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해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1. 이해한다는 것
우리는 살면서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그 깊이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곧 잘 타인의 말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이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해, 나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이해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이뤄지는 ‘공감’과 ‘이해’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상대의 마음에 닿기 전 산산이 부서진다.
우리는 존중의 의미로 이해라는 말을 사용한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의 감정을 숱하게 ‘방임’하면서 타인의 감정엔 적극적인 나를 발견할 때 외롭고 공허했다. 그 느낌을 지우기 위해 더 많은 이해와 공감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가 단순히 ‘경청’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잔인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누군가는 꼭 나, 그리고 우리가 아니어도 됐다. 그럼에도 ‘이해’와 ‘배려’ 있는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상대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
2. 이해를 통해
내 안의 황금열쇠를
발견하라.
어려움과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제 3의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혹은 타인의 감정을 배척하는 제 3의 인간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상처 받은 사람임엔 틀림없지만 양상이 다르다. ‘아마 지금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을 거야.. 신께선..’ 이라고 말로 위안하면서 실은 그 어느 것도 겪고 싶지 않았을 거다. 나도 그러니까.
아픔과 고통 없이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간절함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시련과 고통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 사실이 나를,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는 각자에 맞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 만의 언덕을 오른다. 십자가의 무게는 상대적이며 비교가 불가하다.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동안 ‘진짜 나’를 발견하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다.
나를 이해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노력 대신 타인의 이야기와 감정에 반응하며 이해의 화살을 돌린다. 그 순간만큼은 전능한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그 느낌은 아주 잠시일 뿐, 우리는 다시 고독한 방에 남겨진다.
그리고 나를 이해해 줄 누군가를 찾아 수 없이 방황하고, 신을 찾아 헤맨다. 내 안에 황금열쇠를 이미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방황을 거친다. 황금열쇠를 내부에서 찾기보다 세상 밖에서 찾아 오랜 시간 헤맨다. 건망증에 걸린 사람처럼 열쇠를 손에 쥐고, 주변을 배회하고 묻고, 끝없이 방황한다. 급기야 자신의 인생을 헛헛하게 보내기도 한다.
3. 진실한 이해를 통해
나의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인생은 유한하고, 단 한번 뿐이다. 이 사실에서 그 누구도 자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한한 시간과 열정, 사랑을 헛되이 낭비해선 안 된다. 결국 맞이할 죽음 앞에서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외치고 숨을 거두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그나마 솔로몬은 다 가졌었기라도 했지.
이해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를 이해하고, 자신과 진실한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우린 세상에서 타인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내가 그러는 걸 내가 이해한다.’ 마음이 자유 해 진다. 그래, 좀 엉성하게 살면 어때. 좀 부족한 건 또 어때. 어차피 내 삶인데. 부드럽게 함께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이해,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다. 나의 감정들을 알아주고 이해하고 공감 해 주고 싶다. 나에게 주고 싶은 가장 큰 선물을 나는 오늘 내게 준다.
‘나는 나를 이해해. 너의 삶이 순탄치 않고, 부족해도 괜찮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네 편이 되어 너와 살아갈 거야.’
오늘 내가 내게 주는 단순한 위로, ‘이해’를 여기에 내려둔다. 세상 모든 것이 당신에게 등을 돌려도 당신 자신에게 유일하고 따뜻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길.
‘나는 나를 이해해. 그리고 나는 너를 이해해. 이해해 보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