를 해야겠다.

  타인은 바꿀 수 없다. 타인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타인을 만족시키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이고,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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