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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을 준비하며>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이번엔 꼭 서로에게 선물을 하자고 했다. 우리가 사귄 10여 년 동안 우리는 남들이 챙긴다는 1주년이나 기념일 등을 챙긴 기억이 거의 없다. 공부를 하느라 바빠서기도 했고, 돈이 궁한 학생이어서였다. 무엇보다 내가 기념일을 잘 잊어버린다는 것도 한 몫했다. 사귄 날도 사실 자주 가물 가물하다. 5월 31일이었던가.. 중순이었나.. 오늘 남편에게 물어봐야겠다(아마 남편도 잘 모를 거다.).  5월 중 후반이었던 것만 기억한다. 특별한 날을 챙긴 기억을 꼽자면 빼빼로데이에 빼빼로 하나를 사서 나눠 먹는 정도였다. 그리고 몇 개 더 사서 토오루 님 어머님께 보내 드렸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한 것을 선물하자고 이야기했고, 한 달간 각자 원하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남편에게 이어폰을 사달라고 했고, 남편은 면도기를 사달라고 했다.

우리는 기억하기 쉬운 7월 7일에 혼인신고를 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이 날은 가장 친했던 친구가 고려해 보라고 정해준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혼인 신고서의 증인 란을 채워줬다. 여러모로 고맙다. 남편에게 좋은 걸 사주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삼십만 원이 넘는 선물 구매가 부담되지 않았다. 필립스로 할 건지, 브라운으로 할 것인지 남편의 최종 선택이 끝난 후 바로 구입했다(필립스와 브라운은 남성 면도기 분야에서 1, 2위를 다투는 브랜드 두 곳이다.).

이번 선물에는 남편이 자신의 필요를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남편은 항상 자기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필요를 알려면 관찰하고 또 관찰해야 한다. 연애 때 남편은 한 겨울에도 두꺼운 옷이 없어 얇은 옷을 입고 오는 날이 많았다. 나중에 어머니께 여쭤보니 사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고 해서 사주지 않으신 거라고 하셨다. 남편은 필요해도 필요 없다고 견디는 경우가 정말 많다. 그래서 남편에게 필요하겠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대부분 내가 알아서 구매한다.

처음 토오루 님을 만났을 때를 어제처럼 기억한다. 그는 검정 반팔 티셔츠 한 장에 물 빠진 청바지를 주야장천 입고 다녔다. 그가 매일 들고 다니던 검은색 가방이 있었는데 손잡이 한쪽이 떨어져 너덜거렸다. 그런데도 그는 그 가방을 매일 같이 들고 왔다. 나는 그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집이 매우 가난한가 보다고 알아서 생각했다.

그와 만난 지 2년이 넘어갈 때도 나는 그가 매우 가난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받는 용돈이 평균적인 일반 가정 아이들에 비해 적다고 느꼈고(20만 원, 나중에 알고 보니 누나는 상대적으로 많았다.), 가방도 여전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에 메고 오던 등딱지 같은 가방과 다 떨어져 해진 가방을 번갈아 들고 왔다. 그의 가정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그가 가난하다고 알아서 판단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선물을 많이 했다. 내 형편이 훨씬 어려웠는데도 그가 어려울까 봐 참 많이 걱정했던 게 생각난다.

여러 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에니어그램 2 유형인 데다, 코디펜던트 병을 앓고 있었고, 돌봄 중독자에, 평강공주 증후군까지 있었다(나를 이렇게 키운 어른들이 가끔 밉고 화가 난다.). 그러니 그의 가난해 보이는 외관과 부족해 보이는 용돈(그 용돈으로 한 달 동안 밥 먹고, 이발하고, 차비도 해야 하는데 정말 부족해 보였다.)등의 부족해 보이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그에게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남편을 못 만났을 테니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운이 억수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진짜 나쁜 사람(놈)을 만날 수도 있었다(세상엔 불쌍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나쁜 놈들이 많다. 나쁜 남자가 좋다는 숱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참..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내게 맞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알아서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셨다. 내가 너무 가난해서 떠난 사람도 있었고, 너무 잘해줘서 부담돼서 떠난 사람도 있었고.. 너무 잘해줘서 떠난 사람은 곰 같아서 싫었단다. 좋은 여자라는 건 알겠는데 여우 같지 않아서 매력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여우랑은 살아도 곰탱이랑은 못 산다나... ㅠ.. 미련 곰탱이..

그러니 돌봄 중독자가 된 것도 지금에 와선 감사할 일이 됐고, 돈이 부족했던 것도 감사하고, 직업 없었던 것도 감사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도 감사하다. 인생에 주어진 것과 부족한 것은 신을 믿는 사람 입장에선 오히려 감사할 일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다 주어졌다면 남편을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남편 부모님의 초대로 집에 가보고서야  남편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상대적으로 다른 가족들은 자신의 필요에 민감한 편이었고, 자기 것을 잘 챙겼다. 그에 비해 남편은 양보를 정말 잘했다(재화는 어느 집이나 한정적이니까, 누군가는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남편의 집이 내 생각처럼 가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냥 오빠가 인내심이 강하고, 어려움을 잘 견디는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후에 남편의 부모님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내게 도움을 자주 주신 분들이라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것에든 대가가 따른다는 것도 그때 많이 배웠다. 원래 세상엔 공짜가 없다. 스무 살이 넘으면 부모 자식 간에도 기브 앤 테이크가 세상 원칙이다(법륜스님의 담화 중). 운이 나빠 테이커 부모님을 만났다면 정말 운수 나쁜 날의 일상이 계속될 거다. 기버 까진 아니어도 매처 부모님이라면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책 기브 앤 테이크에서 기버, 매처, 테이커 개념으로 생각해 봤다.).

(책 기브 앤 테이크 / 기버: 퍼주는 사람, 매처 :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람, 테이커 : 받기만 하는 사람)

참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점이 많다. 연애 초 남편이 내 눈에 그리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면 그리 깊게 사랑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마 시작도 안 됐겠지. 내가 병들어 있어서 약하고, 불쌍하고, 부족해 보이는 것들에(내 생각에) 끌렸다. 과거의 나는 코디펜던트, 평강공주 증후군, 2 유형의 병든 자아, 기독교의 잘못된 가치관 교육, 스톡홀름 증후군, 구원자 증후군 등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나는 희생과 봉사가 진정한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고 돌봐야 진정한 사랑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 연인들에겐 뭔가 마음을 쓸만한 병든 구석이 하나씩 있었다. 스스로를 치유할 때마다 끌리는 부분도 계속 달라졌다. 한 심리학 책에서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비슷한 사람을 삶에 계속 끌어들인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공감한다. 나는 매년 달라졌지만,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 결혼을 원했지만 내 부족한 부분(직업 없음, 돈 없음, 미래 불투명함 등) 덕분에 결혼 앞에서 접힌 경우가 여럿 있다. 정말 감사하다.

인내와 희생의 크기가 커질수록 만족감이 높아졌고(뛰어넘었다든가, 세상이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라든가) 사랑의 깊이도 깊어졌다. 어릴 때부터 살아왔던 방식대로 나는 건강한 사람은 굳이 놔두고(건강하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 많았다.), 마음의 병을 자극하는 사람들을 선택해 사랑했다.

거듭 말하지만 남편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남편은 나보다 월등히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다. 지금도 남편과의 만남은 병든 내가 만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는 신의 은총이었다고 생각한다. 혼자 착각하고 오해한 것도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착각과 오해는 언제나 자기가 하는 거니까. 내면의 판단과 생각은 사실 여러 면에서 주관적이다.

자신이 병든 걸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자극하고, 더 깊게 만드는 사람들을 선택해 사랑한다. 심리학을 공부하면 알게 되는 게 있다. 자신을 치료하지 않으면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심리적인 병을 고스란히 물려준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병을 자극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그러니 모든 관계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그와 아이를 낳아 키우면 원가족의 형태와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반복한다. 그러니 아이도 결국 정신적, 신체적으로 병들게 될 수밖에 없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하고,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고 싶은 건강한 사람들을 삶에 들이려고 하고, 무엇보다 오늘의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걸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니 이제 드디어 나는 엄마가 될 준비가 됐다. 과거의 내가 엄마가 됐다면 나는 아이를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키워냈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냉해진다.

남편에게 그가 선택한 브라운 회사의 9 프로 플러스 면도기를 선물했다. 도착 후 남편이 개봉하는 모습을 봤는데 얼마나 행복해하던지 나까지 덩달아 행복했다. 원래 사용하던 제품도 브라운 회사의 제품이었다(7시리즈). 세척기가 고장난지 꽤 됐는데도 구입하지 않고 물과 비누로 세척해 쓰고 있었다. 사준다고 해도 남편은 이렇게 써도 된다며 구입을 오랫동안 만류했다. 그러다 이번 결혼기념일을 핑계로 드디어 가장 좋은 제품으로 마음에 드는 걸 사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과거를 생각하면 살면 살수록 삶이 고달프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갈수록 삶이 좋아지고, 내가 좋아진다. 내가 좋아질수록 남편과 세상이 더 좋아진다. 예전처럼 무조건 세상이 아름답다는 환상을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세상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이 있으니까. 세상은 마냥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다른 답변을 준다. 그러니 나는 이제 사는 게 참 좋다. 그리고 남편이 내 가족이 됐다는 것이 세상이 좋아진 가장 큰 이유다.

나중이야 변수가 생기든 말든 그건 그때 이야기고(살다 보면 달라진다라거나, 바람피우면 어쩔 거냐라던가. 기타 등등 이야기를 붙이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어쩌라는 거냐. 당신 인생이나 챙겨라.), 일단 오늘이 좋고, 행복하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나와 삶을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도 남편을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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